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했던 크림반도가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때문이다. 푸틴은 지난 18일 흑해의 발라클라바 만에서 간이 잠수정을 타고 해저로 내려갔다. 크렘린은 이날 푸틴이 잠수하는 모습과 시민들의 환호하는 모습 등이 담긴 사진들을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푸틴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함께 동그란 공 모양의 잠수정을 타고 물속 83m까지 내려가 9~10세기 비잔틴 제국의 난파선 등 ‘해저유물’들을 관찰했다. 러시아지리학회 창립 17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였다.
"누가 크림의 보스인지 보여줬다"
푸틴이 잠수한 곳은 러시아군이 자랑하는 흑해함대 기지인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항구 바로 앞이다. 명분은 ‘난파선 탐사’였지만, 지난해 우크라이나로부터 떼어내 병합한 크림반도 소유권을 외부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이번에 사흘 간의 일정으로 크림반도를 찾았다. 혼자서만 간 것이 아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현 총리 등 각료들과 주요 정치인들, 기업인들을 줄줄이 데려갔다.
사진 리아노보스티
러시아 언론 스푸트니크는 푸틴이 세바스토폴에서 시민들 앞에 연설하면서 “크림반도의 미래는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3월 크림반도 자치의회는 주민투표를 거쳐 우크라이나 대신 러시아로 귀속되는 길을 택했다. 크림반도 자치정부 대표들은 모스크바를 찾아가 러시아로의 합병을 요청했고, 푸틴이 이를 수용하고 국가두마(러시아 의회)가 승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푸틴이 새삼 주민들의 결정을 부각시킨 의도는 명백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나 서방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푸틴은 “주민들은 러시아와 하나가 되는 걸 택했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못박았다.
(잠시 샛길로 새자면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스푸트니크라는 언론은 그동안 세계에 ‘리아노보스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언론사다. 푸틴은 지난해 12월 유력 국영통신사였던 리아노보스티와 ‘러시아의 소리’ 라디오방송을 해체했다. 두 미디어를 합쳐 만든 새 회사에는 자신의 측근을 수장으로 앉혔고, 통합 미디어의 대외용 이름으로는 서방에 충격을 안겼던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여전히 리아노보스티라 불린다.)
"더이상 왈가왈부 마라. 이걸로 끝."
미국과 유럽 등이 크림반도 합병을 이유로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는 언제나 단호하다. 영국 BBC방송은 푸틴의 ‘잠수함 이벤트’에 대해 “액션맨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전형적인 디스플레이(전시행사)”라고 보도하면서 “누가 크림의 보스인지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한번도 ‘남의 나라’라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옛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상실’한 것이라고 여겨왔다는 것이다. 서방 언론들조차도 크림반도 주민 다수가 러시아 귀속을 환영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푸틴이 남다른 이벤트를 보여준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푸틴은 2년 전에도 난파선을 찾는다며 핀란드만과 바이칼호를 탐험했다. 2010년 큰 산불이 났을 때에는 직접 소방용 헬기를 조종해 진화작업에 나섰고, 2014년에는 시베리아에서 행글라이더 비행을 했다. 야생호랑이에게 위성추적장치를 다는 모습(2008년), 웃통을 벗고 말 타는 모습(2009년)을 보여주기도 했다.
흑해 잠수는 대내적으로는 푸틴이 ‘강력한 국가지도자’의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다시한번 부각시키려는 정치행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부 세계에서는 해저로 가라앉는 푸틴의 모습을 희화화할지 몰라도, 푸틴의 모든 행보에는 늘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다. 서투른 ‘고고학자 코스프레’라고 폄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는 무엇보다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의 역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해 말 푸틴은 크림반도 남쪽에 있는 고대도시 케르소네소스의 정교회를 부활시켰으며, 크림반도를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산(템플마운트)에 비유했다. 케르소네소스는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도시로 한때 ‘동방기독교’로 불리는 러시아 정교의 중심지였다. 15세기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멸망한 뒤에도 이 도시는 정교를 지켜온 보루였다. 공교롭게도 가톨릭과 구분되는 러시아 정교를 창설한 인물의 이름은 10세기의 블라디미르 대제다. 크림반도의 정교에 다시금 힘을 실어주는 푸틴의 움직임은 ‘블라디미르 대제의 재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궁지에 몰리고 푸틴 체제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전망이 잠시 나왔으나, ‘러시아 위기론’은 어느 새 사그라졌다. 이달 초 러시아는 치즈와 과일 등 식료품 320t을 하루만에 폐기했다. 불도저를 비롯한 중장비를 동원해 음식을 짓이긴 뒤 매각하거나 불태웠다. 모두 서방에서 밀수된 것들이다. 유럽이 제재를 하자 러시아는 지난해 8월 유럽산 식료품 수입금지 조치로 맞섰다. 유럽이 돈줄을 막는다면 러시아도 유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뜻이다. 치즈를 짓이긴 것은 푸틴이 유럽식품 수입금지조치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한 직후였다. 식품 폐기 장면은 TV를 통해 방영됐고, 정부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언론들에 배포했다.
러시아는 그 뒤 밀수식품을 신고하는 핫라인을 만들고, 식품 소매체인들에 대한 단속에 들어갔다. 서방 제재의 효과로 러시아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제재의 부메랑은 오히려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러시아로 생산품을 많이 수출했던 유럽 농민들과 축산농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며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농민 시위가 잇따랐다. 유럽연합(EU)은 궁여지책으로 농가와 축산업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흔들고자 했던 푸틴 대신 유럽의 농장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일각에선 푸틴이 잠수 이벤트로 액션맨 이미지를 강화하고 나선 것이 ‘권력이 흔들린다는 반증’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푸틴의 위세가 약화됐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크렘린에 동요가 오고 있는지, 제재 이후 러시아의 경제난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국민대 국제학부 정재원 교수는 “현재로서는 푸틴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서방이 예상했던 것보다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앞에서 '버티기'를 논하지 말라
몇몇 외신들 표현대로 러시아 국민들은 “세계대전도, 스탈린 통치도, 그 힘들었던 체제 전환기도 버텨낸” 사람들이며 버티기에는 이골이 나 있다. 러시아의 산업이 취약한 것은 맞지만 밖에서 보는 것처럼 형편없지는 않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소련이 해체된 후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 후 러시아의 소비재 산업은 나름 발전했다. 전자제품 등 고부가가치 산업은 타격을 받았겠지만 당장 폭동이 일어날 수준은 아니다. 제재에 가담하지 않은 나라들이 많은데다 무엇보다 중국이 도와주고 있다. 서방과 등 돌린 러시아는 중국과의 밀월관계를 강화했으며 유라시아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옛소련권 국가들을 규합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다. 또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길도 아직은 열려 있다.
모스크바타임스는 19일 러시아 국민 절반 이상은 푸틴 대통령이 현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모스크바 레바다센터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6%는 푸틴이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완전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14%는 푸틴의 측근들이 대통령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이 국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은 31%였다.
재미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22%는 푸틴은 아무 잘못이 없으며 측근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답변은 2012년 조사 때보다 오히려 2배로 늘었다. 여론조사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푸틴이 당장 체제를 흔드는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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