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정부를 ‘백악관’이라 칭하고 미국 국방부를 ‘펜타곤’이라고 부르고 한국 대통령과 정부를 때로는 ‘청와대’라 부르듯, 건물이 곧 대명사가 되곤 하지요. 프랑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하면 외신에서는 ‘엘리제궁은 ~라고 말했다’고 쓰고, 영국 총리의 경우는 ‘다우닝가 10번지’라는 주소를 대명사로 쓰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크렘린은 러시아의 대통령, 혹은 옛 소련 시절에는 서기장이나 공산당 정부를 가리키는 호칭이었지요.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크렘린은 비밀의 온상(?) 혹은 무언가 알려지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사진 크렘린박물관(kreml.ru)
원래 크렘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예전 러시아의 도시들에 있던 요새를 가리켰다고 합니다. 요새에 주거시설 등이 붙어 있는 일종의 복합단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모스크바의 크렘린이 워낙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돼버렸습니다. 어원은 ‘크레믈(кремль)’이라는 단어인데 ‘도시 속의 요새’를 뜻한다고 합니다.
‘요새’에서 비롯된 크렘린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모스크바 강이,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건축물인 성 바실리 성당과 붉은 광장이,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르 정원이 바라보인다고 합니다만 저는 가보지 못했으니 그저 글로만 읽었을 따름입니다. 이 단지에는 궁전 건물 5채, 성당 4개, 성벽과 탑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크렘린이 있는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 유라시아 민족인 핀(Fin)족과 우그르(Ugr)족이 거주했습니다. 오늘날의 핀란드 민족과 헝가리 민족이 핀과 우그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슬라브인이 이들을 밀어내게 되지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집시, 블라흐계, 유대인, 이탈리아계, 프리올리계 등을 제외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부 유럽의 주요 민족은 슬라브계와 게르만계, 투르크(터키)계, 그리고 토착 민족의 4부류로 나뉩니다. 프리피야트 강 부근 드넓은 습지대에서 살던 슬라브족은 5~7세기 동유럽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 중 폴란드계, 체코계, 모라비아계, 슬로바키아계, 그리고 소르브족 등을 가리켜 ‘서슬라브계’라 부릅니다.
또 다른 슬라브 부족들은 남쪽과 남서쪽으로 이동해 멀리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나갔습니다. 남동부 유럽에 정착한 불가리아계, 크로아티아계, 몬테네그로계, 마케도니아계, 세르비아계, 슬로베니아계 등을 통칭 남슬라브계라 합니다. 이들 외에 프리피야트 강 유역에 그대로 남았거나, 더 동쪽, 동북쪽의 울창한 삼림지대로 들어갔거나, 아니면 광대한 유라시아의 스텝 평야로 나간 사람들을 동슬라브계로 분류합니다. 대(大)러시아계, 벨라루스계, 우크라이나계, 루테니아계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슬라브인들은 보로비츠키 언덕의 남서쪽에 11세기부터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글리나야 강이 모스크바 강과 합쳐지는 곳 부근에 ‘그라드’라 부르는 요새화된 구조물이 들어섰습니다.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같은 지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이지요. 14세기에는 이 일대가 ‘모스크바 그라드’라고 불렸습니다. 키예프 대공이던 유리 돌고루키가 1156년 이 그라드를 확장했으나 1237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요새는 파괴됩니다. 그러고 나서 1339년에 다시 지어집니다. 모스크바라는 지명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47년의 것입니다만, ‘크렘린’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 것은 1331년입니다.
모스크바 강변에서 본 크렘린. <출처: (cc) Ludvig14 at wikipedia.org>
이반2세의 아들인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59년부터 1389년 숨을 거둘 때까지 모스크바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떡갈나무로 돼 있던 성벽을 석회암으로 바꾸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성벽의 기본 틀을 만들었습니다. 성벽을 새로 세우는 공사는 1366년부터 2년 여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 아들인 바실리1세는 요새 안에 교회와 수도원들을 지었습니다. 성벽을 다시 만든 것은 잘 한 일이었습니다. 1382년 칭기즈칸의 후예인 토크타미쉬 칸이 침공해왔을 때에도 버텨주었으니까요.
몽골에 맞선 요새, 차르의 궁전이 되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3세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라틴식으로는 페트루스 안토니우스 솔라리우스, 러시아식으로는 표트르 프랴진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같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크렘린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솔라리는 크렘린의 성벽 일부와 탑을 새로 디자인해 세웠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성벽은 1485~1495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마르쿠스 루푸스라는 건축가는 대공을 위한 새 궁전을 설계했습니다. 16세기 초반에는 크렘린에서 가장 높은 이반대제 종탑이 세워졌습니다.
키예프 대공 유리 돌고루키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이제 왕궁의 틀을 갖춘 왕실은 요새 단지 안에 더 이상 다른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저잣거리는 크렘린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키타이고로드라 불리던 상업지역과 크렘린 사이에는 폭이 무려 30미터에 이르는 큰 도로가 생겨 두 곳을 갈랐습니다.
성 바실리 성당이 지어진 것은 보통 ‘이반 뇌제’라 불리는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쓰던 왕궁들을 리노베이션 했고, 자기 자식들을 위해 새 성당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공국의 태평성대는 길지 않았습니다. 사실 동유럽과 러시아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다 보면, 대체 이 지역에 평화롭던 시기가 있기나 했던가 싶을 정도로 곡절이 많습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까지, 러시아에 동란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키예프 대공, 모스크바 대공 등의 타이틀을 쥐고 있던 류릭 왕조의 마지막 차르가 죽은 1598년부터 15년 동안 통치자가 없는 ‘공위(空位) 기간’이 이어졌던 겁니다. 이 힘들었던 시기에 러시아에는 기근이 닥쳐서 주민의 3분의 1인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곳곳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폴란드가 침공을 해왔습니다. 크렘린은 1610~1612년 폴란드 군에 점령됐습니다. 마침내 크렘린이 해방되고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올라 새 왕조를 연 것은 1613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크렘린. <출처: www.kremlin.ru>
표트르 대제, 크렘린을 버리다
미하일과 그 아들 알렉세이는 크렘린에 11개의 돔을 가진 구세주 성당(예전에 황실 가족이 쓰던 곳이고 지금 대통령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크렘린 남쪽에 있는 유명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과는 다른 건물입니다)과 기념문(게르보비예 보로타·Гербовые ворота) 등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세이가 죽고 나서 1782년 모스크바에 봉기가 일어나서, 표트르 대제(1672~1725)가 거의 죽을 뻔합니다. 그래서 표트르는 크렘린에 오만 정이 떨어졌고, 자기 이름을 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천도를 해버렸습니다.
그나마 차르의 대관식은 크렘린에서 치렀지만 그마저도 1773년 끝이 났습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크렘린의 옛 궁전을 헐고 새 궁전을 지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당대의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가 그 대역사를 맡았습니다.
당초 바제노프가 설계한 것은 앞면 길이만 630m에 이르는 4층짜리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교회 몇 곳과 예전 왕궁 건물 몇 채를 없애야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 지으며 돈 탕진하는 것은 무모한 왕실들의 고전적인 행태 아니겠습니까.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모자라 새 왕궁 건설 작업은 중단됐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서 건축가 마트베이 카자코프의 지휘 아래 다시 공사가 재개됐습니다. 지금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도 영욕의 역사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181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이 침공했을 때 잠시 크렘린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크렘린 종탑을 그린 19세기의 회화. <출처: reml.ru>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건물의 보수공사를 지시했고, 그 후로도 수차례 보수공사가 벌어졌습니다. 1851년 공사 이후로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차르의 흔적’ 지운 스탈린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3월 모스크바에 입성합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크렘린의 상원 건물을 관저로 삼았습니다.
1922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렘린의 주인이 되지요. 스탈린은 “차르 체제의 유물들”을 크렘린에서 걷어내려 애썼습니다. 탑 꼭대기에 장식돼 있던 황금 독수리들은 별 장식으로 대체됐습니다. 14세기에 지어진 추도프 수도원과 16세기의 성당들은 군사학교와 하원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오래된 구세주 성당도, 니콜라이 궁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 히틀러의 군대가 크렘린 밖 30킬로미터 거리에까지 진격해 들어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크렘린의 집무실과 관저 외에도 여러 곳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1919년 우소보라는 지역의 농가를 자기 집으로 삼기도 했고, 주발로바와 쿤체보 등지에 ‘다차’라고 부르는 여름 별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해진 소치를 비롯, 최소한 4곳에 다차를 두었습니다. 흑해 연안의 젤료니 미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 럭셔리 빌라를 보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집들은 외교적인 용도나 공무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주로 스탈린이 사적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1936년 3월 크렘린에서 그루지야(조지아) 사절단을 맞고 있는 스탈린.
여담입니다만 스탈린은 기차나 자동차로 움직였지, 크렘린 밖으로 나가 멀리 이동할 때에도 결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비행기로 이동한 매우 드문 사례 중 하나가 1943년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한 테헤란 회담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집무실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 것은 1955년의 일입니다. 그 사이 30여 년 동안 크렘린은 ’베일에 싸인 권력기관’이었습니다. 스탈린의 뒤를 이어 1952년 소련 공산당 서기관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 스탈린화’ 작업을 벌였고, 일종의 개방·유화 제스처로 집권 3년 뒤 크렘린 집무실을 공개했습니다. 흐루쇼프는 나중에 비망록을 통해 스탈린 시절 크렘린에 영화관이 있어서 공산당 간부들이 모여 몰래 서방 영화를 보기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1953년 사망한 스탈린은 붉은 광장의 레닌 영묘(靈廟)에 안장됐습니다. 그러다가 역시 흐루쇼프 때인 1961년 신화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크렘린 묘지(Kremlin Wall Necropolis)에 이장됩니다. 그 해에 크렘린 박물관도 문을 열었습니다. ‘소비에트의 유적’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이 일대는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현재 크렘린 역사문화지구의 총책임자이자 박물관들의 운영을 총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인류 최초로 우주에 나갔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딸 엘레나 가가리나랍니다.
1957년 흐루쇼프는 모스크바에서 세계 청년학생대축전을 개최했습니다. 공산청년동맹(콤소몰)이 주축이 돼 소련 전역과 공산권 국가들의 청년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300만 명이 이 ‘사회주의의 대축제’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대부분 소련 사람들이었고, 외국인은 3만 명 정도였습니다.
‘러시아’ 깃발이 걸리다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등을 지나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크렘린의 주인이 됐습니다. ‘머리에 지도가 그려진’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1990~1991)이기도 하지요. 소련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1991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사라졌으니까요.
고르바초프 집권기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고 부르는 개혁·개방이 진행된 시기인 동시에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1991년 8월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련 공산당과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개혁파들은 더 강도 높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한 반면, 공산당 기득권층은 그에 맞서 옛 질서를 옹호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비상국가위원회를 만들어 고르바초프를 권력에서 내몰려고 했고, 고르바초프는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크림반도에 있는 여름 별장에 감금돼 있어야 했습니다.
쿠데타는 사흘 천하로 끝났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8인방’ 중 일부는 붙잡혀 반역죄로 기소됐고, 한 명은 사살됐습니다. 합참의장을 지냈던 장군 세르게이 아크로메예프는 쿠데타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혐의를 부인했으며, 크렘린의 자기 집무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권력의 궁전 안에서 벌어진 어두운 역사의 단면인 셈이지요.
쿠데타 세력은 제거됐으나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더 이상 공고하지 않았습니다. 8월 24일 크렘린으로 복귀하자마자 그는 공산당 서기장 직책을 내려놨습니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의 모든 당 기관들은 해체됐습니다. ‘공산당 일당 체제’가 막을 내린 겁니다.
크렘린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들 <출처: kreml.ru>
이미 연방 산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의 움직임이 시작된 터였습니다. 고르바초프는 10월 18일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현재의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대표들과 새로운 경제공동체 협정을 맺습니다. 연방의 해체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 해 7월 러시아 대통령이 된 옐친은 크렘린에서 소비에트 깃발을 내리고 러시아 국기를 올렸습니다.
푸틴, 새로운 차르?
크렘린 웹사이트에는 대통령에 관한 뉴스와 이벤트, 사진과 동영상, 문서 자료들이 올라옵니다. 다른 나라의 대통령 사이트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차르 시절, 그리고 소련 시절의 크렘린과 지금의 크렘린은 이미지가 사뭇 다르지요. 무엇보다 지금 크렘린은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러시아의 자유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크렘린은 언론을 탄압하고, 비판 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체첸 문제나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는 가혹하게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하거나 군대를 보내 땅을 병합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푸틴에게 대놓고 반대하는 이들은 생명의 위협을 감내해야 합니다. 2015년 2월에는 크렘린 바로 옆에서 푸틴의 반대파인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가 암살됐지요. 넴초프는 크렘린과 인접한 도로에서 총격을 받았지만, 역사적으로 크렘린 안에서 벌어진 암살도 드물지 않답니다. 차르 알렉산드르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비치 모스크바 대공은 1905년 크렘린에서 일어난 폭탄 공격에 숨졌습니다. 16세기의 이반 뇌제는 알렉산드라 황후가 죽자 누군가가 궁 안에서 독살한 것으로 의심하고 대대적인 색출작전을 벌였습니다.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푸틴은 권력을 공고히 해왔습니다. 푸틴은 1999년의 마지막 날 건강이 악화된 옐친 대통령의 권한대행이 됐고, 이듬해 5월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2008년까지 두 번의 임기를 보냈고, ‘3연임 금지’ 헌법 조항에 걸려 잠시 총리로 내려앉았다가 2012년 다시 집권했습니다. 권좌에 오래 앉아있는 것에 비해 나이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젊습니다. 2015년 10월 만 63세가 됐으니까요. ‘이론적으로는’ 다음 대선에서 또 연임을 하는 것도 가능하니, ‘이름만 대통령’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세워두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총리 시절까지 포함하면 20년 집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15년 5월 1일 크렘린에서 ‘노동영웅’들을 표창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출처: kremlin.ru>
그런 푸틴은 크렘린에서 어떤 생활을 할까요. 영국 인디펜던트는 2014년 7월 베일에 가려진 푸틴의 사생활을 엿보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미궁 속 독재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에 따르면 푸틴은 ‘올빼미형’입니다. 밤늦도록 일하고, 늦게 일어나 치즈와 오믈렛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는다고 합니다. 푸틴이 먹는 식재료는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인 키릴 대주교 소유의 농장에서 가져온다네요.
오후에는 집무실에서 관료들의 브리핑을 받는데, 보안을 중시해 늘 서면보고를 받으며 언론보도도 반드시 종이 인쇄본으로 체크한다고 합니다. 서방 언론들은 흔히 푸틴을 러시아의 ‘현대판 차르’라고 부릅니다. 정작 이 ‘새로운 차르’의 생활은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인디펜던트는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것이 ‘의례화’ 돼있어서 우연한 행보는 없다”며 “감옥처럼 격리된 채 완벽히 통제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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