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황제 표트르3세는 1762년 1월에 즉위했지만 차르 자리에 앉아있었던 기간은 반년에 그쳤습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한 근위병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6개월만에 폐위시켰고, 며칠 뒤 쫓겨난 차르는 암살당했습니다. 살인범의 정체는 미궁에 빠졌으나 후대 학자들은 표트르3세의 황후였고 뒤이어 즉위한 예카테리나 여제 쪽의 짓으로 봅니다.
표트르3세의 죽음 이후 250여년이 지났지만 ‘암살’은 끊임없이 러시아를 들쑤십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2015년 2월, 제1부총리까지 지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맞서며 야권 지도자로 변신했던 보리스 넴초프가 피살됐습니다. 크렘린 바로 옆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차르의 목숨은 파리 목숨?
넴초프는 무장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아 숨졌지요. 푸틴 대통령은 내무부와 연방치안국(FSB)에 이 사건을 조사할 위원회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과거 벌어진 여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은 경력이 있는 군 장성 출신의 이고르 크라스노프가 조사위원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별로 없었습니다. 크렘린이 지명한 조사관들은 이 사건을 ‘국가의 안정을 흔들려는 선동’이라 봤습니다. 잔혹하게 분리주의자들을 고문·살해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체첸자치공화국의 람잔 카디로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넴초프 살인은 서방 정보기구 소행”이라는 주장을 올리며 선두에서 음모론을 유포했습니다.
어찌 됐든 옛소련 시절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했던 KGB의 후신인 FSB가 나섰고, 며칠 지나지 않아 ‘체첸 출신’ 용의자들이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범행을 인정했던 핵심 피의자는 “고문을 당했다”며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꼬리 자르기’ 논란에 이어 고문 의혹까지 제기됐지요.
넴초프 살해의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러시아에서 최고위층 혹은 정적의 암살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2010년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한 적 있는 저널리스트 올레그 카신은 “누가 적을 죽이면, 피해자 쪽과 관련된 음모론이 나오는 것이 집단적 관행처럼 돼버렸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특히 암살이 횡행했습니다. 표트르3세뿐 아니라 그의 아들 파벨1세도 즉위 4년만에 살해됐습니다. 역시 개혁파였던 알렉산드르2세도 수차례 암살기도를 모면했으나 1881년 결국 피살됐습니다. 20세기 들어서도 모스크바의 로마노프 대공 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차르와 차르 일가는 늘 암살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푸틴, ‘암살의 공포’를 되살리다
옛소련 시절에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이 반복되면서 정적 암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1948년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찰관이 유대계 지도자를 살해한 적 있고 1969년 브레즈네프 암살 기도가 적발된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진 뒤 암살을 이용한 공포정치가 부활했습니다.
차르 시절의 암살이 권력의 핵심부를 겨냥한 것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의 암살은 반체제 인사들이나 비판자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행위라는 게 큰 차이입니다. 이런 살인의 대상은 정치인, 언론인, 인권변호사, 전직 스파이 등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고르 탈코프라는 가수는 반소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91년 살해됐습니다. 반러시아 게릴라 출신으로 뒤에 체첸자치공화국 대통령이 됐던 조하르 두다예프는 1996년 러시아 군인에게 사살됐습니다. 으스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이 독재국가이고 공포정치이지요.
2000년 푸틴 집권 이후에는 반체제 정치인이나 비판적인 언론인의 희생이 유독 늘었습니다. 체첸과 남오세티야, 다게스탄 등 러시아 중부 자치공화국의 분리주의 정치인 여러 명이 살해됐습니다. 푸틴에게 맹종하는 카디로프 현 체첸 대통령의 아버지 아흐마디 카디로프는 반대로 2004년 분리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와 인권, 시장경제를 주창해온 정치인 세르게이 유셴코프는 2003년 12월 총선 때 후보등록을 하자마자 피살됐습니다. 2002년에는 정보당국의 반대세력 암살작전들을 다룬 <러시아의 암살>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누가 그에게 ‘독이 든 찻잔’을 주었나
아나톨리 트로피모프 FSB 부국장은 모스크바 시내에서 부인과 함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런데 그 파장은 1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습니다. 발단은 트로피모프의 암살이었지요.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트로피모프가 푸틴의 체첸 공격에 반대했다가 살해된 것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리트비넨코 역시 독살당했습니다.
리트비넨코라는 인물은 2000년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5년 뒤인 2005년 트로피모프 암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이듬해에 영국 국적을 취득한 리트비넨코는 트로피모프 사건과 푸틴이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정치에 대해 논평하면서 푸틴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 해 11월 리트비넨코가 독살당합니다. 전개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스파이 영화 같습니다. 그는 런던의 한 호텔에서 FSB 요원들과 만났고, 차를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고 3주 만에 숨졌습니다. 그의 몸 안에서는 폴로늄210이라는 방사성 독극물이 검출됐습니다.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었고, 영국 정부는 10년에 걸쳐 조사를 했습니다. 지난 21일 영국 조사팀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보고서는 “모든 증거를 고려할 때 FSB가 살해했고, 그 계획은 푸틴 대통령이 최종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리트비넨코와 런던의 호텔에서 만난 FSB요원 안드레이 루고보이와 드미트리 코프툰이 살해범으로 지목됐습니다. 폴로늄210이라는 물질은 원자로에서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조사팀은 밝혔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미 루고보이와 코프툰에게 국제 지명수배를 내린 상태입니다. 반면 러시아 측은 “터무니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으로 가뜩이나 썰렁한 러시아와 영국 관계는 더 냉각될 것 같습니다.
암살, 그 기나긴 역사
암살의 역사는 곧 ‘정치의 역사’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2300년전 인도의 마우리야 왕조를 연 찬드라굽타는 정적들을 암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고,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지요. 물론 이 말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해 널리 알려진 것일 뿐, 실제로 카이사르가 숨지기 전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중세 이슬람권의 ‘아싸씬’이라는 집단은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자행했으며 그것이 곧 현대 영어 assassination(암살)의 어원이 됐다고도 합니다.
미국에선 4명의 대통령이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가필드, 윌리엄 매킨리, 그리고 존 F 케네디. 죽음을 모면한 이들도 있습니다. 앤드루 잭슨,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이 암살을 가까스로 모면했습니다.
역사를 바꾼 암살이라고 하면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의 총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청년의 총에 맞아 숨졌고, ‘세력균형’으로 간신히 힘의 밸런스를 유지하던 유럽은 와르르 무너지게 되지요.
두 차례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냉전은 숱한 암살 혹은 암살기도 사건들을 낳았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살해하기 위해 수많은 작전을 벌였으나 번번히 실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자 팀 와이너는 CIA 비사를 다룬 책 <잿더미의 유산>에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던 작전들이 결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라는 역풍으로 나타났으나, 미 당국은 이를 숨기기 위해 급급했다고 썼습니다.
총탄에 숨진 성자
인도도 암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남성이 세계의 존경을 받던 마하트마 간디를 살해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 전 인도 총리의 딸이자 인도의 3대 총리를 지낸 인디라 간디는 1984년 시크교도에게 암살됐습니다. 당시 펀자브주에 있는 암릿사르의 ‘황금 사원’이라는 곳에서 시크교도들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간디는 이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거기에 반발한 시크교도가 간디를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간디의 아들 라지브도 1991년 스리랑카의 민족운동과 관련 있는 타밀엘람해방전선(LTTE·흔히들 ‘타밀타이거’라고 부릅니다)에 희생됐습니다. 그 후 라지브의 아내인 소냐 간디가 국민회의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미국 민권운동의 대명사인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간디처럼 비폭력과 불복종을 설파한 인물이죠. 킹 목사는 1968년 4월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호텔에서 인종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았습니다. 킹 목사와 노선은 달랐지만 역시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맬컴 X는 그보다 3년 전인 1965년 2월 살해됐습니다.
2007년 말 파키스탄의 총리를 지낸 여성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가 지지 집회에 참석했다가 암살당했습니다. 당국은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부토 지지자들 사이에선 정적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의 암살공작이라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그 이듬해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부토에 대한 동정여론과 부토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처지가 바뀐 무샤라프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됐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2013년, 검찰은 무샤라프를 부토 살해혐의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 지도부를 ‘표적살해’하는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총리는 경호원도 없이 부인과 영화를 보러 갔다가 1986년 의문의 암살을 당했습니다.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노래
암살자에게 숨지는 것은 정치인들만이 아닙니다. 비틀스의 멤버인 존 레넌은 1980년 12월 뉴욕주 다코타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에콰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추기경은 독재정권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가 1980년 총탄에 쓰러졌지요.
환경을 지키는 이들도 희생양이 되곤 합니다. 다이앤 포시는 르완다에서 마운틴고릴라를 연구하던 미국의 생물학자였습니다. 침팬지를 연구한 제인 구달, 오랑우탄을 연구한 비루테 발디카스와 함께 손꼽히는 세 명의 여성 영장류학자였습니다. 포시는 1985년 르완다의 비룽가 산악지대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됐습니다. 자연보호구역 지킴이로 나선 그를 미워한 밀렵꾼들이 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브라질의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1988년 역시 벌목업자들에게 살해됐습니다. 2005년에는 멘데스처럼 아마존 보호 활동을 하던 도로시 스탱 수녀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난해 11월 칠레 정부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군부에 타살됐을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이며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네루다는 군부 쿠데타 뒤 자살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절친한 벗이었습니다. 아옌데가 목숨을 끊은 뒤 네루다는 갑자기 병원에 실려가 사망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군부에 의한 암살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칠레 군사정권은 아옌데를 몰아낸 뒤 1973년 체육관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처형했습니다. 당시 숨진 사람 중 한 명은 유명한 좌파 시인 겸 가수 빅토르 하라였습니다. 끔찍한 고통 속에 집단 처형된 하라의 죽음 역시 정치적 암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포를 노래할 수밖에 없을 때 노래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살아 있어 느끼는 공포 죽어가며 느끼는 공포/너무나 많은 순간 속 나를 본다/저 무한의 순간 침묵과 비명이 내 노래의 끝이다.” 하라의 마지막 노래였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제거하는 이 폭력적인 수법은 언제나 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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