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길.
연말에 잼나게 읽은 책. 모두모두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서아프리카에 관심이 쪼마만큼 있으니 아무래도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다호메이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런 식의 지역학 연구, 이런 식의 비교경제학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본다면 꽤 재미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낯설어도 너무 낯선 서아프리카 어느 구석탱이의 지나간 옛 자취라는 점이 아무래도 걸린다. 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 속에는 다른 화폐, 다른 시장, 다른 체제도 많았다는 걸 알기 위해서'라는 앙상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상하게만 들리는 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폴라니는 이 풍성한 연구를 펼쳐보인다.
폴라니는 18세기에 서아프리카 바닷가에 있었던 다호메이 왕국의 정치-경제구조를 살펴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노예무역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조응해 나갔는가를 파고든다. 첫머리의 설명을 빌면 이 연구는 "한 경제사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에 무언가 보탬이 되기 위한 작업으로서 착상한 것"으로, "다호메이가 겪었던 것과 같은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현실주의적으로 조망할 수만 있다면 이는 언제 어디서건 사람들의 시야를 크게 넓히고 또 그들이 직면한 여러 문제의 해법을 찾는 작업에도 큰 진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19쪽)이라는 얘기다. 폴라니는 이 '흑인 왕국'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절대적인 것인 양 여기고 있는 화폐, 시장, 교역같은 것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걸 얘기하기 위해 다호메이를 이 정도로 들여다봤다니, 폴라니는 대단한 사람이다! 폴라니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이니, 옮긴이가 열심히 의미를 부여한 폴라니의 의미니 하는 것들은 사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인데다 해석하는 사람의 바람이 매우매우 많이 들어가있는 듯해서 그리 와닿지는 않는다. 내게 감동적이었던 것은 다호메이에 대한 연구 그 자체였다. 그 시절에 이런 연구가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서구의 기록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하나, 폴라니가 1960년대 이후의 정치적 올바름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책을 이렇게 쓰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살짝 든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세계의 질서를 바꾸고 여러 대륙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서 '흑인들의 역할'은 다소간 터부시되는 주제였다. 백인들이 '검은 대륙'의 내륙에까지 속속들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가 활용된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노예는 누가 잡아다 팔았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다 유럽 노예매매상들에게 넘긴 것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 다호메이가 그런 노예 사냥 국가였다. 이것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불편한 진실'이다.
폴라니는 정치적 논평 없이 '경제구조'만 이야기하면서, 이 노예 사냥-매매 구조에 기반을 둔 다호메이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보여준다. 뒷부분 옮긴이의 해제를 보니, 노예무역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비판한 이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노예제가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는 아니니...
그나저나, 내게 서아프리카는 특별한 지역이다. 특정 대륙의 어떤 지역보다도 많이 가봤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다호메이가 있었던 베냉은 가보지 못했다. 베냉을 못 간 걸 아쉬워하게 되는 일이 있다니, 이럴 수가! (그렇다고 다호메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베냉에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평등이란 이제 모든 이들이 모든 이들을 상대로 삼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뜻하게 되었다. 합리성이란 효율성 그리고 이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시장적 행동으로 표상되었다. 경제를 지배하는 원리들은 절대적인 원리들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새로운 관점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들에 우선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회에 대한 경제의 위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서구 문명은 지금 어떤 취약성에 눌려 허덕이고 있다. 그 취약성은 그 경제적 운명을 결정해버린 독특한 조건들에 있다. '경제'라는 말은 이제 인간의 물질적 살림살이와 그것을 확보할 수 있는 실질적 기술이라는 뜻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경제적'이라고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버린 특정한 동기들, 독특한 태도들, 특정한 목표들을 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19세기의 망상에 계속 사로잡혀 있게 된다면 이념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삶으로의 길은 막혀버리게 된다.
시장체제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혁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벌써 노동시장이나 토지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들을 이해하는 능력에 큰 장애를 보이고 있다.
(22-23쪽)
다호메이를 커다란 긴장으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건은 외부에서 비롯되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번창하자 노예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이 다호메이에 바로 인접한 기니 해안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서인도제도에서는 획기적 대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는 그로부터 130년 후에 벌어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과 같은 종류로 분류할 만했다. 1601년 바베이도스 섬에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대서양 무역으로 인한 극적인 변화들이 줄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25년 안에 구(舊)식민체제(Old Colonial system)라고 불리는 구조 전체가 세워지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사이의 상업이라는 새로운 패턴이 그저 지리상의 발견의 여파로 생겨난 것이리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설탕 플랜테이션이 확립될 때까지 1세기 반 동안 그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62쪽)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그들이 살고 있는 촌락에서 끌어내어 1세기도 채 되기 전에 무려 수백만 명을 바다 너머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아주 특별한 종류의 무역이었다. 이는 평화적인 물물교환이라기보다는 중세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켰던 흑사병에 더욱 가까웠다. (63쪽)
그 전에는 어떤 서아프리카의 내륙국가도 노예무역이라는 것 때문에 자기들의 존속이 뒤흔들리는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이제 노예공급은 그 숫자에서나 사회를 파괴하는 정도에서나 내 ·외적으로 가히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슬라티(slattee, 시슬로 묶여 판매되는 노예집단)들 내에서 매년 새로 자라나는 노예의 수는 기껏해야 몇십 명밖에 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잡아들여서 코피알(coffial, 쇠사슬로 한 덩어리씩 묶인 노예집단 coffles)로 수백 명씩 묶어놓게 되면 판매할 수 있는 노예는 수천 명씩 불어난다. 노예무역을 위해서는 한 무더기의 성인들에게 낙인을 찍고 죽지 않을 만큼 먹이고 숙소에 수용·보존하고 수송하는 등의 작업과 절차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예무역상들은 덩치 큰 아프리카 국가 당국과 공존할 수 있는 양식(modus vivendi)을 찾아내야만 했으며 ... 다호메이는 군사적 위치가 불안했기 때문에 자국의 방어와 노예무역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68-69쪽)
다호메이의 행정은 정직성, 정밀성 신뢰성이라는 면에서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다. 남녀의 성차를 이용한 독창적인 방법이 도입되어, 모든 등급의 관리들은 남녀 두 명씩 짝을 지어 남성 관리는 실행을 맡아보고 여성 관리는 이를 통제하는 식으로 결합되었다. 왕실 행정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쌍을 이루어, 심지어 여러 개의 쌍을 이루어 진행된다. 무엇보다도 왕국 내 모든 관리들은 자신에 대웅하는 여성, 즉 ‘어머니’를 갖게 되어 있고, 이 여인들은 왕이 거주하는 주거복합체 내부에 산다. 그리하여 왕은 궁전 내부에 왕국 전체의 행정기구의 모든 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이 여성관리들은 나예(naye)라고 불린다. 모든 여인들은 자신에 대응되는 남성 관리의 행정 일을 낱낱이 파악하여 그의 행동을 시종일관 견제하게 된다. 이 나예들을 지휘하는 것은 또 다른 여성 집단인 크포시(kposi)로서, ‘표범의 부인들’이라는 뜻이다. 이 크포시 또한 다시 두 집단으로 갈라진다. 첫 번째 집단은 8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왕이 고문들을 접견할 때 항상 임석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집단 또한 8명으로 구성되어 장관들과 사제들이 보고를 올릴 때 그 상석에 앉아 이를 경청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요 관리 한 사람이 진술할 때마다 세 집단의 증인들 즉 그 관리의 ‘어머니’, 항상 왕 옆을 떠나지 않는 8명의 크포시 그리고 특정 부문의 장관이 보고를 올릴 때마다 불러들이게 되는 또 다른 8명의 전문 증인들이 입회하게 되는 것이다.
(114쪽)
아프리카 해안은 노예무역의 역사적 진화라는 점에서 세 지역으로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는 황금해안이다. 1660년대에 아프리카-아메리카 노예무역이 이 지역을 휩쓸기 전부터 이미 황금뿐만 아니라 노예도 판매되었다. 두 번째로, 동쪽으로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르드라 왕국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1669~1704년의 약 4반세기 동안 황금무역에서 노예무역으로의 이행이 일어났다.
세 번째 지역은 작은 왕국이었던 우이다이다. 우이다는 그 전에는 아르드라 왕국의 속국이었지만 17세기 말 노예무역의 물결을 타고서 국가로 자라났다. 교역이 이루어지던 방식은 이 세 지역과 시대 각각에서 해안 지역과 그 배후지의 정치조직이 어떠한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189쪽)
토착민들의 주요 산물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율에 입각하여 다른 주요 산물들과 ‘현물’로 교환되도록 표준화된 재화였다. 그것을 거래하는 이들은 일정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거래에서 소득을 얻지 않았다. 이러한 토착민들의 거래를 ‘관리된’(administered) 교역이라고 기술한다면, 유럽인들의 거래는 ‘시장교역’(market trading)이라고 묘사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전자와 반대로 가격에서 이윤을 얻는 것을 지뺨고 있으며, 따라서 화폐화된 회계를 고안하여 단일 통화 즉 황금으로 수없이 다양한 물품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토착민들의 교역에는 세 가지 서로 철저하게 엮여 있는 특정이 있었으며 이는 변화가 불기능한 것들이었다. 첫째, 그들이 교역하는 동기는 자기 내부의 주산물을 내어주고 먼 지역에서 나는 주산물을 얻고자 하는 필요였다. 이는 곧 등가물들을 서로 바꾸는 물물교환의 행동으로서 착상된 것이었다. 둘째,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화폐가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교역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 내부적으로는 화폐를 사용한다 해도 각자의 화폐가 다른 쪽 사회에서도 유통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산물들이 교환되는 비율은 전통적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가격흥정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 규칙이었다.
(249쪽)
일반적인 용어로 화폐란 회화, 쓰기 또는 도량형과 비슷한 모종의 의미론적 시스템이다. 이는 화폐의 세 가지 용법, 즉 지불수단, 가치표준, 교환 수단 모두에 해당된다.
고대적 화폐는 사회구조를 더 공고히 하는 독특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숫자로 세는 관행을 도입하면 의무와 권리를 양적으로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사회제도들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제도들의 사회학적 특정들은 주로 신분 형성 및 국가 건설과 결부되어 있다. 고대적 경제제도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와 연결됨으로써 서로 매개된다. 이러한 제도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분이 확고해지고 국가도공고해진다. 그 제도로써 이익을 보는 집단들 및 계급들의 이해관계는 그 제도들을 지탱해준다.
14세기의 니제르(Niger) 제국에서는 가늘고 굵게 꼬은 구리줄이 신분화폐로 사용되었던 바, 이를 발견한 공은 이븐 바투타(Ibn Batuta. 1958)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가느다란 구리줄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쓰였다. 이 화폐로는 오직 땔감용 나무와 거친 수수만 살 수 있었고, 굵은 구리줄로는 무엇이든, 심지어 지배층들이 쓰는 재화까지 살 수 있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는 소비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기에 유한계급의 높은 생활수준이 자동적으로 보호받았던 셈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후생을 증진하려는 사려 깊은 의도를 함축하고 있는 신분적 장치도 기록에 남아 있다. 16세기 근동 지역의 바스라(Basra)에 가보면, 더 저렴한 종류의 옷감을 구매하는데 쓰였던 '가난한 이들의 엘(ell, 일종의 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엘은 비싼 옷감을 판매할 때 사용하는 보통의 자보다 5분의 1이 더 길었다. 고대적 화폐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신분과 연계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럼으로써 사회조직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연결의 끈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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