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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스털리, 세계의 절반 구하기

딸기21 2017. 1. 1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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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절반 구하기 

윌리엄 이스털리. 황규득 옮김. 미지북스



오래 전에 빌 게이츠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소개를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봤는데, 그 중 한 권이 이스털리가 쓴 이 책이었다. 개발경제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라 해서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번역본이 없었고, 교보문고에서 영어로 된 책을 들어다놨다 반복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얼마 전 교보에 다시 들렀다가 이스털리의 또 다른 책 <전문가의 독재>가 나온 것을 봤다. 결국 휴가 가기 전에 두 권 다 샀다. 


White Men's Burden이 원제인 이 책, <세계의 절반 구하기>는 이미 2011년에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펼치게 됐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기는 했으나 재미로 따지면 별점 2개 수준. 중언부언이 많고 설명도 부실하다. 일화들은 뜬금없고, 온통 비판으로 가득한데 '비판을 위한 비판'을 담은 문장이 너무 많다. 자료가 될만한, 스크랩해놓을 내용은 정작 많지 않다. 한글판 제목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세계의 절반 구하기...??


이스털리식의 글쓰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내용의 대부분은 삭스처럼 '세계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에 할애돼 있다. 요는, 가난한 나라를 총체적으로 구조개혁하겠다고 덤벼들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은 키플링의 '백인의 짐'이나 마찬가지인 제국주의적 간섭으로 치달을 것이며, 빈곤과의 싸움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도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이스털리가 말하는 '서방의 잘난척하는 간섭'에는 구호기구들의 비효율성과 관료주의뿐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 등 워싱턴 금융체제의 구조조정 플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민주화 구상'까지 몽땅 포함된다. 이렇게 방대한 것들을 몽땅 '헛된 구호 작태'로 묶어버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 밑에는 서방의 제국주의 잘난척이 스며들어 있다고 싸잡아 얘기하는데, 물론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래서? 구호기구들의 활동이나 개발원조는 모두 쓸데 없는 오지랖이니 중단하라고? 


구호기구들의 관료주의를 안에서부터 개혁할 필요는 있겠지만, 참 안타까운 것이 "돈 내봤자 구호기구들 관리비용에 다 들어간다"며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다. 이스털리같은 전문가가 느낀 심각한 문제점들이 분명 있겠으나, 이런 비판이 한푼 두푼 돈 내는 시민들에게서는 '그래, 내 돈 괜히 저런 일에 낼 필요 없어' 하는 냉소로 이어지게 되니 말이다.


2. 이스털리가 '나라 뜯어고치기'의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장'이다. 원조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면서 시장 친화적인,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긴 '빈국 사람들 스스로의 계획과 발전'을 옹호한다. "수백조원을 들이고도 아이들한테 모기장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는 원조 따위는 그만둬라, 그런 거 없어도 해리포터 시리즈가 시장에 쫙 깔리는 거 봐라. 시장에서 배워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례로 드는 '시장의 힘을 빌린 개발'의 내용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프라할라드가 말한 '밑바닥의 10억명을 위한 기업활동' 몇 가지를 그대로 인용해놨고, 적정기술의 몇몇 사례들을 꼽았고,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목표를 설정한 뒤 구호활동을 하는 기구들을 몇몇 소개했고, 서방에 유학갔다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사업을 하거나 교육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적어놨다. '소외된 90%를 위한 비즈니스' 류의 책에서 많이 보던 이야기들.


3. 또 하나의 논쟁적인 쟁점은 '나쁜 정부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스털리는 빈국의 못된 정권들에게도 원조를 내준 것이 빈국을 악순환에 빠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옛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세세 세코 정권에 프랑스가 돈 대준 것 따위가 그런 사례다. 그런 것들은 원조라는 외투만 걸친 옛 식민통치국들의 이권 빼가기였으며 독재정권들에 악용됐던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 이스털리는 국제사회의 원조 노력 자체를 비판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정부 차원의 원조와 '시장 친화적인' 노력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원조는 안 돼'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중물을 부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삭스의 주장과 '시장에서 배우자'는 이스털리의 주장이 서로 교차하며 보완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이스털리가 내놓은 결론은 '나쁜 정부들'에는 지원을 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논란의 소지가 크다. 정부가 나쁘면 그 나라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 나라 독재자/정부가 나쁜지 나쁘지 않은지를 판단하고 '징벌'하는 주체도 결국은 서방이 돼 버린다. 서방의 오만함을 실컷 탓하다가, 결론적으로 '나쁜 나라 나쁜 정부에는 돈 주지 말고 응징하라'로 치달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조지 W 부시 정부의 '나쁜 정부 벌주기'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4. 더불어 이스털리는 원조가 독재정권에 끼친 악영향을 폴 콜리어가 말하는 '자원의 덫'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온당한 평가인지도 의문이다. 원조가 독재정권을 도운 사례들은 많지만, 원조를 '독재의 원인' 내지는 '독재의 버팀목'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한마디로 원조는 독재정권에 어느 정도나 책임이 있는 것일까?


한 나라를 통째로 뜯어고치겠다는, 개발과 성장의 길로 이끌겠다는 원대하고도 오만한 목표 따위는 집어치우라는 일갈이 절절하면서도 또한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스털리가 개발경제학을 연구하며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좌절감이 그만큼 컸기에 이런 식의 신랄한 비판이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창의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개발 원조' 자체도 유엔 기구들이나 구호단체들의 수십 년 노력을 통해 다듬어진 것들이다. 그걸 몇 가지 쏙쏙 떼어내 '전체적으로 개판이지만 시장 논리를 받아들인 쪽에서는 잘 하고 있다'며 분리해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