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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딸기21 2017. 9. 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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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The Battle for Spain
안토니 비버 (지은이) | 김원중 (옮긴이) | 교양인 | 2009-05-01



스페인 내전을 다룬 책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밖에 읽은 적이 없었다.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더 정확히 말하면, 스르륵 훑어보기엔 너무나 크고 깊은 이야기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토니 비버의 이 책, <스페인 내전>을 결국 읽고 말았다. 그리 긴 시간이나 넓은 공간을 다룬 것이 아닌데다 꽤 담담하게 내전 중 벌어진 일을 적어내려가고 있음에도, 역시나 무게감이 압도하는 느낌. 


저자의 말마따나, 패배한 이들의 목소리로 해석되는 극히 드문 전쟁이다.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는 내전의 기록이라니. 뒷부분으로 갈수록 읽는 나도 슬퍼지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인민전선은 총투표의 2퍼센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의회)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선거에서 가장 충격적인 현상은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당이 스페인 전역의 총 1천만 명에 육박하는 투표자 가운데 겨우 4만 6천 표, 그러니까 한 주(州) 평균 1천 표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통치 위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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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931년 이후 개인 투자가 가파르게 하락했고 1936년의 투자는 1913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계획안을 발표하자 자본이 순식간에 스페인을 빠져나갔다. 담배 밀수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마요르카 출신의 백만장자 후안 마르치 (Juan March)는 감옥행을 피해 스페인을 떠났다. 그는 외국에 정착한 다음 외환 시장에서 페세타화에 불리한 쪽으로 환투기에 집중했다. 

좌파의 선거 승리가 낳은 경제적 결과는 후안 마르치의 재정적 책략이 안겨준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파업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증가했으며 외환 시장에서는 페세타화의 가치가 급락했다. 아사냐의 중도 좌파정부가 부딪힌 진짜 문제는 강경 좌파인 카바예로파와 맺은 파우스트식 계약의 결과였다. 자유주의 정부는 이제 혁명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선거 동맹 세력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지지자들에게 법을 존중하라고 설득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익 단체들은 각각 의용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의용군이 가장 훈련이 잘 되고 효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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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중에서 격렬한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단체는 팔랑헤당이었다. 팔랑헤당을 설립한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자 젊은 변호사로서 파시스트 지식인 집단을 매혹했으며, 학생들, 그중에서도 세뇨리토(señoritos)라 불리는 부잣집 아들들과 사회 변화로 위기감을 느끼던 중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팔랑헤주의는 매우 보수적이었다는 점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랐다. 무솔리니는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연설할 때 로마의 상징과 제국의 형상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팔랑헤당은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은 반동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스페인다움(Hispanidad)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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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전반기 동안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브라세로(날품팔이 노동자)들이 마드리드, 톨레도, 살라망카주에서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이 집권하는 동안 스페인 전역에서 20만 명 가까운 수의 농민들이 75만 6천 헥타르의 땅에 재정착했고, 그것은 제2공화국 이전의 모든 정부들이 집권하는 동안 이루어진 것보다도 규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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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에서 반란이 성공하면 대개는 먼저 시청과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곳에 군 수비대가 없으면 치안대 대원, 팔랑헤 당원, 사냥총이나 소총으로 무장한 우파 지지자들이 반란군을 구성했다. 반란군이 공식적인 어조로 전시 상태를 선포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어리둥절한 시민들은 그들이 마드리드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은 반란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자신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라고 주지사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주지사들이 무기 지급을 거부하거나 무기 입수가 불가능했다. 신속하게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지만 반란군에게 저항한 노동자들은학살당했고, 주지사에서 말단 노조 간부에 이르기까지 반란의 잠재적 적들은 처형되었다. 

군인들이 병영에서 뛰쳐나오기를 주저하거나 지체한 곳, 게다가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대처한 곳에서는 대개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지체하지 않고 병영을 공격하거나 포위해서 어렵지 않게 반란군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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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네스 바리오는 몰라 징군에게 전화를 걸어 평화를 제의했다가 즉각 거절당했다. 몰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씨. 당신에게는 당신의 국민이 있고, 내게는 내 백성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과 내가 합의에 이른다면 그것은 우리 둘 다 각자의 이념과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반란군 장군이 총리에게 그 자리에 오르게 해준 유권자들의 대표임을 상기시키는 이 장면은 아이러니가아닐 수 없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손 놓고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정부의 태도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정부는 곧바로 붕괴했다. 그의 내각은 불과 몇 시간 동안 존속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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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데 실패한 것은(이때는 돌격과 본능이 무기와 군사학보다 더 중요했다)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 진영이 내세울 만한 군사적 장점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4만명의 아프리카 주둔 군대였다. 세 개의 준군사단체 병력 가운데 약 3만명이 반란에 동조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15만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반란군에 합류해 있었다.

이에 반해 히랄이 군대 해산령을 발표할 무렵 공화 정부는 준군사 조직 병력 약 3만 3천 명과 5만 명의 병사22명의 징군과 7천 명의 장교를 두고 있었으며 이는 이론적으로 모두 9만 명의 병력에 해당했다.

공화 정부는 산업 시설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보유한 대도시, 광산지대, 함선과 상선 대부분, 본토 총면적의 3분의 2, 국가보유 금, 국가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감귤류 생산지 발렌시아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불리한 상황을 외국으로부터 끌어낸 지원과 주요 농업 지대 장악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국민 진영의 주요 병력 공급원은 한동안 모로코의 리프족 원주민들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국민 진영에 육해공군과 전략·기술적 지원을, 미국과 영국의 사업가들은 전쟁에 필수적인 신용대부와 석유를 제공할 터였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 군대의 자칭 ‘예방 차원의 반혁명’ 시도는 공화국에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마저 다 파괴해버렸다. 우파의 반란은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혁명을 좌파의 열정적인 두 팔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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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 양편에서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국민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적색분자들과 무신론자들'을 가차없이 소탕하는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공화 정부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최악의 폭력이 대개 억압되었던 공포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자신들이 당한 원한을 복수하려는 열망으로 악화된 것이었으며, 얼마 안 가 수그근들었다. 

공화 진영의 성직자와 교회 공격은 스페인 교회의 막강한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외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에서 가툴릭교회는 보수 세력의 성채였고, 우파가 스페인 문명으로 정의하는 어떤 것의 토대였다. 외국 신문들이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종교적 탄압과 19세기에 나타난 폭력적 반(反)교권주의 간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거의 지적하지 않은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아나키스트들에게 교회는 국가가 벌이는 심리전의 지부(支部)에 다름 아니었으며 교회는 그들에게 치안대 못지않게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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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살언 양상은 적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것과 상당히 달랐다. 반란 세력의 전략 핵심은 ‘정화(limpieza)’ 개념이었는데, 그 과정은 어떤 한 지역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되었다.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스페인의 정화’라고 기술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은 어떤 특정한 정치 운동을 따로 명시하지 않고 단지 ‘진보적인 사회적 흐름 혹은 민주적·자유주의적 성향을 띤 운동에 동조하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규정했다.

1936년 7월부터 1937년 초 사이에 국민 진영은 전쟁의 깃발 아래서 ‘자의적’ 살인을 허용했다. 그러나 곧 탄압은 군부나 민간인 당국자가 장려하고 가톨릭교회가 축성하는, 계획적이고 위로부터 조직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선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대개 현장에서 살해되었으며, 노동조합 지도자와 공화 정부 관리인 주지사와 시장, 전부터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쳐 온 관리들이 가장 먼저 살해당했다. 심지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항복한 공화주의자들도 죽였다.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친 장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구속되었다. 

군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나면 전보다 더 지독한 두 번째 학살의 물결이 밀어닥쳤는데, 지역에 따라 팔랑헤 당원이나 카를로스파 사람들이 민간인에게 가차 없는 정화를 집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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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유명한 '고통의 장소'가 그라나다였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스페인 내전으로 희생된 가장 유명한 인사로 꼽히는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해된 곳으로 잘 알려 있다. 지식인에 대한 파시스트나 군인들의 태도는 적어도 깊은 불신이었고 대개 증오, 두려움, 경멸이 모호하게 뒤섞인 감정이었다. 로르카의 죽음은 스페인에서 19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금지된 주제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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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가져다준 두드러진 현상으로 195년 선거 이후 자발적 여성 운동이 성장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여성 운동은 학문을 통해서나 혹은 외국에서 들여온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에마 골드만의 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된 것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책도 없었다) 계급 체제의 타도가 곧 가부장적 체제의 종식을 의미할 것이라는 여성들의 본능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주의청년단은 페미니즘 운동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핵심 단체였다.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전선에 배치된 여성은 1천 명이 채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수천 명의 무장 여성들이 활동하였고, 마드리드 방어전에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침여하기도 했다. 동등한 참전을 지향하는 이런 움직임은 전황이 악화하면서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해 간 군 지도부 때문에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1938년이면 여성들은 다시 엄격하게 보조적인 역할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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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933년에 집권한 진보적 공화 정부의 가장 중요한 치적은 교육 분야를 개선하고 문맹률을 낮춘 것이다. 가르시아 로르카가 내놓은 순회극장 같은 상상력 넘치는 많은 프로젝트는 농촌 대중이 스스로 무지의 감옥에서 벗어나도록 도우려는 열정적인 시도였다. 전쟁 기간 동안 생텍쥐페리 같은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글을 모르는 의용군들이 참호 속에서 보여준 배움에 대한 열정이었다 

사람들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뉴스를 경청하면서 사라고사 공격 같은 사건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형식적이고 정중한 인사가 필요 없는, 즉석에서 우정이 형성되는 그런 세계였다. 

외국인들은 바르셀로나에서 환영받았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주었다. 노동자들은 만일 모든 것이 분명해지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프랑코, 히틀러, 무솔리니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나 틀림없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가게 종업원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팁을 주는 외국인에게 이제 그런 행위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를 타락시킨다는 설명과 함께 점잖게 되돌려주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호텔 사용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가일로드(Gaylord) 호텔을 공산당이 징발하여 당 고위 간부들과 러시아에서 온 고문들의 호화판 숙소로 이용했다. 반면에 바르셀로나에서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은 리츠 호텔을 식료품 가게 1호점 , 즉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공중 매점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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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모델은 이미 공화 정부가 지배하는 전 지역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지중해 해안 남쪽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노동자 자치라고 하는 이 특별한 대중운동(아나키즘)은 여전히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적 정부와 공산당은 이 운동을 전쟁 수행 노력을 조직화하려는 자신들의 시도를 방해하는 중대한 장애물로 보았다. 정부와공산당은 지역주의가 강하고, 위협이 아주 가까이 닥치지 않으면 반응하기를 꺼려하는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중앙집권적 통제가 필수적이라고 확신했다. 

정부가 무기 지급을 거부했던 7월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 아나키스트들은 정부가 자신들이 성취한 것을 내놓도록 하기 위해서 취한 방식에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두 태도가 근본적으로 충돌하면서 공화 진영 내 동맹 세력들은 결속이 약해졌다. 이 갈등은 1937년에 중앙집권적 국가를 옹호하는 쪽의 승리로 끝나지만, 공산당이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추태는 인민들의 사기에 큰 상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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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집단 공동체는 토지나 공장의 공동 소유와 공동 운영에 기반을 두었다. 그와 함께 산업(공장)들도 사회화되었는데, 노동자와 소유자가 공동으로 지배하는 개인 회사와 마찬가지로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이 재편하고 운영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카탈루냐에서만 약 10만 명이 이런 협동조합 사업체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협동조합 운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은 카탈루냐와 아라곤이었으며, 이곳에서는 노동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가입했다. 

일부 외국 기자들은 이런 현상을 단순히 낭만적인 중세 시대 농촌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현대화는 이제 그 효과를 노동자들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밭에서도 공장에서도 기술 개선과 합리화를 예전이라면 격렬한 파업을 불러일으켰을 법한 방법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위원회에서는 가끔 장시간 토론과 언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가 분명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일을 진행했다. 상수도, 가스, 전기 같은 공공서비스 분야는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습격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새로운 경영진의 수중에 들어갔다. 사라고사 회의에서 합의한 원칙에 따라 관련 공장을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하여 7월 22일이면 금속 회사에서 장갑차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장갑차는 비록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조잡하게 즉석에서 제작한 엉터리는 아니었다. 카탈루냐의 산업 노동자들은 스페인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산업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에 공화 진영 남쪽에서는 농업 집단 공동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농업 집단 공동체는 대부분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이 조직했는데, 집단화가 그리 비옥하지 않은 라티푼디움을 경작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또 많은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봉토로 여겼던 이 지역의 지배권을 아나키스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 노선을 수용한 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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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주재 영국 대사는 프랑스 정부에게 공화 정부를 돕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든은 다른 나라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기 봉쇄안 선언을 결정했다. 이것은 사실상 합법적으로 들어선 공화 정부에는 무기 제공을 금하고, 반란 세력에게 무기가 들어가는 것은 모른 체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합의를 어기고 스페인 전쟁에 간섭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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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바이로이트에서 〈지크프리트〉를 관람하다가 프랑코의 친서를 전달받았다. 그 만남은 다음날 새벽 1시 반까지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괴링, 폰 블롬베르크 장군을 불러 프랑코의 요청을 신속히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공군부에 설치된 특별 기구가 융커52기(프랑코가 요청한 숫자보다 두 배나 많았다), 6대의 하인켈51 전폭기, 20문의 대공포, 그밖의 다른 전쟁 물자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스페인 장군 가운데 가장 경쟁력 있고 냉혹한 인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독일 군수물자의 수령자가 오직 프랑코 군대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또한 공군부에 설치된 특별 기구는 ‘자원할’ 조종사를 선발했다. 괴링은 ‘이런저런 기술적 측면에서 신설된 자신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힘을 시험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독일은 스페인 전쟁 참여라는 사업 전체에 대해 이탈리아보다 훨씬 실제적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최고의 장비와 인원을 보냈고, 비록 이데올로기적 동맹이기는 했지만 프랑코에게 지원 대가를 동광과 철광으로 지불해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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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이제 전쟁에서 총알만큼이나 필수적인 물자였다. 미국은 전쟁 기간 동안 프랑코에게 350만 톤의 석유를 외상으로 수출했는데, 이는 공화 정부가 수입한 석유량의 두 배가 훌쩍 넘는 양이었다. 텍사스정유회사(텍사코) 회장은 열렬한 파시즘 찬양자였다. 그는 반란 소식을 접하자마자 스페인 본토로 향하던 다섯 척의 유조선을 국민 진영이 장악한 테네리페 섬으로 가게 했는데, 이 섬에는 대규모 정유소가 있었다. 텍사코는 스페인 정부의 가장 중요한 석유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공화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뉴저지의 스탠더드 정유회사 역시 규모는 작지만 또 다른 주요 공급자였다. 

후에 포드, 스투드베이커, 제너럴모터스가 1만 2천 대의 군용 트럭을 국민군에 제공했는데, 이는 추축국들이 제공한 것의 세 배 가까운 규모였다. 화학공업계의 거인 듀퐁은 4만 발의 폭탄을 국민군에 제공했는데, 중립조약의 규정 위반을 피해 독일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에 스페인 외무부 차관 호세 마리아 도우시나게는 "만약 미국의 석유와 미국의 트럭, 미국의 신용대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들과 국제 기업가 집단으로부터 외면받은 공화 정부는 오로지 멕시코와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비록 소련의 정책이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이 없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음모’를 주장해 온 국민 진영의 경고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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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전 기간 동안에도 공화 정부는 프랑코 장군의 가장 중요한 동맹 세력인 나치 독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 공화 정부에 은밀하게 무기를 판매하려다 발각된 이 사건의 주역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그는 이 밀무역을 위해 몇몇 중개인을 이용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유명한 무기 밀매상 요체프 벨첸스(Josef Veltjens)였다. 벨첸스는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몰라 장군에게도 무기를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프로도르모스 보도사키스 아타나시아데스였는데, 그는 그리스의 독재자 메타크사스와 교분이 깊은, 말하자면 그리스인 해적 두목이었다. 

1937년과 1938년, 스페인 공화 정부에 대한 독일의 무기 판매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보도사키스의 회사는 라인메탈 보르지히로부터 4천 만 제국마르크 어치의 무기를 주문했다. 이것은 공화군이 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부기의 거의 전부였다 

괴링에게는 공화 정부의 경화나 국민 진영의 경화나 다를 것이 없었다. 베를린 북쪽에 있는 괴링의 호화 별장인 카린할을 장식한 물건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스페인내전에서 취한 엄청난 수입으로 값을 치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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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여름 정부는 전비 마련을 위해 보물과 귀금속을 인민들로부터 징발하고,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공화 정부는 은, 보물, 그외 다른 재산을 매각해 3100만 달러의 수입을 확보했다. 그러나 당시 공화 정부는 소련 무기 수입으로 지출하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한 달 지출액이 27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유일한 희망은 다시 한번 소련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공화 정부는 여러 차례 소련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외면했다. 1938년 봄 상황이 극도로 어려워졌을 때도 소련은 공화 정부의 호소를 끝내 모른 체했다. 비록 소규모의 무기 선적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미 유럽과 극동의 상황 때문에 스페인에 대해서는 점차 관심을 접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 정부의 패전은 거의 분명해 보였고, 스탈린에게는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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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는 이미 많은 외국인 자원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열릴 예정이던 인민올림픽에 참석하러 와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자원하여 국제여단의 첫 번째 핵심 부대인 켄투리아 텔만의 부대원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당시 카탈루냐에서 카탈루냐 공산당에 속해 있었다. 이 부대의 우두머리는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독일 의회 의원이었던 한스 바임러였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바임러는 다하우에 수용되었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1936년 8월 5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내전 기간을 통틀어 53개국에서 온 3만 2천에서 3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국제여단 병사로 복무했다. 그 밖에도 5천여 명의 외국인이 외곽에서 봉사했는데, 주로 전국노동연합이나 통합노동자당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자원병들의 가장 중요한 모병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여기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이 자원병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이 요시프 브로즈(Josip Broz. 티토)였다. 동유럽인들이 스페인으로 들어가려면 세심한 조직이 필요했다. 자기 나라 군사 정권에 쫓겨나 망명 중이던 폴란드인들이 처음으로 파리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어 호르티 제독의 독재를 피해 도망쳐 나온 헝가리인들과 철위대를 피해 도망쳐 나온 루마니아인들이 합류했다. 왕당파 경찰을 피해 도망쳐 나온 유고슬라비아인들도 티토의 '비밀 철도'를 따라 파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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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프롤레타리아들은 결코 상층계급 사람들을 존경하거나 모방하지 않았다. 18세기 외국인 여행가들도 스페인에서 하인이나 노동자들이 귀족들을 대하는 당당한 태도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또한 안달루시아 농민들이 공유지 점유에 압살되거나 혹은 종교에 구속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스페인의 노동계급이 낭만적으로 묘사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것은 영국 노동계급에게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앵글로색슨 지식인들에게 자기 나라의 질식할 듯한 자기 만족과 비교해볼 때 순수하고 구속되지 않은 폭넓은 감정의 생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국제여단 병사들 대부분의 참여 동기가 이타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파시즘을 국제적 위협으로 보았고 국제여단은 거기에 맞서 싸우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페인을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장으로 생각했다.

비밀조직망이 동유럽, 중유럽, 남동부 유럽에서 그들을 파리로 안내했다. 북쪽으로는 영국의 노동자들이 여권도 없이 여행 티켓만 소지한 채 해협을 건너 입국했다. 그들이 파리 북역에 도착하면 좌파 쪽 택시 운전사들이 그들을 태워 제9구(區)에 있는 막사로 안내했다. 거의 매일 갈색 서류 꾸러미를 옆에 낀 채 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오스테를리츠 역에서 페르피냥 행 기차를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사히 기차에 오르면 그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바로 그 사람들과 곧 형제처럼 친한 사이가 되었다. 포도주를 돌리고, 음식을 나누고, 큰 소리로 〈인터내셔널가〉를 끝도 없이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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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는 농민들이 일을 하다 허리를 펴고 젊은 외국인들이 기차안이나 트럭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10월 12일 증기선 '시우다드 데 바르셀로나'호가 이틀 전 마르세유를 출발한 500명 규모의 자원병 부대 제1진을 태우고 얄리칸테에 입항했다. 이어 그들은 기차를 타고 국제여단 기지로 정해진 알바세테로 갔다. 리베르타드 대로(大路)에 자리 잡은 국제여단 병영은 반란 전에는 치안대 막사가 있던 곳이었다. 몇몇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깨끗하게 청소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정나미가 뚝 떨어질 정도로 형편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독일인 공산주의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우리는 규율을 찬양한다’라고 쓴 큼지막한 표어를 붙여놓았다. 반면에 프랑스인 병사들이 묵는 숙소에는 성병을 조심하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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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국민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자 프랑코는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신속한 승리가 전보다 훨씬 어렵게 된 상황에서 실속 없는 공격으로 최정예 부대를 더는 희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도시에 대포 공격과 비행기들의 공중 폭격이라는 양면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당시 유행의 중심이었던 살라망카 구역을 제외한 마드리드 시내 모든 거주 구역을 폭격했다. 이탈리아 비행 군단과 독일 공군은 사보이 B171와 융커 52기들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심리전을 펼쳤다. 그러나 무차별 폭격을 당한 마드리드 시민들은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저항 의지를 더욱 굳혔다. 

노동자총동맹은 놀랄 만큼 효과적인 작전을 통해 마드리드의 가장 중요한 산업 시설물을 당시 사용하지 않던 지하철 터널 안으로 이송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미술관 총감독이었던 예술가 호세프 레나우(Josep Renau)는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들을 발렌시아로 소개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국민군은 공중 폭격으로 빈민가의 허름한 건물로부터 알바 공작의 리리아 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건물을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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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켈51 전투기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병원에서 나온 수녀들과 가축들까지 쫓아가면서 기총 소사를 하고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서 20분 간격으로 게르니카 시에 매우 체계적으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융단 폭격은 바로 얼마 전에 오비에도 근처에 있는 공화군 진지를 공격할 당시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용어였다). 목격자들은 폭격 때문에 도시에 펼쳐진 참상을 '지옥' 혹은 '세상 종말' 같은 말로 묘사했다. 가족 전체가 자기 집 흙더미에 파묻혔는가 하면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그대로 깔려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소나 양들이 불에 타 하얀 인광을 내뿜으며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 사이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쓰러져 죽었다. 검게 그을은 사람들이 화염과 연기, 먼지 사이를 넋이 나간채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기족이나 친구를 찾으려고 돌무더기를 미친 듯이 맨손으로 파헤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스크 정부에 따르면 게르니카 시민의 약 3분의 1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 

그 이튿날인 4월 27일 게르니카가 파괴되었다는 기사가 영국 신문들에 실렸다. 다음날 아침 〈타임스〉와 〈뉴욕타임스〉는 조지 스티어(George Steer)의 사절을 실었는데 이 글은 그 후 국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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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파괴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새로운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스페인에서 나치가 벌인 군사적 행동 이면에 숨은 동기였다. 양측에제공된 비행기, 전차, 혹은 군사 고문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의 수준과 군수 물자의 질이다. 

스페인 내전은 나치 정부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인정했듯이, 새 무기와 새 전술의 완벽한 시험 무대가 되었다. 붉은군대 역시 스페인 전쟁을 시험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러나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처형 이후 스탈린이 견지한 군사적 전통주의 때문에 그 기회를 잘 활용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독일 공군의 콘도르 군단은 새 무기 체계를 시험하고 그 효과를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 예를 들어, 콘도르 군단 비행기들은 아군의 대포 공격이 끝나자마자 공화군 병사들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도록 곧장 적군 참호에 기총 사격을 가하는 것, 동시에 국민군 보병으로 하여금 마지막 수백 미터를 돌격하께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콘도르 군단이 스페인에서 시험한 가장 중요한 심리적 무기는 융커87, 즉 슈투카기였던 것 같다. 1938년 봄 아라곤 경계선 쪽으로 진격하면서 콘도르 군단은 알보카세르, 아레스델마에스트레, 베나살, 비야르데카네스 등 크고 작은 여러 도시에 폭탄을 투하하고, 폭탄의 종류와 파괴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그 장면을 공중과 지상 모두에서 꼼꼼하게 촬영했다. 독일군은 500킬로그램짜리 폭탄 9개를 투하한 베나살에서 한 대형 교회 건물이 완전히 초토화되는 사진을 수십 장 찍어 두었다. 이 작업 대부분을 한 사람이 아우크스부르크의 전통적 은행가 가문 출신인 푸거(Fugger) 백작 소령이었다.

독일군은 전차는 더 중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전격전 돌파를 위해서는 기갑사단 병력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스페인 전투를 치르면서 알게 되었다. 독일군이전차부대의 규모와 화력을 증강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도 스페인에서였다. 진격하는 지상군과 그들을 지원하는 공군이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 또한 하라마 전투가 벌어질 즈음이면 양측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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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전쟁의 전선은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에서 신속하게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뉴스 크로니클〉과 〈맨체스터 가디언〉은 공화 정부를 지지했고, <타임스〉와 〈텔레그래프〉는 대체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국민 진영을 지지했다. 

신문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쪽에 기자를 파견하는 관행은 관례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이미 비밀 공산당원이었던 킴 필비는 국민 진영 쪽에 파견된 〈타임스〉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보수적 이미지를 쌓았다. 이 점에서 전쟁 초기 예외적인 경우로 비밀 공산당원이었던 작가 아서 케스틀러를 들 수 있다. 그는 좌파 성향의 〈뉴스 크로니클〉 소속이면서도 세비야의 국민 진영 쪽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케스틀러가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슈트린트베르크라는 독일 기자에게 발각되자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국민 진영 언론 담당이었던 루이스 볼린이 케스틀러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려 했지만그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케스틀러는 공화 진영으로 돌아왔다. 후에 말라가가 함락될 때 볼린은 마침내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언론이 국민 진영에 압력을 넣은 덕분에 케스틀러는 가까스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신문 기자들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정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마드리드 공세를 경험하고 나서 단호한, 가끔은 무조건적인 공화 정부 지지자가 되었다. 요컨대, 객관성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운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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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들이 수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셀로나 시와 교외 지역의 90퍼센트를 점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몬주익 언덕의 중포도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 압도적인 우위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싸우면 완전히 내전 속의 내전이 될 것이라는 것, 그렇게 되면 비록 국민군이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들이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탈루냐 공산당과 돌격대는 자신들의 진지를 고수한 채 절대자유주의자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자행했다. 패배한 쪽은 절대자유주의 운동과 콤파니스였으며,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라르고 카바예로를 권좌에서 몰아내는데 필요한 지렛대를 손에 넣었다. 공산주의 계열 신문들은 아나키스트들의 행동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역 행위와 같다는 당의 공식 노선을 그대로 표출하는 도덕적 폭력을 마구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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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란거리가 되었던 문제는 외세의 개입이 전쟁에서 결정적 요소였는가 하는 점이다. 히틀러가 융커52 수송기를 프랑코에게 보내어 모로코 레굴라르들과 외인군단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본토로 이동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분명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전 초기 수 주에 걸쳐 혁명적인 혼란을 겪는 와중에 공화군 해군이 보여준 무기력과 창의성 부재는 (히틀러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결국에는 아프리카 군대가 해협을 건널 수 있었으리라는 예상에 힘을 실어준다.

프랑코와 그와 행동을 같이한 동료 장군들이 뒤로 물러서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앞으로 나아간 상태였고, 그들이 탄약을 넉넉히 가지고 있는 한 아프리카파라고 하는 핵심 부대가 본토에 도착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가 국민군이 승리하는 쪽으로 전쟁 기간을 크게 단축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코가 순전히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 덕분에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 것이다.

콘도르 군단이 보여준 진정으로 파괴적인 효과는 1937년과 1938년에 공화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그것을 저지한 데 있었다. 그러나 콘도르 군단이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완벽한 환경을 제공한 것은 공산주의자 군 지휘관들과 소련 군사 고문들의 형편없는 지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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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3년 동안 고달픈 전쟁터에서 지칠 대로 지친 장군들은 이제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에서 안정된 역할을 수행하는 데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참담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농업과 산업 생산은 1935년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차량의 약 60퍼센트, 상선의 4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약 25만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건물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새 국가는 외환이 거의 바닥났고, 국가 보유 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화폐 체계는 대흔란에 삐졌다. 국민 진영 동맹국들(독일과 이탈리아 등)에게 진 전쟁 부채도 갚아야 했다. 

새 정부가 추진한 첫 번째 우선 사업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1936년의 혁명 기간 동안에 몰수된 토지뿐만 아니라 공화 정부에서 추진했던 토지 개혁의 영향을 받은 토지도 포함되었다. 임금이 동결되어 농촌에서는 공화 정부 때 농촌 노동자들이 받은 것보다 약 절반으로 줄었는데 1956년에 가서야 1931년의 임금 수준을 회복했다. 국가는 농산물 판매를 통제했고, 가격도 동결했다. 당연히 암시장이 번성하였다.

일종의 자급 경제 체제(autarchy)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에서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는데, 유럽 수준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경제의 우선순위를 군수품 생산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산업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병영식 통제경제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파업이 불법화되어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노동 현장의 활동가들은 사라졌고, 임금은 고정되고 노동시간은 늘어났다. 그러나 공장주들도 원료 구매나 완제품 판매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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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는 이 자급 경제 체제를 필요에 부응하는 것일 뿐 아니라 특별히 스페인다운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와 장관들은 이 체제의 비용효율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1950년에 가서야 깨달았다. 

독일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프랑코 정부는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국가 수입 총액의 12퍼센트 정도를 지출해야 했고 이탈리아에도 3퍼센트를 지출했다. 

1939년 10월 7일 프랑코는 대규모 댐 건설과, 공화군 전쟁 포로들을 댐 건설 노동력으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조달과 그외 국민 진영 경제의 여러가지 면들은 프랑코 정부와 스페인의 주요 다섯 은행들 간에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만들어냈다. 주요 은행들은 정권에 협력한 대가로 경쟁으로부터 보호받아 스페인에서는 1962년까지 새로운 은행들이 생겨나지 않았고, 경제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진정한 의미의 상업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 역사가가 썼듯이, "새 스페인의 건축적 상징물은 전쟁 전에 카를로스파가 상징물로 언급했던 교회가 아니라 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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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진영 스페인에서는 국가를 구하려면 근본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나라 전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임시수용소를 포함해서 190여 개의 수용소가 들어섰고, 36만7천에서 50만 명가량의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1939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특히 임시수용소들을 중심으로 포로 숫자가 줄었다. 일부 포로들은 가석방되었고, 9만 명가량은 121개의 노무 대대로 이송되었으며, 8천 명은 군대 내 작업장으로 보내졌다. 처형, 자살, 도망 등도 포로 수 감소에 일조했다. 

일부 포로는 벨치테 시를 재건하는 데 보내졌다. 군사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은 재건 작업을 위해 군 징벌대에, 혹은 아스투리아스, 레온, 바스크 지역 석탄 광산으로 보내졌다. 일부는 수은을 캐야 했으며, 수천 명의 포로들은 운하를 파거나 프랑코가 생각해낸 다른 프로젝트에 동원되었다. 이 강제 노동 가운데 많은 것들이 비용 효율이 매우 낮았다. 그러나 후에 이 프로젝트들이 여러 회사에 다시 맡겨졌을 때 회사들은 군 당국보다는 훨씬 효과적으로 무임금 노동자들을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포로들은 지주들에게 임대되기도 했는데 지주들은 전에는 불가능했던 관개 사업이나 다른 사업을 벌여서 재산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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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페인의 여러 주 가운데 약 반 정도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공식적 처형만 적어도 3만5천 명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비공식적이고 무작위적인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 수는 아마도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공화 진영이 승리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또 포로수용소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을까? 아마도 모든 것은 승리한 뒤에 등장한 공화 정부의 성격에 달렸을 것이다. 만약 공산주의 체제였다면 다른 공산주의 독재 정부들의 행태로 미루어 판단컨대 공산주의의 편집증적 성격 때문에 사망자 수는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경우 스탈린식 공산주의로 되었을 것인가, 아니면 네그린이 꿈꾸었던 것으로 보이는 스페인식 요소가 많이 가미된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인가에 따라 많이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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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디요(프랑코)는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 선고 명단을 읽어내려가곤 했으며, 가끔은 그 자리에 개인 사제인 호세 마리아 불라르트를 동석시키기도 했다. 그는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름 앞에는 E를, 감형 대상자 이름 앞에는 를 써놓곤 했다. 처형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름 앞에는 '교수형과 언론(garrote y prensa, 이는 교수형에 처하고 나서 언론을 동원해 알리라는 뜻이었다)'이라는 단어를 써넣었다. 그가 커피를 마시고 나면 보좌관이 그 명단을 각 주, 각 지역 군사령관들에게 보내고, 사령관들은 전보로 교도소장에게 보냈다.

처형 대상자 명단은 교도소 가운데 복도에서 낭독되었다. 어떤 관리들은 명단 발표를 즐기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먼저 대상자의 이름만 부르고 잠깐 동안 뜸을 들이는데, 이때 만약 이름이 '호세'나 '후안'같이 매우 평범한 이름이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하얗게 질려 초주검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낄낄거리다가 나중에야 성을 부르는 식이었다. 아모레비에타의 여성 전용 감옥에서는 간수로 일한 수녀 가운데 한 명이 이 임무를수행했다.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는 팔렌시아 감옥에서는 폐렴을, 오카냐 감옥에서는 기관지염을, 알리칸테 감옥에서는 발진티푸스와 결핵을 앓다가 결국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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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즘의 오염이라는 개념은 엉터리 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Antonio Vallejo Nágera) 소령은 1938년 여름 '마르크스주의 탐닉 정신병'을 연구하기 위해 국민 진영에 14개의 클리닉을 둔 심리학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결론은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 적당한 기관에 맡겨 국민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3년에 1만2043명의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 팔랑헤 사회구호소(Falangist Auxilio Social), 고아원, 종교 시설에 인계했다. 일부 아이들은 선택된 가정에 양자로 넘겨졌는데, 이 방식은 30년 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체제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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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운이 나빴던 스페인 난민들은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토트(Todt) 조직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는 72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줄무늬 죄수복 위에 팔랑헤 당의 색깔인 푸른색 삼각형을 달아야 했다. 그들은 '적색분자들'이었음에도 그랬다. 다카우, 부헨발트, 베르겐 벨젠, 작센하우젠-오라니엔부르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많은 공화군 출신 스페인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소련에서는 약 700명의 공화 진영 스페인 사랍들이 붉은군대에 들어가 싸웠고, 비슷한 수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다. 놀라운 것은 스탈린이 외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회의적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19명의 스페인 남성과 6명의 여성이 모스크바에서 크렘린을 방어하는 핵심 근위 부대인 OMSBON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7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낙하산을 타고 독일 후방에 침투하여 파르티잔 부대와 합류하여 싸웠는데, 그들 중에는 호세 푸시마냐(José Fusimaña)가 이끄는 카탈루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어에 우호적인 많은 공화군 병사들이 마치 자신들이 소련 시민이나 되는 것처럼 전선 붉은군대(frontline Red Army)에 입대해 복무했다. 라 파시오나리아의 아들 루벤 루이스 이바루리는 소련의 영웅이 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라 파시오나리아의 다른 두 아들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다른 많은 공화 진영 난민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부대나 프랑스 국내 항독군(FFI)에 들어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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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부가 집권했더라도 전후 몇 년 동안 스페인은 절망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나타난 모든 것은 그때 어떤 형태의 체제가 등장했는가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완전하게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섰더라면 1948년 미국으로부터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았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경제를 통해 분명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950년경에 경제 회복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권위주의적인 좌파, 즉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더라면 스페인은 중부 유럽이나 발칸 반도의 인민공화국들과 비슷한 나라로 1989년 이후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무엇보다 인간적 측면에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 즉 신념의 충돌, 잔인성, 관용과 이기심, 외교관들과 장관들의 위선, 이상의 배신과 정치적 책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진영에서 싸운 사람들의 불굴의 용기와 자기 희생 등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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