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앤더슨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얼른 집어왔는데 2009년에 출간된 것이고, 저자가 1990년대 후반부터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쓴 글 몇 편도 간간이 보완하듯 실려 있기는 하지만 국내 출간된 2018년에서 길게는 20년 시차가 있는 셈이다. 원제는 The New Old World인데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안효상 옮김. 길)라는 알맹이 없는 타이틀을 멋대로 달아놓으니 한국어판 제목이 영 입에 붙지를 않고 매번 기억에서 지워진다.
대학 시절 이후로 페리 앤더슨의 책을 본 적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타리크 알리와 함께 유럽 68세대의 대표 격인 지식인이니,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 대학 시절 받았던 느낌은 담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아주 신랄해서 내 기억 속의 앤더슨의 문장이 맞나 싶을 정도. 유럽연합의 탄생과 발전을 앞부분에서 다뤘고, 뒷부분에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키프로스-터키에 대한 글들을 묶었다.
유럽연합을 보는 시각에서는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고. 잘 몰랐던 5개국의 사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랑스는 문화 분야를 주로 썼기 때문에 읽을 때에 재미는 있었지만 적어둘 것은 별로 없다. 독일도 뭐 그저 그랬고. 이탈리아 정치 얘기, 그람시라는 스타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터라 지금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했던 것은 잘 알지 못했던 키프로스 쪽이었다.
번역이 엉망이고 무성의해서 읽으면서 많이 욕함. 길에서 나오는 프런티어21은 뉴레프트리뷰 필진들의 책을 주로 번역해 출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ㅋ
터키는 한국전쟁 때 파병한 ‘형제의 나라’.
이 책으로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야만적이지만 똑똑하지는 못한 멘데레스는 터키를 한국전쟁으로 몰고 감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10년 후 이 전쟁이 지키려 했던 이승만을 무너뜨린 한국의 학생들에 자극을 받은 앙카라의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재 체제로 가려는 그를 막았다. 매일 밤 폭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군부가 개입했다. 이른 아침 멘데레스를 비롯한 각료와 보좌관 등이 체포되었고 약 마흔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정부를 장악했다.” (584쪽)
역시 형제의 나라....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의 공군기지는 CIA의 심문 센터이자 관타나모로 포로를 실어나르는 적재 구획이 되었다. 수송은 두 방향으로 이뤄졌는데 그 중심축은 유럽이었다. 한쪽 방향으로는 포로들은 아프간이나 파키스탄의 지하감옥에서 유럽으로 보내졌으며, 그곳 CIA 비밀감옥에 수용되거나 쿠바로 다시 수송됐다. 다른 방향으로는 유럽 내의 비밀 장소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을 필요한 조치를 위해 아프간으로 보냈다. 유럽은 열심히 미국을 지원했다. 북유럽, 남유럽, 동유럽, 서유럽 등 유럽 대륙 모든 지역이 여기에 가담했다.
좀 더 놀라운 것은 중립국들의 역할이다. 어헌의 아일랜드는 샤논(누구냐 넌)을 CIA에 넘겨줬는데, 서쪽으로 향하는 비행편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이를 관타나모 특급이라고 불렀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스웨덴은-당시 보스는 비만한 예란 페르손이었다- 피난처를 찾고 있던 이집트인 두 명을 CIA에 넘겨주었다. 이들은 곧바로 카이로의 고문기술자들에게 보내졌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는 대규모 CIA 팀이 밀라노에서 또 다른 이집트인을 납치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 이집트인은 아비아노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서 비행기에 실려 독일의 람슈타인을 경유해서 마찬가지로 고문을 가하기 위해 카이로로 보내졌다. 스위스는 희생자를 람슈타인으로 수송하는 비행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했으며, 이탈리아 사법 당국이 체포하려 한 CIA 부서장을보호했다.
동쪽의 폴란드는 자국에서 포로들을 다루기 위해 CIA가 스타레키에즈쿠티 기지지하에 ‘가치 있는 구금자’를 위해 건설한 고문실에 감금했다. 유럽 내에 있는 바그람인 셈인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의 계엄령 시절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시설이다. 루마니아의 경우 콘스탄차 북쪽에 있는 군 기지가 같은 역할을 했다. 보스니아에서는 알제리인 여섯 명이 불법적으로 잡혀 있다가 투슬라에서 비행기에 실려 터키의 인치를리크에 있는 미군 기지로 보내졌다가 관타나모로 수송됐다.
실제로 어떤 유럽의 정부도 유죄를 고백하지 않았으며, 태연하게도 인권에 대해 여전히 장황하게 떠들고 있다. 이 인도 행위는 언급조차 할 수 없게 터부시돼 있다. (114-116쪽)
1950년 정교회는 키프로스 섬 전역의 교회에서 독자적인 국민투표를 조직했고, 아켈(키프로스 공산당)도 합류했다.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96%, 즉 주민의 80%가 그리스와의 통합에 찬성했다. 영국은 이런 민주적 의지의 표현을 무시했다. 5개월 후 미카엘 무스코스가 37세의 나이로 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돼 대주교 마카리오스3세가 되었다. 염소지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키프로스의 신학교를 거쳐 아테네에서 대학을 다녔고, 보스턴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이후 4년 넘게 마카리오스는 이를(뭔지는 알 수 없다. 번역이 하도 애매모호 뭉뚱그린 것 투성이여서) 조직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농민협회, 우익 노동조합, 대중적인 청년조직이 만들어져 교회의 보호 아래 민족 투쟁을 위한 강력한 대중 기반을 조직했다. 교회의 전통과 달리(?) 이 지역 아랍 나라들도 지지를 보냈다.
영국에 키프로스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지중해의 요새였다. 수에즈 운하 지역에 있는 요새들이 안전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면서 이곳의 전략적 가치가 올라갔고 1953년에 중동 지역 최고사령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 (483쪽)
1954년 마카리오스는 비밀리에 그리스군 퇴역 대령인 게오르게 그리바스를 만나 키프로스를 해방하기 위한 게릴라 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리바스는 그리스 우파 기준으로도 극단적인 반혁명파의 불한당이었다. 1955년 4월 1일, 그리바스는 이 섬에서 첫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 4년 넘게 그의 ‘키프로스 투사 민족 조직 EOKA(음...)은 치명적인 수준의 게릴라 전쟁을 벌였고, 그리바스는 200명 밖에 안 되는 군대를 가지고 2만8000명의 영국군을 제압했다. 주민들이 민족적 대의를 폭넓게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의 맹렬한 반공주의 때문에 무장투쟁에서 아켈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EOKA는 아켈 투사들을 거듭해서 쏘아죽였다. 지하로 숨어들어간 아켈은 반식민 투쟁에서 주변부로 밀려났고 마카리오스는 아켈을 무시했다. 따라서 보통은 민족해방 운동의 중심적인 부분이었어야 할 키프로스 좌파는 사실상 소거되었다. 아켈이 배제되면서 민족공동체를 넘어서는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졌다. (484-485쪽)
처음부터 식민지배는 다수인 그리스계에 대해 소수인 터키계를 온건한 대항세력으로 이용했다. 처음에 앙카라는 터키가 키프로스의 장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영국의 교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키프로스에 대해 터키인들이 큰 자극을 받도록 강요해야 했던 것은 영국이었다.
1955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세 열강의 회담에서 키프로스 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터키 비밀경찰은 살로니카에 있는 케말의 생가에 폭탄을 설치했다. 이 ‘그리스인의 음모’를 신호로 폭도가 이스탄불 거리에서 그리스인 가게들을 약탈하고 정교회의 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그리스인이 사는 주택가를 공격했다. (487-488쪽)
키프로스의 보안조직 전체가 대규모 군사공격 이외의 경우에는 터키계의 예비 병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커다란 간극이 두 공동체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제 키프로스에 있는 소수계인 터키인들(국적이 터키는 아니었을 테니 소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로 썼어야 할 듯)에 대해 원격 통제를 하게 된 앙카라가 이 섬에 독자적인 군사조직을 세우는 방식으로 EOKA에 맞대응하게 되자 이 간극은 더욱 넓어졌다. 이 군사조직은 TMT(터키 저항조직)였고, 곧 자기쪽의 좌파를 살해했다. (489쪽)
1960년대 초 영국에 노동당 정권이 다시 들어서면서 키프로스의 영국 기지와 감청시설은 매우 실질적인 이유로(??) 미국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워싱턴이 터키에 주피터 미사일을 배치하고 모스크바가 여기에 맞서 쿠바 미사일 위기를 낳으면서 키프로스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워싱턴을 방문한 마카리오스는 존 F 케네디에게 아켈의 인기를 견제할 자신의 정당을 오른쪽에 만들어야 하며, 소련과의 불필요한 인습적인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대주교가 자신의 양떼를 분열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한 후,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존슨이 터키의 침공을 막았지만 마카리오스는 이것이 키프로스에 관용을 베푼 것 때문이었다는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워싱턴의 관심은 여전히 그리스에 가해질 정치적 충격이었으며, 나토 내의 두 동맹국이 적대감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카리오스는 미국인들의 눈에 ‘성직자복을 입은 카스트로’ 이상이 아니었다. (497-498쪽)
1967년 4월 군부가 파판드레우를 계승한 약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리스에 본격적인 우익 독재를 실시했다. 여기에 고무된 그리바스는 두 개의 터키계 마을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터키는 군대를 동원해 키프로스를 침공했다. 여기에는 이제 1만 명의 그리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나토의 두 동맹국 사이의 전쟁이 임박해지자 미국은 그리스 군부에게 물러나라고,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동의하라고 설득했다. 그리스 군대, 그리고 그리바스가 물러가자 마카리오스는 자신의 권위를 다시 주장했다. 압도적인 다수 표로 대통령에 재선된 그는 터키계 지역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고 두 공동체 사이의 대화를 시작했다.
군부가 지배하는 그리스에 키프로스를 병합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합은 암묵적으로 포기되었고 키프로스인과 제3세계 및 제2세계 나라들과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개심이 강화되었다. 터키계 공동체는 방어적인 지역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앙카라의 통제를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제 아테네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이들은 마카리오스에 대해 통합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그리스 군부에게 마카리오스는 헬레니즘에 대한 배신자일 뿐만 아니라 위장한 공산주의자였다. 터키는 언제나 그를 싸늘한 적대감으로 대했다. 그리스 군부가 권력을 잡자, 치명적인 위협이 된 것은 그리스였다. (499-500쪽)
(마카리오스는 1974년 그리스 군부의 공작 속에 쫓겨나 영국을 거쳐 몰타로 갔고, 터키군의 침공으로 키프로스는 남북이 갈렸다)
(인구 분포에 비해 터키계에 지나친 권한을 주고 터키의 조종을 사실상 인정하자는 유엔 중재안을 거부하고) 키프로스는 2004년 5월 1일에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물리적 분할이 줄어들었는데, 2003년에 뎅크타시가 검문소를 설치해서 그린라인을 넘어서는 남북 왕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즉각적인 효과는 그리스계가 예전에 살던 집을 둘러보기 위해 북부를 많이 방문한 것이고, 남쪽으로는 터키계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이제 건설업 노동력의 10분의1을 차지하게 되었다. (522쪽)
아켈은 키프로스에서 언제나 가장 강한 정당이었고 오랫동안 유일하게 실제적인 정당이었지만 범헬레니즘과 냉전 속에서 국가를 이끌겠다는 열망이 없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 내에 뿌리가 튼튼하고 소비에트 블록의 붕괴 이후 신중하게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아켈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패주에서 교훈을 끌어냈다- 시대의 역풍을 잘 극복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2008년 2월 대선에서 크리스토피아스는 유럽연합 내에서 최초로 공산주의자로서 국가수반이 되었다. (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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