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성했던 최초의 협력체는 인간공학자, 사회학자, 법학자, 그리고 여섯 곳의 노동조합 대표로 구성됐다. 우리는 그 협력체를 '보이지 않는 상처'라고 불렀다. 여성이 일터에서 겪게 되는 직업보건상의 위험성이 남성이 일터에서 겪는 것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더 모호하게 파악된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붙인 별칭이었다.
나는 사업주와 과학자, 행정가들이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여러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과학 기득권층의 제약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고통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직업보건 연구의 학문 영역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 지켜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양질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던 토대는 세계의 정치적 좌표가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캐나다의 보수 정권은 지역공동체 대표들을 사업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들로 바꿔나갔다. 기금 출연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아걸기 시작했고, 기금을 출연한 이들은 우리의 논문이 우파들의 학술체제에서 아예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후학들은 대학과 저임금 노동자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를 뛰어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 간극을 나는 '공감 격차 Empathy Gap'라고 부르는데, 과학자나 정책 결정권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17~18쪽)
캐나다 여성 '인간공학자'인 캐런 메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 Pain and Prejudice>(김인아 외 옮김. 동녘)을 읽었다. 과학자가 노동자와 만나 건강을 들여다보고, 무엇이 그를 아프게 하는지 뒤쫓는다.
삼성반도체 공장 백혈병이나 타워크레인 사고 같은 '사건'이 없어도 노동자들은 아프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위험하다는 얘기 한번 들은 적 없는 유해물질을 다루다가 병에 걸리거나 질환을 타고난 아이를 낳기도 하지만, 아주 소소한 일상의 어떤 작업 때문에 종일 다리가 아프고 발이 붓고 몸을 굽히기 힘들어지고 크고작은 질병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들이 일하는 과정, 작업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관찰하고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 나아가 해법을 찾는 것이 '인간공학자'의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메싱이 만난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병원이나 철도의 청소노동자, 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들, 교사, 이런 사람들이다. 병원에서 위험한 물건 혹은 아픈 사람을 들어서 옮겨야 하는 사람들의 노동, 간병인들의 '팀워크'만 인정받는다 해도 그 힘겨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는 사실, 상점의 점원에게 의자만 놓아준다 해도 다리 통증이 사라질텐데 '손님들이 건방지다고 본다'며 의자를 놔주지 않는 업체들, 언제 일하라는 전화가 올지 몰라 들쑥날쑥한 일정 때문에 가정마저 흔들리는 사람들,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무시당한 채 숫자로 측정당하는 교사의 괴로움 같은 것들이 메싱이 관찰하고 알아낸 사실들이다.
적어놓고 보니 우리가 다 아는 얘기들이다. 한국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얘기돼 왔던 것들. 왜 이마트 직원은 의자에 앉지 못할까, 간병인들은 저임금 노동에 시달릴까, 교사들은 교원평가에 반대할까. 메싱은 과학자로서, 이런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 애쓴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연구 덕에 '우리가 다 아는' 그런 고통들이 겉으로 드러나고, 문제제기가 이뤄진다.
책은 앞부분에서 저자가 관찰한 노동자들의 건강문제, 특히 남성들의 노동보다 덜 주목받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 설명한다.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사례 중심으로 조곤조곤 풀어놓아서 쉽고 생생하다. 하지만 이런 협력과 탐구, '더 건강한 노동'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기 일쑤다. 책 전반에서, 그리고 뒷부분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는 대목이 내겐 더 인상적이었다.
기업을 경영하는 자산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이혼한' '여성 박사'가 되는 순간 겪어야 했던 차별과 편견, 거기에 더해 '노동자들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연구비를 끊기고 학회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사회'에서 따돌림과 배제를 당하는 경험. 그 과정을 통해 저자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 것은 '배운 이들'과 '노동자들' 사이를 끊어놓는 공감의 부재다. 그것을 메싱은 '공감 격차'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도 그들의 경험을 이해할 방법도 없다. 32년 간 나는 학자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노동자들에겐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할 방법이 없었다. 공감 격차는 노동, 과학, 사회의 모든 면에서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킨다. 산재보상 여부를 결정하는 판사들이 조립 라인의 노동조건을 상상하지 못하면, 그들은 작업관련성 질환에 대한 보상 요청을 기각한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그들 입장에 대한 '공감'을 구매할 수 있으므로 과학자들은 기업의 관점에 공감하는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40쪽)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원하던 공부를 했지만 저자가 부딪친 환경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험악했다. "삶은 꽤나 고단했다. 페미니스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싱글맘으로 산다는 것은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었다. 대학사회처럼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사람들 틈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무료 진료소에 소아과 검진을 받으러 가면 모욕의 세례를 받았다. 의사는 내 아들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있는지 심문하듯 물었고, 아들의 티셔츠에 얼룩이 묻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복지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가야 했다."(205쪽)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지지를 하며 피케팅을 하고 있던 교수가 실수로 우리 생물학과 건물 앞에서 커피컵을 떨어트렸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컵을 들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장면을 본 청소노동자들은 화를 내더니 쓰레기통에 넣은 컵을 꺼내 다시 아스팔트 위로 내팽개쳤다. 청소노동자들이 보기에 그들이 거부한 청소노동을 대신한 나는 파업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당시 나는 공감 격차를 개념화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를 희미하게 의식하게 된 것은 분명 그때부터였다. (208쪽)
우리는 입좌식 의자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좋은 대안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비용이 대단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자신의 비서는 서서 일하는데 본인은 조깅을 즐기는 과학 학술지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나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주방노동자의 다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측정하는 것은 해볼만한 주제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더니 편집장은 그저 '압박스타킹과 좋은 신발을 사라고 권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통된 주제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에게 박물관을 천천히 걸을 때 다리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을 상기시켰다. 그건 통했다. "아, '박물관 피로' 말이죠!" 갑자기 그가 상기된 채 말했다. 그는 박물관 피로가 유망한 연구흐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계층의 문제에 공감한다. 과학자들이 식당 직원들보다 박물관 방문객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박물관 피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당 직원들에게 의자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는 연구는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96-97쪽)
공감 격차에 대한 저자의 인식, 그걸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 여성이라는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돼 있다. 그것이 '특히나 더 고통받는 여성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비단 젠더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이너리티로서의 경험은 사람의 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연구진을 이끌면 어때? 우리 둘이라면 남자 한 명이 해내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소장은 '모든 기차에는 기관차가 필요하다'며 남성 연구진을 대표자로 할 것을 주장했지만 도나와 나는 정색했다. 우리는 '칙칙폭폭' 소리를 내고 콧방귀를 뀌며 소장의 사무실을 떠났다.
우리가 주로 연구하고 있는 것들은 이사회에서 '예방적 예방'이라며 경멸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직업보건상의 문제가 진단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여겨졌다. 어느 이사는 "당신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막으려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우리를 비난했다. 이사회는 특히 여성이나 젠더에 특화된 연구는 기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사업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결정했다. (215-216쪽)
한국의 적잖은 '고객'들이 마트 점원은 서서 근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캐나다에서도 의자는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인식이 컸다. "계산원들은 고객을 상대할 때에 서 있어야만 하며, 왜냐하면 앉아 있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에. "의사들이 환자를 만날 때 서서 인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왕이 신하를 친견할 때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서 있다'는 것은 상위 사회계급을 향한 일종의 비언어적 표현"(99쪽)이다. 문제는 이런 차별적인 인식, 사회적 '계급'에 대한 인식이 과학자들의 건강 연구마저 규정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럼 '낮은 계급'에 대해서는 누가 연구할 것이며 누가 그 업무환경을 관찰하고, 고통을 측정하고, 괴로움을 줄여주기 위해 애쓸 것인가?
직업보건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언제나 소송의 위험을 걱정해야 하고, 문서 자료에서 '너무나 너무나 조심스럽고 신중한' 문구들을 고르게 마련이다. 이조차 노동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된다. "공감하는 과학자들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바람을 숨기는 방식을 학습해왔다. 그 결과 과학 문헌의 출판에 편향이 생겼고 그 편향은 노동자들을 결국 아프게 했다. 왜 그들은 산재 신청을 하지 않을까? 대개는 그 과정이 매우 괴롭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게임의 규칙은 회의주의를 부추기도록 만들어져 있다. 노동자들이 건강 문제가 일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전문가들을 설득하려면 관련성이 95%의 유의 수준을 보여야 한다. 연구에서 보상에 이르는 직업보건의 모든 체제가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진화해온 것이다."(252-253쪽)
직업이 직업이므로, 나는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서 언론의 역할, 더 정확하게는 신문기자들이 공감을 대입하는 사회계층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 친한 판사님과 함께 법률학회지에 실린 국내 연구논문을 읽어본 적 있었다. 스스로 '가난하게 자랐다'고 인식하는 판사들일수록 '생계형 범죄'에 관대했다. 돈이 없어서 물건을 훔친 사람을 엄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사정에 공감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 반대도 물론 사실이었다. 어려운 경제형편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응답한 법관들은 생계형 범죄도 '법대로' 강하게 처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계층에 공감하느냐'는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느냐'와 직결된다. 그런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특목고와 명문대를 나온 이들 중심으로 저널리스트 사회가 구성되면서, 언론에서도 공감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늘 깨어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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