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장 지글러, '유엔을 말하다'

딸기21 2019. 6. 1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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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과 일한 장 지글러의 책 중 가장 유명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읽지 못했고 <빼앗긴 대지의 꿈>을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얼마 전 책을 주문하면서 지글러의 책 2권도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중 한 권이 <유엔을 말하다>(이현웅 옮김. 갈라파고스)였다. 

 

이 책도 정말 재미있었다. 지글러가 책에서 언급한 사건들은 대체로 내가 아는 것들이나 국제뉴스로 다루기도 했던 것들이다. 그 맥락과 이면을 속속들이 전해주니 더 재미있을 수밖에. 이슈의 줄기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듯. 국제부 후배들이나, 세계를 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지난 세기의 후반부 이후 지구 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훑어주는 월드뉴스 요약본으로도 강추.

 

채무에 짓눌리는 국가는 주기적으로 협상해야 한다. 이런 협상은 이전의 채권을 사들이고 '재조정된' 새로운 채권을 유통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재조정된 채권의 가격은 70%나 하락할 수 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제2의 시장에서 유통된다.
벌처펀드는 제2의 시장에서 정상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이전 채권을 매입한다. 그다음에는 채무국가가 그 채권을 100% 가격으로 사들이도록 법정에서 공격한다. 2015년에는 26개의 벌처펀드가 32개 채무국가를 상대로 227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벌처펀드가 승소한 비율은 77%다. 그 기간 벌어들인 이익은 33%에서 1600%까지 이른다.
영국과 미국의 법원은 벌처펀드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1976년부터 2010년까지 두 나라 법원에서 26개 채무국가를 상대로 120건의 소송이 제기됐다. 그중 벌처펀드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진 소송은 89%나 된다.
2002년 말라위에서는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부는 희생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줄 수 없었다. 재해가 일어나기 몇 달 전 말라위 정부는 공개시장을 통해 국립식량비축기관이 비축해둔 4만 톤의 옥수수를 팔아야 했던 것이다. 영국 법정이 벌처펀드가 제기한 소송에서 말라위 정부에게 수천만 달러를 지불하라고 선고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논설위원 마틴 울프는 "이런 유형의 펀드를 '벌처'라고 부르는 건 독수리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썼다. (31-32쪽)

런던에 사는 마이클 시한은 버진아일랜드에 주소를 둔 도니골드 인터내셔널의 주인이다. 1979년 잠비아는 루마니아로부터 3천만 달러에 이르는 농기구와 장비를 수입했다. 이후에 도니골은 300만 달러를 주고 루마니아가 보유한 잠비아의 채권을 구입했다. 골드핑거는 런던 법원에 잠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승소했고, 세계 전역에서 잠비아의 수출 품목인 구리, 잠비아 정부 소유의 부동산, 남아공에 왕래하는 잠비아의 화물차 등을 압류했다. 결국 잠비아 정부는 굴복했고 법정 밖에서 협상을 진행해 155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미국 델라웨어주에 등록돼 있는 FG캐피탈 매니지먼트의 소유주 피터 그로스만은 콩고민주공화국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구 유고의 에네르고인베스트는 콩고강에 댐을 짓는 데 필요한 전자장비를 당시 자이르에 팔았다. 1980년 말, 킨샤사 정부는 대금 지불을 중단했다. 그로스만은 에네르고인베스트(지금은 보스니아 정부 소유다)로부터 채권을 25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뒤 킨샤사 정부에 1억 달러를 지불하라는 법원 명령서를 제시했다. 파리 국제상업회의소가 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로스만은 세계 곳곳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산 미네랄과 기업의 해외 계좌를 압류했다.
폴 싱어는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NML 캐피탈의 주인으로, 개인 재산이 170억 달러에 이르는 갑부다. 1995년 경제위기가 페루를 뒤흔들어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하자 싱어는 이 은행들의 부실채권을 110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은행 부채에 보증을 선 것은 페루 정부였다. 싱어는 뉴욕에서 리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0년에 페루 정부로부터 5800만 달러를 얻어냈다. (33-35쪽)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아르헨티나 부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국내 언론들이 유독 물어뜯는 것이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의 '좌파 국가'들이었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지금은 아무데나 다 붙지만 원래 아르헨의 페론주의 등 남미의 좌파 정책을 비꼴 때 많이 쓰이던 말이었다. 한국 언론처럼 아르헨이 망하도록 염불을 외우고 경제가 나빠지면 좋아라 대서특필하는 언론 집단이 또 있을까? 

몇 해 전 아르헨 경제가 나빠졌을 때에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용을 잘 모른 채 '위기'를 강조하고(아르헨은 당시 망하지 않았다 -_-;;) '포퓰리즘'에서 원인을 찾고, 그럼으로써 알지도 못한 채로 벌처펀드의 편을 들고.

 

2001년 아르헨티나가 파산했다. [정부는 은행가들을 소집해 2년 간 협상을 벌였고] 은행가들은 결국 채권을 70% 할인하는 걸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부는 재조정된, 이전 가치의 30%인 새 증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예전 증권이 제2의 시장에서 계속 유통되고 있었고, 폴 싱어의 벌처펀드와 다른 벌처펀드들은 정상 가격보다 싼 가격으로 이 증권을 사들였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빈곤과의 싸움에 나선 덕에 2004년부터 극빈자 비율은 인구의 47%에서 16%로 감소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벌처펀드와의 투쟁 전선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말았다.
뉴욕 연방지방법원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로 하여금 폴 싱어에게 채권에 대한 대가로 13억3천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싼 사격에 채권을 사들였던 싱어는 1600%의 이윤을 얻었다. 아르헨티나는 지불을 거부했다. 싱어는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미국에 맡겨둔 금 보유고를 미국 정부가 압류하도록 시도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호위함 리베르타드호가 기니만에서 항해를 하고 있었다. 호위함은 가나의 아크라 항구에 정박했는데, 뉴욕의 판사로부터 요구를 받은 가나 정부는 리베르타드호를 압류했다. 밀을 실은 채 함부르크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 마이애미에 착륙해 있던 비행기 등, 벌처펀드로부터 돈을 받은 변호사들은 세계 도처에서 아르헨티나의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시도했고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36-37쪽)

 

지글러는 유엔에서 미국(그리고 이스라엘)과 연신 부딪쳐야 했고,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을 위해 싸워야 했다. 이어지는 것은 지글러가 아르헨과 함께 싸운 과정, 인권이사회에서 '승리'를 거둔 내용 등이다. 하지만 결말은? 처참하다.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였다. 그녀는 전략을 바꿨다. 벌처펀드에 굴하지 않으면서 유엔 인권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제네바에 파견될 인물로 명망이 매우 높은 알베르토 페드로 달로토를 임명했다. (37쪽)

2016년 2월 15일 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는 거기서 벌처펀드의 활동이 세계 모든 국가의 법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선의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채권자가 한 국가에서 발행한 공채나 채권을 사들이면서 불법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채무자인 국가에 대한 그의 권리는 공채나 채권을 사들이는 데 지불한 가격으로 한정돼야 한다. 현재의 기준으로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서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외국의 중재 판결이나 유죄 판결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41쪽)

적들은 전략을 바꿨다. 유엔 안에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조상이 사용했던 전략, 즉 덜 복잡하면서도 효과가 있는 전략을 채택하기로 했다. 바로 부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2015년 12월에 대선을 치렀다. 크리스티나가 지지한 후보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지방 출신의 우파 정치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우파 정치인이 당선되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쓴 것이다. 
대통령이 된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벌처펀드가 요구하는 것들을 지체 없이 들어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임기 첫 6개월 동안 벌처펀드에 약 100억 달러를 지불했다. 그는 선임자들이 약속한 사회복지 예산을 대대적으로 감축해 이 돈을 마련했다. 동시에 국제 금융시장은 아르헨티나에 문을 개방했다. 이 나라는 다시 빚을 졌고, 2016년 3월부터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진 빚이 1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불가촉천민 취급받던 아르헨티나는 순식간에 국제 금융시장이 소중히 여기는 나라가 되었다. 
2015년까지 셸 아르헨티나 CEO를 지낸 다음 에너지장관이 된 후안 호세 아란구엔은 새 대통령 임기의 첫 6개월 동안 에너지와 관련해 8개의 중요한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 중 7개는 셸에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42-43쪽)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나오는 말처럼]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내가 벌처펀드를 상대로 벌인 투쟁에서 겪은 패배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쿠바의 작가 호세 마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는 한번 깨어나면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 폴 싱어는 아르헨티나 국민과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 제도의 수많은 국민과의 싸움에서는 이겼다. 하지만 우리는 싱어와 그 부류의 사람들을 장막에서 끌어냈다. (59쪽)

 

지글러는 유엔이 가진 한계를 직시하고 분노하면서도, '의지의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다. 

 

유엔은 엄격한 구조를 지닌 조직이라기보다는 23개의 전문기구,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를 옛날식 일본어 표현대로 번역;;), 관리조직, 기금, 프로그램 등이 중앙행정기구를 옆에 두고 서로 공존하는 성운 같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기구는 행정적으로 서로 독립해 있어 자체적으로 예산을 보유한다. (74쪽)

 

유엔의 일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에 대한 지글러의 관찰들은 쉽게 들어보기 힘든 것들이라 재미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은 세계식량계획(WFP)으로 실현되고 있는 작업이다. 이 기구 덕분에 2015년에는 세계 9100만 명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수단의 서부, 케냐 북부,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에서는 무장강도가 WFP 소속 화물차를 주기적으로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물자를 약탈당하고, 차량이 소각되고, 이따금 운전수가 살해당한다. 이러니 WFP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존경을 받을 만하다. 매번 여정에 오를 때마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WFP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기구다. 이 기구는 5개 대륙에서 응급창고를 관리한다. 세계 시장에서 주요 식량의 가격이 낮아질 때면 WFP는 수천 톤의 재고를 비축한다. 이 기구는 자체적으로 5천 대의 화물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한 운전수를 고용하고 있다. 로마에 있는 WFP의 운송부는 항공기도 이용한다. 남수단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십만 명에게는 육로나 강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런 때는 화물기가 상공에서 식량 박스를 투하하는데, 박스가 지면과 충돌했을 때 생기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낙하산을 이용한다. WFP의 항공기는 유엔 내에서도 유명해서 많은 부서가 이 항공기를 빌려 쓰기를 원한다. 이 항고기가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고 조종사의 기술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튀니지의 시디부지드 태생의 생물학자 달리 벨가스미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그는 30년 간 WFP를 이끈 중요한 지도자였다. 그는 2015년에 병과 과로로 사망했다. (75쪽)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기구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제연맹이 개입해 창립됐다. 창립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개 장 조레스의 오래된 협력자들인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가령 사회주의자이자 국회의원인 알베르 토마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레스의 비서였던 동시에 제네바대학교 교수였던 경제학자 에드가 미요도 있었다.
장 조레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날인 1914년 7월 31일에 암살당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보물, 곧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일과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에 저항하는 것은 알베르 토마와 에드가 미요와 이들의 ILO 동료들이 이끈 투쟁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ILO 감시관은 유엔 회원국이 자발적으로 조인한 191개의 국제협약을 적용하는지 조사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유엔의 23개 전문기구는 거의 모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고유한 예산을 할당받는다. 국가 간 이사회가 이 기구들을 통제하는데, ILO만은 예외다. 이 기구는 노동조합원, 경영주, 국가 대표자가 동일한 인원으로 참석하는 3자 이사회가 운영한다. (78-79쪽)

 

예전엔 일본식으로 신문 기사에서도 유엔난민기구를 '난민고등판무관실', 인권기구는 '인권고등판무관실' 이런 식으로 썼었다. 지금은 유엔난민기구가 됐고 그 수장인 High Commissioner를 난민기구 대표라고 부른다. 난민기구(UNHCR)를 이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난민기구 대표는 필리포 그란디이고, 그 전에 지금의 유엔 사무총장인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맡았었다.

 

난민기구는 1차 대전 뒤의 독일로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유서깊은 실체인 반면, 유엔 내에서 난민기구와 함께 High Commissioner를 두고 있는 양대 기구인 유엔인권기구는 좀 달랐다고 한다. 지글러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에 대한 경애심을 한껏 표시하면서 이 기구를 둘러싼 곡절을 설명한다.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인권기구라고 써야 함;;)는 자체 예산도 없고, 독립적인 국가 간 행정이사회도 없으며, 행정적으로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의 한 부서에 불과하다. 사실상 이 기구의 명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냉전 시기의 대립 때문에 '인권'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상황 이후에) 1992년, 뉴욕 유엔본부의 39층에서 한 예외적인 인물이 유엔 사무총장 자격으로 총회도 안전보장이사회도 열지 않은 채 역사적인 일을 시도했다. 제6대 사무총장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였다. 그는 지적인 사람이자 오랜 기간 장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유용한 경험을 쌓은 이집트의 파샤였으며 섬세하고 박식한 법률학자였다. 

그는 1993년에 빈에서 인권과 관련된 세계 회의를 직권으로 개최했다. 이 회의는 1948년에 파리에서 진행된 이래(이 때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됐다) 두 번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된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냉전 시절 서방이 소련 진영에 요구했던)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소련이 '서방이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하나의 새로운 선언에서 결합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권을 말하는 주체의 선의와 성실성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신뢰성에서 이점을 이끌어냈다. 그가 역사적인 순간에 한 자리에 모인 171개국의 대표에게 '빈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한 결의안 초안은 1993년 6월 25일에 채택됐다. 미국 대표들은 투표 순간에 기권했다.

이 이집트인은 빈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까지 유엔은 제네바의 윌슨 궁에 위치한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기구'만 두고 있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라는 명칭이 붙은 새 기구의 창설을 두고 투표에 부쳤다. 그는 능숙하게 일을 진행했고, 제네바의 그 작은 기구는 예전보다 더한 위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부트로스 갈리는 미국 대표들을 달래기 위해 새 기구가 유엔 본부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했다. (84-86쪽)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와 이사회의 관계는 복잡하고 갈등도 빈번하다. 우선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건 이사회다. 이사회는 두 가지 임무를 맡고 있다. 유엔 193개 회원국이 각각 수행하는 인권 정책을 감독하고, 이전에 없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에 맞는 타당한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인권이사회는 특별조사관을 두고 있으며 임시 회의를 제외하고 매년 3번에 걸쳐 3주씩 진행되는 정기회의 동안에는 제네바에 소재를 둔다. 유엔 사무국의 한 부서일 뿐인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는 법적인 권한이 없으므로 필요할 때 인권이사회의 비서실 역할을 하고, 특별조사관을 기술적 행정적으로 지원한다. 이 부서는 5개 대륙에, 곧 튀니스, 암만, 보고타, 카트만두 등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87쪽)

 

지금의 인권최고대표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는 칠레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 바첼레트는 여러 모로 관심이 많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퇴임 뒤에 적절한 역할을 맡은 것 같다. 

 

인권이사회를 일그러뜨리는 '관제 시민단체'들의 존재와 그들로 인한 인권 논쟁의 '부패'는 새겨들을 대목.

 

인권이사회는 시민단체에게 국가와 동등한 지위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런 기구는 유엔 내에서 인권이사회가 유일하다. 뉴욕에는 소위 '자격 B'라고 하는 특별한 절차가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유엔의 비정부기구위원회는 어떤 NGO나 사회적 종교적 운동의 구조, 창립 경위, 능력을 조사하고 그들에게 심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지 결정한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도 부패가 모든 걸 타락시키고 있다. 어떤 국가는 완전한 'GONGO(국가가 조직한 비정부기구 Government-Organized Non-Govenmental Organization), 곧 정부가 범죄를 은폐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비정부기구를 만드는데, 중국이 그런 예다. 1990년대 이래로 중국은 파룬궁을 박해하고, 2012년부터는 수련자들을 사형시키거나 고문을 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 서구의 비정부기구, 교황대사, 세계교회이사회는 인권이사회 앞에서 이 범죄를 고발했다. 그러자 갑자기 '중국의 종교적인 자유를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중국 자유사상가연합' 같은 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사실 이런 운동과 단체는 중국이 만든 것이었다. 중국에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증언을 하겠다며 자격 B를 획득한 다음, 인권이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에도 한 용병 같은 NGO가 인권이사회에 등장해 사형제도, 법원 판결에 따른 신체 절단, 채찍으로 때리는 고문 등이 코란에 언급돼 있다는 이유로 극찬했다. (97-98쪽)

 

미국이 미워하는 행동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래서 실제로 미국의 미움을 받아온 사람답게, 책의 상당 부분에서 지글러는 미국을 비판한다. 

 

유엔이라는 조직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다자외교와 헨리 키신저의 제국주의적 이론은 상반된다. 하지만 유엔은 미국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은 중앙행정기관 예산의 26%에 해당하는 100억 달러를 유엔에 매년 지원한다. 23개 전문기구는 각각 자체적인 예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 예산은 일반예산과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구성되는데, 평균적으로 예산의 30~40%만이 회원국의 일반분담금으로 충당된다. 세계식량계획의 경우 미국은 자금을 지원하거나 국내 잉여 곡물을 기부하는 형태로 예산의 62%를 담당해왔다. (153쪽)

유엔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사무국은 평화유지활동국(DPKO)이다. 이 사무국의 한해 예산은 70억 달러가 넘고, 그중 많은 부분을 미국이 분담한다. 그런데 유달리 사악한 자금 지원방식이 있다. '전용 기부금'이라 불리는 이 기부금은 자발적으로 기부된 것이지만 기부자는 이 돈이 특정한 목적에 쓰이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네팔, 부탄, 라다크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해하던 워싱턴은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에 천만달러를 기부했다. 카트만두에 사무소를 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54쪽)


유엔 고위직 임명에는 예상대로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데,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것에 대한 지글러의 평가는 냉혹하다. 

 

유엔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국제공무원이 있다. 일반 스태프는 행정직원이고 두 번째 부류로는 전문가들이 있고 세 번째 부류로는 국장 급의 사람들이 있다. 가장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들은 사무총장, 사무부총장, 사무총장보, 전문기구와 기관의 사무총장, 고등판무관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부류는 G나 P의 1부터 5까지의 등급에 따라 지위가 결정된다. 국장급은 두 가지 등급, D1과 D2만 있다. 국장급은 평균적으로 한달에 세금이 면제된 2만5천 달러를 받으며 외교관 면책특권을 갖는다.
인사는 물론 능력에 따라 선발돼야 하지만 유엔 기구의 보편성과 대륙 간 균형을 보장하기 위해 지리적 민족적 출신 성분도 고려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회원국 간의 길고 복잡하고 상당히 모호한 협상이 진행되고 나서야 지명 여부가 결정된다. 
적어도 문서상으로 유엔은 엄격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하지만 미국이 제네바와 뉴욕에 파견한 사람들이나 미 국무부와 CIA가 유엔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조심스럽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감시하고 있다. P 부류에 속하는 직원들은 거의 대부분 감시대상이다. P3 이상의 직위에 임명될 후보자는 승인을 얻기 위해 신중하게 미국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일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기문이 선출된 일은 사무총장을 결정짓는 방식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2006년에 아프리카인 코피 아난의 임기가 끝났다. 5개 대륙은 순서대로 사무총장직에 후보를 내보내는게 불문율이다. 이번에는 아시아 차례였다. 가장 적합한 후보는 사무차장인 데다 작가이기도 한 샤시 타루르였을 것이다. 그의 능력과 경력은 문제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타루르는 인도인이다. 파키스탄은 타루르가 조명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이슬람회의기구(OIC) 동맹국들을 소집했다. OIC는 57개국으로 구성돼 있고 파키스탄이 대변인 역할을 한다. 카슈미르 출신으로 파키스탄 유엔대사인 마수드 칸은 맹렬한 캠페인을 벌였고, 타루르는 후보군에서 빠지고 말았다. 

이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후보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 대신 중국은 한국의 외교장관으로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반기문을 무대로 나서게 했다. 중국 정부에게 한국인이 사무총장에 지명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에게 상임이사국 자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으로서는 남한이라는 가신 같은 공화국 출신의 국민이라면 자신들에게 충성심을 가질 거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 또한 반기문과 연대했다. 르 케도르세(프랑스 외교부)는 서툴지라도 프랑스어를 몇 마디 할 수 있으면 누구든 지지하는 관례가 있기 때문이다. (157-158쪽)

 

프랑스... 뭥미 ㅋ

 

이제, 지글러가 마음 아프게 회상하는 지 멜루 이야기.
책 맨 앞쪽에 "2003년 8월 19일에 바그다드에서 암살당한 인권고등판무관 세루지우 비에이라 지멜루와 그의 21명의 동료들에게"라고 쓰여 있다. 그 사건은 너무 충격적인 폭탄테러여서 나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비에이라 지멜루를 직접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다만 '암살당한'이라는 번역은 옥에 티)

 

기적적으로 인권고등판무관 자리는 미국에 종속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연속해서 차지할 수 있었다. 완고한 성격에 아주 훌륭한 인물인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에 이어 용감한 캐나다 여성 루이즈 아버가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 그녀는 헤이그의 국제재판소에서 구 유고슬로비아에서 자행된 범죄를 다루는 다루는 검사로 활동했다. 이후 타밀족 출신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비 필라이가 고등판무관으로 있었다. 그녀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운동가들을 변호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 유엔은 그녀를 탄자니아 아루샤특별재판소에 지명해 르완다 학살자들을 재판하게 했다.
메리 로빈슨과 루이즈 아버 사이에는, 윌슨 궁전에서는 잊을 수 없는 세루지우 비에이라 지멜루가 있었다. 그는 2003년에 21명의 동료와 함께 바그다드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2014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반기문은 나비 필라이의 임기 연장을 거부했다. 그는 그 자리에 미국이 비밀리에 제공하는 자금과 지원에 의지해 존속하고 있는 요르단 하심 왕조의 자이드 라아드 자이드 알후세인 왕자를 지명했다. (158-159쪽)

 

자이드 왕자에 대해 지글러는 아주 비판적이다. 미국에 붙어 먹고 사는 요르단 출신이라는 것, 취임 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연설할 때 관례를 깨고 '동영상 연설'을 내보내 모욕을 줬던 일 등을 언급한다. 유엔 인권최고대표로서 평판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자이드 왕자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한일 위안부협정을 맺었을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할머니들이 뉴욕에 찾아갔지만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만나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기문은 합의가 이뤄지자마자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었다(뒤에 대선후보로 나선다고 할 때에, 기자들이 이 문제 물어보니 "나쁜 놈들"이라고 버럭~ 성을 내며 위안부 얘기 그만하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자이드 최고대표가 제네바에서 "보상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피해자들만이 말할 수 있는 문제"라며 할머니들 입장에 서서 발언을 했고, 부랴부랴 반기문은 할머니들을 면담하기로 결정했었다.

 

DPKO는 국제연합군을 지휘한다. 국제연합군은 평화유지 peace keeping 와 평화창설 peace making 이라는 확실하게 다른 두 가지 임무를 맡는다. 평화유지 작전은 외교관들이 분쟁을 종결시키기로 협상한 이후에 시행된다. 이 작전에는 휴전선을 감시하고 휴전 상황을 관리하는 일이 포함된다. 평화 창설 작전에는 선전포고를 하는 일이 포함된다.

 

드디어 말 많은 평화유지 작전 문제로 넘어왔다. '인도적 차원의 군사개입'에 대해서 말하자면 끝이 없을테니 넘어가고. 평화유지군 자체와 관련해서 가장 말 많았던 사례 중 하나가 아이티였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난 뒤에 이재민 돕는다고 들어간 유엔 평화유지군이 오히려 콜레라를 퍼뜨려 재난을 악화시킨 사례다. 깔끔하게 사과하고 처리했어야 하는 걸 계속 부인하고 변명하고 미루다가 6년 뒤에야 반기문 사무총장이 사과했다. 

 

유엔이 벌인 평화유지 작전들

 

아이티에 파견된 평화유지군 상당수가 네팔 병사들이었다. 지글러에 따르면 "국제연합군은 회원국이 할당한 병력으로 구성되는데 거의 대다수가 과테말라,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같은 아주 가난한 국가 출신"이다. 2016년 기준으로 연합군 수는 10만 명이 넘고, 여기에 민간인 2만 명이 덧붙는다고. 114개국에서 온 "이들에게 평화유지 임무란 나날의 빵을 의미한다. 국제연합군은 레바논 남부, 키프로스, 코소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국경 분쟁 지역, 수단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사하라 사막 서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아이티 등 32개국에서 휴전선을 감시하는 중이다." (176쪽)

 

전체적으로 번역이 목에 걸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문장이 깔끔하지 못한데, 위에 옮겨적은 부분도 그런 예. '사하라 사막 서부'는 아마도 모로코 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는 서사하라(고유명사)를 일반적인 지역소개처럼 옮긴 것 같고. 아이티의 경우 '휴전선을 감시하는' 건 아니다.   

 

지글러는 평화유지 임무 등을 다룬 '전쟁과 평화, 유엔의 고뇌'라는 챕터에서 북한 방문담을 소개하고 있다. 1978년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친서방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북한까지 가게 됐으며, 김일성 주석까지 만났다고 한다. 지글러는 서방의 오만과 횡포와 일방주의를 극렬 비판해온 '좌파' 지식인이지만, 독재정권이나 억압적인 정권에 대해서도 물론 비판적이다. 그래서 김일성과의 만남을 비롯한 북한 방문 에피소드는 좀 냉소적인, 그로테스크한 소극(笑劇) 같은 톤으로 묘사했다.

 

유엔과 함께 해온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듯 풀어놓은 이 책에서 지글러는 김일성을 비롯해 무아마르 카다피, 사담 후세인과 만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늘 그렇듯, 누군가가 '반미 지도자'와 접촉하면 미국과 서방은 그를 '독재자의 친구'로 몰아간다. 독재정권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라고 몰아감으로써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미국에 맞선 이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위험을 감내해야 하지만, 지글러 같은 이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좀 더 본질적인 위험도 있다. 미국에 맞선 이들이 언제나 옳은 사람들인 것은 아니다. 카다피와 사담처럼 자기네 국민을 학살하고 억압한 자들도 들어 있다. 카다피는 아랍어로 번역된 <빼앗긴 대지의 꿈>을 읽고 지글러를 초대했다(203쪽)고.

 

카다피에 대해 지글러는 "집권 초기에는 진정한 혁명가였다. 나세르로부터 군인 서임식을 받았고 유럽 반제국주의 운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썼다. 유럽 기업들로부터 에너지 산업을 거둬들인 국유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와 폭격들을 겪으면서 차츰 이성을 잃었고, 그의 원칙을 망각한 채 광란 상태에 빠졌다"(207쪽)고 적었다. 대체로 세간의 평가와 비슷한 것 같다.

 

사담에 대해서는 나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인간에게서는 잔혹성과 폭력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의 활기찬 기운, 빠른 몸짓,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선은 먹이를 잡을 기회를 엿보는 호랑이를 떠올리게 했다."(211쪽)

 

독재자들의 벗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지글러는 자신의 행동에 결과적으로 그런 비난을 부를 소지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후회를 표시한다. 하지만 미국과 서방의 이중잣대에 대해 신랄히 반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반인도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형사재판소(ICC) 문제를 담은 챕터의 제목이 '이스라엘 장관이 헤이그 법정에 서는 날이 올까'로 돼 있다. ICC 문제를 논하려면 결국 던져야 하는 질문이 이 문장에 그대로 적혀 있다. 

 

(ICC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로마조약)의 제8조는 전쟁범죄와 관련돼 있다. 전쟁범죄는 1949년에 채택된 제네바 4개 협약과 1977년 이 협약에 추가된 2개의 의정서 내용을 위반하는 모든 중대한 범죄를 말한다. 이 조항은 전쟁의 야만성에 제한을 두는 국제인도법의 핵심 규칙을 담고 있고, 포로와 부상자를 대우하는 문제는 물론 민간인을 보호하는 문제와 관련된 법을 제시한다. (221쪽)
집단살해 genocide라는 용어는 1943년 폴란드 법률가 라파엘 렘킨이 나치에 의한 유대인과 집시의 절멸, 그리고 1915년에 일어난 터키인에 의한 아르메니아인의 절멸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집단살해 개념은 뉘른베르크 법정의 기소장에서 나타난다. 1948년 유엔의 제안에 따라, 집단살해는 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고 차단하기 위한 협약에서 특별한 범죄로 확고히 인정되기에 이른다. 
반인도적 범죄는 한 민적 전체를 말살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어떤 집단이건 간에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려고 한다. 희생자 집단을 대상으로 살인, 신체 절단, 고문 같은 '일반적인' 범죄를 대규모 차원에서 감행하는 것이다. (222쪽)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이 아닐까. 지글러가 특별히 언급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유혈사태다. "그곳은 무기를 소지하고 키부의 숲과 사바나 지대로 도피한 르완다의 옛 후투족 집단살해자들인 인테라하므웨에 의해서 황폐화되고 있다. 여기에 '신의 저항군'이라는 살인자들이 가세한다.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키부의 바푸엘로족과 바시족 여성을 강간하고 성적으로 잔혹한 피해를 입혔다. 이 '전사들'은 남자들을 벌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와 딸을 강간한다. 항문과 질을 잘라 불구로 만든다. 전통적인 바시족, 바푸엘로족, 반야르완다족 사회에서 강간의 희생자는 마을에서 추방되고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는 죽음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223쪽)

 

이곳 여성들이 겪는 일은 제노사이드일 뿐 아니라 젠더사이드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 여성들을 도와온 의사 데니스 무퀘게가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무튼, 전쟁범죄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로마규정에서 열거된 모든 범죄를 실제로 ICC에 제소한다면 그곳 직원은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ICC가 심판하고 형벌을 내린 사람들이 모두 아프리카 출신뿐이라는 것이다." (224쪽) 실제로 이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반발한 적도 있었다. 

 

옛 유고연방과 르완다의 반인도범죄를 다루는 재판소 활동과 관련해서 캐나다 출신 검사 루이즈 아버와 스위스 출신 칼라 델 폰테를 소개한 대목(227쪽)은 흥미롭다. 

 

아주 꼼꼼한 루이즈 아버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헤이그와 아루샤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이어서 캐나다 대법원의 판사(대법관이라고 좀 쓰지)가 됐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으로 활동했다. 
1999년 루이즈 아버의 뒤를 이어 칼라 델 폰테가 검사가 됐다. 그는 2003년까지 아루샤에서, 2007년까지 헤이그에서 일했다. 이 끔찍한 여인은 1994년에는 스위스연방 검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녀는 나의 면책특권을 없애려고 시도하고, 1998년에는 대반역죄라는 죄목으로 나를 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칼라 델 폰테는 조직적인 범죄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판사 조반니 팔콘과 연합한 그녀는 시칠리아 마피아의 몇몇 카르텔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팔콘과 델 폰테는 사상 초유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현장에서 살인자들을 공격하는 대신, 취리히와 제네바의 은행에서 마피아의 계좌를 압류하는 작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228쪽)

 

루이즈 아버는 인권최고대표 시절 한국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칼라 델 폰테는 인권이사회의 시리아 전범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윌슨 궁전의 엘리베이터나 카페테리아에서 이따금 그녀와 마주친다. 오늘날까지 그녀는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화를 풀지 않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미테랑은 세르비아의 살인자들이 헤이그로 인도되는 절차를 수년 동안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229쪽)

 

지글러는 여러 특별재판소 중에 가장 실효성이 있었던 곳으로 르완다 재판소를 꼽는다. 그 수훈갑은 세네갈 법률가로 르완다 재판소의 수석서기를 맡고 있던 아다마 디엥이었다고. 르완다 내전 뒤 후투족 살인자들이 아프리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이들을 추적한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아다마는 추적팀을 만들어 특수부대를 투입시켰고, 말리의 전 경찰서장이 지휘를 맡았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온 비밀요원, 경찰, 수사관으로 구성된 이 특수부대는 모든 곳을 뒤졌다. 이들은 콩고의 숲이나 아비장의 난민촌이나 다카르의 호화스런 건물에서 범죄자를 잡으면 결박한 다음 가건물에 가뒀다. 그러면 범죄자는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동시에 특수부대가 해당국 정부로 하여금 이 '짐짝'을 아루샤의 재판관에게 보내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체포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230쪽)

 

르완다에 후배 두 명을 출장보낸 적 있는데, 둘 다 다녀와서 '좋았다'고 했다. 성장 잠재력이 있고 '될성 부른'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실제로 르완다는 성평등지수에서 대략 세계 6위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다. 폴 카가메의 장기집권에 대해 서방의 비판이 적지 않지만, '독재국가'라고 찍어누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글러가 뒤이어 소개한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는 잠시 스쳐가며 본 적이 있다. 거기 찰스 테일러가 잡혀 있다고 했었는데, 뒤에 헤이그로 이송됐다.

 

뒷부분의 '나는 왜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었나'라는 부분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사람을 어떻게 몰아붙이는지 보여준다. 난민고등판무관을 맡았던 사드루딘 아가 칸과 이란 이스마일파의 위상(279쪽), 아라파트가 겪어야 했던 굴욕과 말년의 고립(295쪽), 이스라엘 방문 때 느꼈던 분노와 유엔에서 다시 한번 느껴야 했던 무력감(323쪽) 같은 것들은 생생한 체험담이라 눈길이 갔다.

 

인간의 실존을 특징짓는 수많은 부조리한 일 가운데 가장 명백하면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인류가 오늘날까지 전쟁을 멈추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능력은 경이롭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과학적, 기술적, 인식론적으로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분야를 정복하는 매 순간마다, 전쟁의 병리는 더 효과적으로, 더 위협적으로 기능한다. (331쪽)
인도주의적 개입은 회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걸까?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사람을 보호할 책임은, 비록 이것이 그 사람의 정부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유엔의 토대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비 필라이는 콜롬비아와 과테말라에서 행해지는 인권침해를 중단시키기 위해 유엔의 '보호할 책임'에 호소하면서도 그것이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 나라들은 미국의 보호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거부권에 의지해 유엔의 조치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념은 부상하고 있다. 이 이념은 주권주의자들의 악착같은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진보하는 중이다. (344-345쪽)

 

리비아 내전에 서방이 개입할 때 국내에서도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주권침해'를 거론했고, '미국의 음모'를 들먹였던 걸 기억한다. 인권보다 중요한 주권은 없다. 그런 지적이 필요할 때도 없지 않지만, 단순 논리에 매몰되면 아랍 민중들이 일으킨 '아랍의 봄'을 '미국의 음모'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전쟁 못잖게 배제와 착취에 맞서야 한다는 것으로 지글러는 결론을 맺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십계명 중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경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소비문화는 지속적으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착취와 억압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상황입니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속하지 못하느냐와 같이 존재의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선택의 순간에 사회의 최하층이나 빈민가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밖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입니다. 배제당한 사람들은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무엇이 됩니다." (350쪽)

 

유엔의 기나긴 행보를 짚어본 뒤 프란치스코의 말로 끝을 맺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지금 이 지구에서 가장 큰 문제이자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저들,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상태로 버림받고 경제활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되어 '세계의 잉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난민,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 니트족, 노예 같은 존재들. 21세기의 가장 큰 도전이 될 이 문제에 유엔과 국제사회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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