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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아프간 에미리트'? 18년 전쟁 뒤 결국 탈레반과 손잡는 미국

딸기21 2019. 9. 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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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시내, 국제기구 등 외국 시설이 많고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그린빌리지 지역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VBIED로 불리는 차량폭발장치를 이용한 테러였다. 내무부는 최소 16명이 사망하고 119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자신들이 공격을 감행했다는 성명을 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잘메이 할릴자드 미국 특사 등과 함께 2일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카불 로이터연합뉴스

 

9·11 테러 뒤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 지 다음달이면 18년이 된다. 아프간전은 베트남전을 넘어 미국의 최장기 전쟁이 되고 있다. 미국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아프간을 공격해 탈레반 정권을 몰아냈다. 빈라덴은 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에 사살됐고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2015년 은신처에서 숨졌다. 하지만 평화와 안정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전쟁을 끝내지도 못하고 미군을 빼내기도 힘든 미국은 결국 탈레반과의 협상을 택했다. 이 전쟁이 미국에 남긴 것은 재정적자와 부상병들이고, 아프간에 남긴 것은 테러와 정정불안과 배를 곯는 아이들이다.

 

돌고돌아 다시 탈레반

 

잘메이 할릴자드 아프간 주재 미국특사는 2일 미국이 아프간에서 135일 이내에 약 5000명의 병력을 철수하고 기지 다섯 곳을 폐쇄하기로 했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평화협정 초안에 탈레반도 합의했다고 밝혔다. 할릴자드 특사는 탈레반과 몇 달에 걸친 협상 끝에 합의에 도달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은 주둔병력 규모를 줄이고, 탈레반은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같은 무장조직들이 대미 공격에 아프간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로 약속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은 전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도 협정안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으며, 앞으로 노르웨이에서 아프간 여러 정치세력들 간 협상이 별도로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탈레반이 현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탈레반은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카불을 포기하고 파키스탄과 접경한 산악지대로 숨어들었으나, 동부와 남부 등지에서 세력을 회복했고 지금은 국토의 절반 가량을 카불 정부가 아닌 탈레반이 사실상 통치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의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009년 버락 오바마 정부는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불리자 대규모로 증파했고 이듬해 아프간 주둔 미군 규모는 10만명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못 떠나는 미군

 

오바마는 아프간 철군을 공약했지만 퇴임 전까지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1만명 규모의 병력을 남겨뒀다. 그동안 미군 2400여명을 비롯해 미국 주도로 결성된 다국적군 3500여명이 숨졌다. 미군정을 거쳐 출범한 아프간 정부의 치안유지군 약 6만2000명, 탈레반 전투원 6만~6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프간 민간인 희생자도 4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민간기구들은 추정한다.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을 시작한 것은 오바마 정부 때다. 트럼프 정부도 아프간에서 발을 빼기 위해 탈레반과의 협상에 나섰다. 할릴자드 특사는 탈레반과 9차례 협상을 했고, 트럼프 정부는 ‘불법 정권’으로 부르는 것조차 피하며 탈레반을 달랬다. NBC는 국무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아프간 이슬람에미리트’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슬람에미리트는 탈레반이 1996년 아프간을 장악한 뒤 썼던 국가 이름이다. 역대 미 행정부는 탈레반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NBC는 평화협정문에 이 용어가 들어갈 수도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탈레반이 ‘외교 쿠데타’에 성공한 셈이 된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탈레반과 합의하더라도 이 협정은 종전협정이 아닌 평화협정이다. 할릴자드 특사는 “공식 휴전협정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조지프 던포드 미 합참의장은 지난달 28일 “전면 철수를 말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현재 미군 주둔군은 1만3000명이다. 5000명을 철수시켜도 8000명 정도가 남는다.

 

카불 북쪽 자발 사라지의 유니세프 구호소 앞에 아이들을 안고 줄을 선 아프가니스탄 엄마들.  카불 AP

 

아프간전을 끝내겠다고 공언한 트럼프는 내년 대선 전까지 확실한 철군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이번에도 다 빼내지 못해 결국 단계적 감축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까지 미국의 아프간전 비용은 1조 달러를 웃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한다. 하지만 제대군인원호법에 따라 전역병들에게 투입해야 할 비용 등을 감안하면 ‘3조 달러 짜리 전쟁’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굶고 있는 아이들

 

소련은 아프간을 10년간 점령했다가 1989년 철군했다. 그 뒤 아프간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그 승자가 탈레반이었다. 지금 미국은 마음이 급하지만, 탈레반과 적대관계인 IS까지 끼어들어 지난달 18일 결혼식장 폭탄테러 같은 공격을 저지르고 있다. 협상 와중에도 아프간군은 탈레반과 곳곳에서 교전 중이다. 소련 철군 뒤에 벌어진 것처럼 미군 주둔군이 줄어들면 다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밀리터리타임스는 “아프간 군벌들이 벌써 내전 준비에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군 규모를 줄이는 대신 중앙정보국(CIA)의 작전을 늘려 안보공백을 메우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정부도 같은 방식을 택했으나, 의회 감시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 CIA의 드론 공습을 늘렸다가 민간인 오폭피해가 커져 거센 비난을 받았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소련에도 베트남전을 안겨주기 위해 아프간 침공을 우리가 유도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으로 엄청난 국력 손실을 봤듯, 소련도 아프간이라는 ‘진창’에 발을 들였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옛소련의 아프간 점령군 출신 전역병들은 귀향한 뒤 후유증과 알콜중독, 폭력범죄 등으로 사회문제가 됐고 재정은 거덜났다.

 

20세기에 소련이 무너지는 데에 일조했던 아프간은 21세기 들어 부메랑처럼 미국을 거덜내고 있다. 미국 잡지 애틀랜틱은 미국인들이 “아프간전은 미국의 패배로 끝나는가”라는 물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지난달 28일 공화당 유력 정치인 린지 그레이엄은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미국이 탈레반에 안보를 아웃소싱하는 것이냐”고 썼다. 트럼프가 탈레반과의 협정에 대해 뭐라 말하든 미국인들의 환멸이 가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프간 사람들이다. 미국의 아프간 원조액은 2012년 연간 130억달러 규모에 이르렀으나 이후 계속 줄었고 지난해에는 8억달러에 그쳤다. AP통신은 “미군이 떠날 준비를 할 때 아프간 아이들 200만명은 영양실조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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