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에서 발을 빼겠다던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중동에 미군 1만4000명을 증파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방부와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란 위협보다 ‘중국 위협’에 대한 대응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온다. 중국과 이란 중 어느 쪽이 미국에 더 큰 위협이 되느냐를 놓고 안보전략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현지시간) 트럼프 정부가 중동에 병력을 증파할 계획이라고 국방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중동 철수를 공언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증파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이달 내 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 5월 걸프에 에이브러햄링컨 항모를 배치하고 1500명을 보냈으며 한 달 뒤 1000명 규모를 더 파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도 3000명을 보내는 등 중동 미군을 1만4000명 늘렸다. 시리아에서 병력을 빼려다가 거센 비판이 일자 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을 재개한다며 지난달 결국 미군을 ‘재배치’했다. WSJ 보도에 따르면 이들 중 내년 1월 임시파병 기간이 끝나는 이들의 배치를 상시화하고, 여기에 추가 파병을 해 주둔군 규모를 1만4000명 더 늘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는 6만~8만명의 미군이 있다. 항모 등 군함 배치에 따라 주둔군 숫자는 다소 달라진다.
트럼프 정부가 파병을 늘리려는 데에는 이란 위협을 계속 강조해온 이스라엘의 요구, 지난 9월의 사우디아라비아 산유시설 피격, 미국의 제재에 따른 이란의 보복공격 우려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국방부와 안보 전문가들은 지금 중동에서 군대를 빼내면 이라크전 이후 힘들게 유지해온 미국의 입지가 무너진다며 계속 철군에 반대해왔다. 프랭크 매켄지 미군 중부사령관은 군함을 더 보내야 한다고 했고 마크 밀리 합참의장도 중동에서의 ‘억지력 강화’를 주장해왔다.
이란의 군사적 위협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나왔다. 존 루드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은 4일 “이란이 중동에서 우리의 이익이나 우리 시설을 공격할 것이라는 징후가 있다”며 “억지력이나 우리의 대응은 다이내믹하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CNN방송과 뉴욕타임스 등은 최근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서 미사일 부품을 실은 이란 선박을 나포한 사건 등 이란의 위협을 잇달아 보도했다. 국방부 출신의 엘리사 슬로트킨 민주당 하원의원은 얼마 전 이라크를 방문한 뒤 “지난해 이란이 이라크 내의 군사시설을 이용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레베카 레버리치 국방부 대변인은 “대통령은 중동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몇 년 동안 말해왔다”면서, 다만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방식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증파에 대해 반대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의 조시 홀리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이미 올해 1만4000명을 보냈는데 국방부는 1만4000명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펜타곤이 지상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묻겠다”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정부가 핵합의를 깨고 스스로 긴장을 높인 뒤에 ‘이란 위협’을 주장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WSJ은 “외교적 대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란과의 긴장을 줄일 수단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했다.
이란을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목적도 불확실하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걸프에 항모 2척을 보내는 등 압박을 가한 뒤 핵합의를 이끌어냈다. 워싱턴 전략예산평가센터(CSBA) 전문가 브라이언 클라크는 “이란에 맞선 억지력의 목적이 대체 무엇이냐”면서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데에 합의하게 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비좁은 호르무즈에 항모를 더 보내면 오히려 이란의 공격목표물이 될 수 있고, 미군 증파가 역내 긴장과 불확실성을 오히려 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의 국방전략은 이란이 아닌 ‘중국 위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그동안 이런 입장이었다. 2017년 말에 나온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와 국방부 안보전략보고서(NDS)도 중국 위협을 강조했다. 중국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더 큰 위험요인’이라는 것이다.
올 1월 국가정보국장(DNI)이 공개한 ‘세계위협평가’ 연례보고서도 중국 경계론에 더 무게를 실었다. 미 정보기관들의 세계 위협요인 평가를 총괄한 이 보고서는 “중국의 대량살상무기(WMD) 능력이 커지고 있고 다양화하고 있다” “핵미사일 전력을 현대화하고 있으며 초음속 비행수단을 실험 중” “미사일 2차 요격능력을 강화했고 차세대 전폭기도 개발하고 있다”며 중국을 겨냥했다. 경제적 위협과 우주기술을 비롯해, 중국을 무려 85차례나 언급했다.
보고서는 이란의 ‘핵야심’은 사실상 중단된 걸로 봤다. 그러나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골몰하면서도 안보전략에서는 보고서와 반대로 갔고, 이란 제재를 대폭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재개하도록 몰아갔다.
국방부와 안보서클 안에서 이란과 중국을 놓고 국가안보전략 논란이 벌어지는 데에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항모 때문이다. 미군이 현재 운용중인 항모는 11척이고 동시에 배치할 수 있는 것은 그 중 5척이다. 이를 유럽, 중동, 아시아에 전략적으로 나눠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5척 가운데 에이브러햄링컨과 존C스테니스호는 현재 중동 부근에 배치돼 있다. 해리트루먼호도 몇 주 안에 중동에 도착한다. 국방부 내에서는 이란 대응 쪽으로 자원이 쏠리면 아시아 전략이나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강화하는 작업에 힘이 빠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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