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보내는 러시아의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이 2일 개통된다. 옛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최대 에너지 프로젝트인 이 가스관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상징하는 것이며, 세계 에너지 시장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RT 등 러시아 언론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화상연결’ 방식으로 이날 개통식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이날 보도했다. 러시아 측은 지난 10월 가스관에 천연가스를 주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날 중국으로의 송출을 개시했다. 1단계로 2025년까지 38억㎥의 가스를 공급받을 계획이다.
총연장 6400km, 4000억달러 프로젝트
‘시베리아의 힘’은 러시아의 야쿠티아·코빅친스크의 가스전 2곳에서 퍼낸 천연가스를 극동지역으로 보내 중국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는 대규모 에너지 프로젝트다. 2014년 러시아와 중국은 30년 동안 중국에 가스를 공급하는 4000억달러(약 472조원) 규모의 장기 계약을 체결했고 그 해 9월 1일 야쿠츠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장가오리 중국 부총리가 참석해 착공식을 했다.
2200km에 걸친 러시아쪽 가스관은 야쿠티아의 차얀딘스크 가스전에서 출발해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과 합쳐졌다가, 스보보드니의 아무르 가스플랜트로 집결한다. 거기서 다시 러-중 국경 블라고베셴스크 남쪽으로 갔다가 아무르강의 2개 터널을 지나는 것이 1차 파이프라인이다. 800km 길이의 2차 파이프라인은 코빅친스크에서 시작해 하바로프스크를 지나 극동의 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진다. 두 라인을 합치면 길이가 3000km가 넘는다.
아무르 강을 건넌 가스관은 3371km 길이의 중국 헤이허-상하이 라인으로 연결된다. 중국쪽 파이프라인은 2015년 6월 공사를 시작했고 지난 7월 지린성 창링을 지나는 728km의 가스관이 개통됐다. 내년 말까지는 허베이성 융칭으로 1100km 연장할 계획이다. 헤이허-상하이 라인이 완공되는 것은 2024년이다. 완공되면 중국은 이 가스관들을 이용해 연간 380억㎥의 천연가스를 들여가게 된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러시아의 가스프롬과, 중국 내에서 천연가스 70%를 공급하는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이 이 사업을 위해 손을 잡았다. ‘시베리아의 힘’은 건설기술 면에서 두 회사의 역량을 보여주는 야심찬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2016년 9월 알렉세이 밀러 가스프롬 회장과 왕이린 CNPC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아무르강 가스터널 착공식이 열렸고, 2개의 터널이 지난 3월 완공됐다.
서방에 맞서는 중·러 연합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서구와 대립해온 러시아에게 이 가스관은 더 이상 ‘서방의 징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에너지 소비를 점점 줄이고 있는 유럽 대신 동쪽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중국에도 가스관은 중요하다. 겅솽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중-러를 잇는 동방의 가스관은 에너지 협력의 새 장을 여는 전략적 프로젝트”라고 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중국의 천연가스 소비량은 2년 새 33%가 늘었다. 지난해 수입한 천연가스의 40% 가량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가스관을 통해 들여왔다. 나머지는 호주, 카타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사들인 액화천연가스(LNG)다. ‘시베리아의 힘’이 개통됨으로써 앞으로는 러시아산 비중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가스프롬과 CNPC는 가스 공급가격에 대해서는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나, 원유 바스켓에 연동돼 가격이 정해졌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링샤오 CNPC 부회장은 지난달 시베리아 파이프라인 공급가격이 투르크메니스탄 쪽에서 오는 가스보다 “조금 싸다”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은 계속 늘고 있다. 두 나라는 총연장 6700km에 이를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건설에 대해서도 협상 중이다. 양국은 지난해 9월에는 러시아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했다. 러시아가 외국군을 자국으로 불러 정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한 것은 소련이 무너진 뒤 처음이었다. 지난해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량은 1070억달러였다. 지난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리커창 중국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와 만나 양국 교역을 2024년까지 2000억달러 이상으로 늘린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와 서방 관계가 냉각된 상황에서, 그간 서로 경쟁하고 의심해온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손을 잡았다”면서 “두 나라가 경제적·전략적 파트너십을 확장한 것은 국제정치와 세계 에너지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썼다. 미국 시장분석가 에리카 다운스는 이 신문에 “중·러의 결합은 미국이 이끄는 세계질서의 대안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펼치는 '파이프라인 지정학'
러시아는 그동안 유럽을 상대하면서 천연가스를 중요한 지렛대로 삼아왔다. 우크라이나가 서방 쪽으로 경도되는 조짐을 보이면 가스관을 잠그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식으로 ‘길들이기’를 해왔던 것이다. 유럽이 10년 전 경제 위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데다 재생가능에너지 쪽으로 전략을 굳히면서 에너지 수요가 갈수록 줄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천연가스는 러시아의 무기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은 여러 갈래다. 총연장 4200km로 1992년 만들어진 야말-유럽 가스관은 러시아 야말반도에서 시작해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이어진다. 가스프롬이 각국 합작기업들과 함께 만들어 운영해온 이 가스관은 소련이 무너진 뒤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발판으로 되살아나는 도약대가 돼줬다. 남코카서스 가스관(PTE라인)은 카스피해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샤드니즈 가스전에서 조지아를 지나 터키 에르주룸으로 향한다. 2006년 개통된 이 가스관은 카스피해 석유를 수송하는 BTC 송유관과 같은 길을 지난다. 흑해에서 터키로 이어지는 가스관은 ‘블루스트림’이라 불리는데, 가스프롬과 이탈리아 ENI가 주축이 돼 건설했다.
근래 러시아와 미국 간 이슈로 부상한 것은 노르드스트림2라는 가스관이다. 가스프롬은 독일 에너지회사들과 합작한 노르드스트림이라는 별도 회사를 만들어 2011년부터 독일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왔다. 세계 최장 해저 가스관인 노르드스트림이 놓이기 전에는 러시아산 가스의 3분의 2가 우크라이나를 지나야 했는데 이 가스관 덕분에 러시아와 독일 간 직통 수송로가 생겨버렸다. 러시아는 2017년부터는 노르드스트림2를 만들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이 뚫리면 러시아에서 독일로 가는 가스 공급량이 2배로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하는 데 활용해온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발트해를 거쳐온 천연가스가 독일은 물론이고 폴란드 등 동유럽권으로도 수송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발트해 국가들을 압박, 가스관 건설을 막으려 애써왔다. 공사에 참여하는 유럽 기업들을 제재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그러나 가스관은 이미 90% 이상의 공정이 진행됐고 연내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 올여름 미 백악관의 난데 없는 ‘그린란드 매입안’으로 갈등을 빚었던 덴마크는 지난달 노르드스트림2가 자국 영토를 지날 수 있도록 허가해줬다. 미국 뜻을 충실히 따라온 폴란드조차 미국산 셰일가스보다 싼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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