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 3.0’이 될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빼내기로 했다.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기로 한 것이다. ‘제국의 수렁’이라 불리는 아프간에서 옛소련에 이어 미국도 처참한 상처만 입고 물러나는 꼴이 됐다. 반면 중국은 아프간에 군사기지를 짓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까지, 발을 빼는 미국과 영향력이 쇠퇴한 러시아의 빈틈을 비집고 중국이 들어가는 형국이다.
미국 NBC방송 등은 트럼프 정부가 아프간 주둔 미군을 4000명 철수시키는 계획을 이른 시일 내 발표할 것이라고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계획대로라면 전쟁 기간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 10만명이 넘었던 미군 주둔 규모는 8000~9000명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와 맞물려 관심을 끄는 것이 지난해 8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의 보도로 알려진 ‘와칸회랑’의 중국군 기지다. 중국은 아프간과 76km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프간과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중국 4개국이 만나는 좁고 긴 지역이 아프간의 와칸회랑이다.
이곳의 기지는 동아프리카 소국 지부티에 이은 중국의 ‘2번째 해외 기지’로 불렸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확히는 ‘3번째 기지’다. 중국은 2016~2017년부터 타지키스탄 산악지대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 타지크-아프간 국경에선 12~14km 떨어져 있고 타지크-중국 국경에선 30km 떨어져 있는 고르노-바다크샨 지역의 이 기지는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입로가 돼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지부티 기지는 중국도 인정한 ‘보급기지’이지만 타지크와 아프간의 기지들은 중국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중국은 수십~수백명의 병력이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는 타지크 기지에 이어, 이 기지에서 10여km 떨어진 와칸회랑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아프간 러시아어 매체 페르가나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타리크 샤 바흐라미 국방장관 등 아프간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해 기지 건설에 합의했다. 아프간 무장세력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와 연계된 ‘중국인 무슬림 테러범’에 대응한다는 목적을 내세웠고 비용은 중국이 댔다. 와칸회랑 기지는 1개 대대 500명 정도가 주둔할 수 있는 규모이고, 현재 수백 명의 경무장 보병부대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위성사진 분석에 따르면 헬리콥터 이착륙장도 설치돼 있다.
중국은 이곳이 중국군의 군사기지가 아니라 아프간군의 훈련을 잠시 돕고 있는 시설일 뿐이며, 중국이 아프간군과 협력하는 것은 ‘동투르키스탄 테러조직’ 즉 위구르 분리주의 진영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외적으로 군사기지임을 부인하기 위해 ‘사실상의 군대’인 무장경찰을 배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2015년 대대적인 국방개혁에 나서면서 육군을 줄여 ‘질적 군대’로 바꾸는 동시에, 무장경찰 편제를 정비해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 직속으로 바꿨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일대일로의 군사화’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고 분석한다. 와칸회랑은 시 주석이 추진해온 일대일로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미국 외교정책협의회 스티븐 블랭크 선임연구원은 중앙아시아캅카스연구소(CAC) 회보에 지난 4월 게재한 글에서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미국의 취약점을 잘 아는 중국의 결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중국이 이 기회에 일대일로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역내 침투를 늘리려 할 것으로 분석했다. 중국이 신실크로드를 구축하면서 주요 거점에 군사력을 주둔시켜, 일대일로를 보호함과 동시에 주변국들에 정치·군사적으로 입김을 키우려 한다는 뜻이다. 타지크와 아프간의 중국 군사기지는 중국이 경제적 영향력을 넘어 공격적 대외전략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중국과 아프간·중앙아시아의 군사협력은 2015년부터 늘기 시작했다. 그해 탈레반이 아프간 북부 쿤두즈 일대를 점령하자 중국이 카불 정부와 협력해 군사훈련을 돕기로 했다. 중국은 또 타지크·파키스탄·아프간이 참여하는 4자안보협력기구를 만들어 대테러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중국 주재 아프간 대사 자난 모사자이는 아프간 군인들이 중국에 와서 훈련받고 있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는 중국이 파키스탄에도 군사기지를 설치하려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아프간은 2011년 개전 이후로 미국 영향 하에 있지만 아프간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일대는 러시아 영향권이다. 중국이 군사활동을 늘리려면 러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타지크 군사기지는 사전에 러시아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중국 싱크탱크 개발연구센터가 베이징에 러시아측 전문가들을 불러 타지크 기지 설치에 관해 설명했고, 아프간 와칸회랑으로 확대할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때도 중국은 보급·훈련 목적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중국이 러시아를 배려하고 있으나 향후 군사기지가 우즈베크와 카자흐 쪽으로까지 확대된다면 결국 러시아와 영향력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일대일로가 지나는 거점들에서 중국의 군사적 존재감이 커지면 미국과도 갈등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에 유라시아 진입로인 아프간을 놓고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리는 패권다툼을 벌였다. 21세기 초입에 미국의 대테러전으로 ‘그레이트게임 2.0’이 벌어지더니, 이제 중국이 뛰어들어 3라운드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호주 RMIT대 중국전문가 조지 모라노는 지난 11일 SCMP 기고에서 미국의 아프간 철군 계획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제 중국의 지정학적 야심과 경쟁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이 아프간 내부 상황에 대해서는 ‘불개입’을 강조하면서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는 것,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투자’에 집중해 아프간의 필요를 채워주려 하는 점, 때마침 미국이 군대를 빼려 하고 있는 상황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이러니는,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점령 기간 미국이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아프간 무자히딘(이슬람 전사)들을 키울 당시 중국도 반소련 무자히딘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위구르족 테러를 막는다며 아프간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있다. 무자히딘들은 뒤에 미국을 향해 총구를 돌렸고, 미국은 전쟁으로 대응했다가 재정이 거덜났다. 중국의 아프간 개입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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