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거래되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지 일주일, 여전히 WTI는 15달러대이고 그보다 높은 가격대에 거래되던 브렌트유도 간신히 20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 ‘봉쇄’와 맞물려 유가가 이른 시일 내 반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WTI가 세계 유가의 동반 추락을 부르긴 했지만 원유도 생산지에 따라 특성이 다르고 ‘브랜드’에 따라 가격 추이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WTI, 브렌트유, 두바이유가 미국·유럽·중동을 대표하는 선물거래 품목이지만 미국만 해도 마스US, 루이지애나경질유, 코스털그레이드A, 기딩스, 걸프코스트HSFO 등 다양한 유종이 있다. 브렌트도 원유와 브렌트가중평균(BWA) 두 가지로 거래된다. 국가별로도 캐나다원유지수, DME오만, 러시아 우랄스 등등이 있다.
‘가볍고 달콤한’ WTI
생산지도, 시장도 세계에 흩어져 있고 거래되는 석유 종류도 다르지만 하나가 출렁이면 전체가 요동치는 것이 원유라는 상품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멕시코처럼 미리 유가하락에 대비해 보험을 들어둔 생산자가 있는가 하면, WTI처럼 셰일붐 타고 생산량을 마구잡이로 늘렸다가 곤두박질 친 경우도 있다. 세계 유가의 벤치마크(기준)가 되는 유종들은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시장이 급박하게 움직일 때 미세하게 ‘운명’이 갈린다.
흔히 WTI라 불리는 미 텍사스 석유는 ‘텍사스라이트스위트’라고도 한다. ‘가볍고 달콤하다’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고, 황 함유량이 적다는 뜻이다. 석유를 맛볼 일은 없지만, WTI 선물가격은 중요한 경기지표이기에 늘 세계의 시선이 쏠린다.
2007년 4월 미국 투자회사 리먼브러더스는 “WTI는 세계 유가를 잘 반영하는 바로미터가 아니다”라는 보고서를 냈다. 당시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았는데 WTI는 60달러대 초반이었다. 그 때도 이번처럼 오클라호마주 쿠싱에 있는 WTI 탱크들이 차면서 저장할 곳이 모자라 선물 가격이 떨어졌다. 다만 당시에는 급락 사태가 일시적이었고, WTI가 곧바로 브렌트유 가격을 따라잡았다.
역설적이게도 진짜 위기를 부른 것은, WTI 가격이 제대로 된 지표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리먼브라더스였다. 이듬해 이 회사가 불량 주택담보대출에 물려 파산하면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다. WTI는 시장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2009년이 되자 4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격차 커진 브렌트와 WTI
WTI 외에 벤치마크 유종으로는 브렌트유, 두바이원유와 석유수출국기구(OPEC) 바스켓, 러시아 우랄스 등이 있다. 브렌트유는 북해 유전에서 나온다. 다른 종류의 북해 원유들과 함께 브렌트 블렌드, 런던브렌트 등의 상품을 구성하기도 한다. WTI가 주로 미국시장의 지표인데 반해, 브렌트 유가를 기준으로 가격을 정하는 원유가 세계 원유의 3분의 2에 이른다.
브렌트라는 이름은 브룸, 라녹, 에티브, 네스, 타버트 등 북해 유전의 5개 지층 머릿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바다 밑 유전에서 기름을 뽑아내는데, 생산원가는 나라마다 다르다. 2014년 영국에선 1배럴을 생산하려면 39달러가 들었는데 노르웨이의 생산단가는 13달러대, 덴마크는 12달러대였다. 유가가 떨어질 때 각국의 손실 규모도 다르다는 얘기다.
브렌트유 가격은 2010년까지만 해도 WTI나 OPEC 바스켓 가격을 조금 웃도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해 10월부터 WTI와 가격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브렌트유가 배럴당 103달러일 때 WTI는 85달러였다. 당시 미국 시장엔 캐나다의 모래층에서 뽑아낸 타르오일이 대거 수입되고 있었다. 반면에 유럽에선 이집트·리비아 등의 ‘아랍의 봄’으로 긴장이 높아지면서 유가가 급등했다.
다만 미국 내 유가도 내륙이나 해안이냐에 따라 브렌트에 동조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내륙에서 사고 팔리는 WTI는 브렌트 가격의 영향을 덜 받는 반면, 해안 석유들은 유럽 가격을 좀 더 많이 따라가는 편이다. 미국 해안의 트레이더들이 내륙에 석유를 팔면서 브렌트 가격과의 연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OPEC의 석유바구니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유는 걸프 석유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며, 오만 원유도 역내 시장에 영향이 큰 편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해 가격이 공시되지 않고 시차가 있다. 중동 석유가격을 가늠케 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OPEC 바스켓(ORB)이다. OPEC 회원국들의 주요 유종들 가운데 몇몇을 골라 만든 가격지수다. ‘OPEC 블렌드’라는 유종이 별도로 있긴 하지만, 바스켓은 회원국들이 공시한 유가로 만든 벤치마크용 지수일뿐이며 이 가격으로 원유를 사고파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스켓 가격을 바탕으로 OPEC이 증산-감산을 조절한다.
27일 OPEC 웹사이트에 따르면 현재 ‘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유종은 알제리의 사하라블렌드, 앙골라의 지라솔, 이란의 이란헤비, 이라크의 바스라라이트, 나이지리아 보니라이트, UAE의 무르반, 베네수엘라 메레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랍라이트 등 12종이다. 이 석유들의 가격에 가중치를 준 뒤 평균을 내 ORB를 표시한다.
‘우랄스’의 진짜 가격은
우랄스는 OPEC 바스켓처럼 러시아가 수출하는 석유들의 가격을 바탕으로 만든 지수다. 우랄 유전의 무겁고 황 함도가 높은 원유와 서시베리아 볼가 유전의 가벼운 원유를 섞어 산정한다. 우랄스는 러시아의 에너지 동맥인 드루즈바 송유관과 바쿠-노보로시스크 송유관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다. 우랄스 가격은 러시아와 사우디의 시장 쟁탈전이 한창이던 이달 초 배럴당 16달러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WTI가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했던 20일에는 24달러대를 유지하면서 브렌트유보다도 높아졌다.
하지만 유가 충격은 우랄스를 우회해 러시아를 강타했다. WTI와 브렌트유가가 추락하자 루블화 환율이 요동을 친 것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우랄스가 배럴당 25달러 아래로 내려가면 보유한 외화를 시장에 푼다. 이번에도 그렇게 했지만 하루 만에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는 3% 이상 떨어졌다. 모스크바타임스는 “WTI 추락은 미국인들의 일인데 루블화가 타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불투명성이다. 러시아 재무부와 민간정보회사 레핀티프, 아르구스미디어 등이 가격을 공개하는데 액수가 제각각이다. 우랄스의 ‘공식’ 가격은 22일 배럴당 17달러로 떨어진 게 일주일 새 최저치였다. 하지만 현지언론 베데모스티는 레핀티프 공시 가격으로 배럴당 8달러대로까지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경제가 파산지경에 이르렀던 1998년 이래 최저였다.
중국도 다칭, 셩리 등의 원유를 생산하지만 대부분 중국 내에서 소비한다. 2015년부터 거래되기 시작한 셩리의 가격은 올초만 해도 70달러를 웃돌았으나 지금은 20달러대로 떨어졌다. 중국과 아시아국가들의 영유권 다툼이 치열한 남중국해 석유도 비슷한 가격으로 팔리다가 지금은 배럴당 11~12달러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로나19 봉쇄에서 풀려난 중국에서 석유 수요가 늘어나는 신호들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22일 유가가 반짝 반등하기도 했다. 신문은 “투자자들은 파산·실업 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하며 아직 지켜보는 중”이라며 “앞으로의 유가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달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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