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텍사스유(WTI) 5월 인도분이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하더니, 국제유가가 연일 바닥 모를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나이지리아 등 주요 산유국들 모두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코로나19와 초저유가의 결합은 세계의 에너지지정학을 ‘승자 없는 싸움’으로 끌고 가고 있다.
“초저유가 몇 주간 계속”
20일(현지시간) WTI가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배럴당 -37달러라는 초유의 가격을 찍었을 때만 해도 6월 인도분은 20달러대에 거래됐다. 10월부터는 30달러대로 올라갈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6월물 가격이 22일 곧바로 반토막나 11달러대가 됐다가 이튿날 소폭 반등했다. 22일 영국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는 6월물 브렌트유가 한때 15달러대로 추락했다.
코로나19 확산 속에 각국의 제조업 생산이 크게 줄어, 초저유가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투자회사 골드만삭스의 원자재부문 책임자 제프리 커리는 21일 CNBC에 나와 “미국 유가가 회복되려면 몇 주는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산업 특성상 유가가 추락해도 석유회사들은 당장 생산물량을 줄일 수 없다. 시설 가동을 멈췄다가는 유정 자체가 막힐 위험이 크고, 기업 입장에선 마진 없이 상품을 넘기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다.
뽑아낸 원유를 저장하는 데에도 물론 비용이 들어간다. 이 비용조차 기업들이 충당하지 못하게 되면 유정을 닫는 수밖에 없다. 휴스턴크로니클은 텍사스의 석유·가스 투자자들이 ‘결국 유정 폐쇄까지 가지 않겠느냐’는 예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유조선에 실려 미국 해안을 떠도는 ‘바다 위의 석유’만 해도 1억6000만배럴에 이른다. 한 주 만에 두 배로 늘었다. 텍사스 석유회사 EPP는 이미 생산물량을 줄이기 위한 시설개조를 시작했다.
러시아, 올 물량 절반 ‘선적 취소’
올들어 유가 떨어뜨리기 ‘치킨게임’을 벌인 러시아와 사우디는 유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제 발등을 찍은 격이 됐다. 경제잡지 포브스는 세계의 주요 석유수출국들이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썼다. 영국 BBC는 산유국들에 석유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4월과 5월 사우디로부터 들여가기로 했던 유조선 10척 분량의 석유 선적을 취소했다. 러시아도 상황은 비슷하다. 사우디와 증산 경쟁을 벌일 때만 해도 124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러시아 국부펀드는 유가가 배럴당 25~30달러만 되면 문제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올해 예정된 석유 수출물량 절반의 선적이 취소됐다. 석유부문 노동자는 100만명 정도로 러시아 일자리의 1.5%를 차지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4월 시장보고서에서 유럽국들과 인도도 석유 인수를 보류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이 6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봤다.
걸프국들 ‘재정위기’ 코앞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쿠웨이트 등 걸프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지 못하면 국가경제와 사회시스템이 운영되지 않는다. 이라크는 국내총생산(GDP)의 65%, 쿠웨이트는 60%, 사우디는 50%가 석유에서 나온다. UAE와 러시아는 GDP의 30%, 노르웨이는 20%, 카자흐스탄과 캐나다·나이지리아는 10% 정도를 석유에 의존한다.
신용평가회사 피치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91달러, 오만은 82달러, 아부다비(UAE)는 65달러, 이라크는 60달러, 카타르는 55달러가 돼야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이란의 경우는 배럴당 195달러는 돼야 재정수지가 맞는다. 나이지리아는 배럴당 144달러, 알제리는 109달러, 리비아는 100달러가 균형선이다. 러시아는 42달러, 미국은 48달러, 캐나다는 60달러대가 돼야 경제가 돌아간다. 부국 노르웨이조차 브렌트유 값이 27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
알자지라방송에 따르면 사우디는 러시아와 맞붙기 전 이미 정부기관들에 예산 30% 감축을 지시했다.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찬 ‘비전 2030’ 프로젝트들을 일부 중단시키고, 재정지출을 더욱 줄일 것으로 보인다. 덩치 큰 사우디는 유가 충격이 와도 50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동원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미국 컨설팅회사 어퀴티리서치는 평가했다. 카타르, UAE도 비축해둔 돈을 쿠션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저유가가 길어지면 왕정의 ‘시혜성’ 복지정책에 의존해온 걸프국들의 사회적 불안이 커질 수 있다. 국부펀드조차 없는 이라크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 베네수엘라는 정부가 식료품과 보조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 미국 RBC캐피털의 분석가 헬리마 크로프트는 마켓워치에 “산유국들이 ‘위기모드’에 들어갔지만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 일자리 6%가 석유부문
이미 2200만명이 ‘코로나19 실업’을 당한 미국의 최대 걱정은 일자리다. 석유·가스산업 고용인원은 1000만명으로 미국 내 일자리의 6%에 해당한다. 뉴아메리칸에너지의 투자분석가 니콜라우스 롤더는 포브스에 “석유업계 종사자의 평균임금은 미국의 중산층 가운데 상위 소득에 해당된다”며 석유업계의 위기가 실업난과 소비침체를 크게 악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멕시코는 애꿎은 희생양이다. 러-사우디 치킨게임 때 멕시코 국영석유회사 페멕스는 시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올해 안에 시추공 수를 두 배로 늘릴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곧바로 저유가가 들이닥쳤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21일 재정 긴축 계획을 발표했다. 다만 “공공부문 일자리는 줄이지 않겠다”고 했다. 마켓워치는 전문가 분석을 인용해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이란의 고통이 크겠지만 멕시코와 브라질도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경제엔진인 나이지리아는 올해 3.4% 경제성장률이 예상됐으나 기름값과 함께 성장률도 제로(0)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팔리지 않은 원유가 다음달 말까지 5000만배럴 쌓일 것이고, 실업률은 연내 25%에 이를 것으로 우려된다. IEA는 나이지리아, 이라크, 에콰도르의 경우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국가 수입이 절반으로 줄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석유 수입의 5분의1을 중국이 차지한다. 기름값이 떨어진 게 중국에 이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 경제 최대의 적은 세계의 경기침체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중국 경제의 회복이 저유가·침체와 맞물려 늦어질 수 있다고 BBC는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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