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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머스크, 폭스뉴스, 트럼프…말라리아약은 어떻게 코로나19 치료제가 됐나

딸기21 2020. 5. 20.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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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워싱턴의 하트상원빌딩에서 공화당 상원의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라리아 치료제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코로나19 ‘예방약’으로 먹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을 비판한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아픈 여자’라고 비난했다.  워싱턴 EPA연합뉴스

 

코로나19 ‘세계 최대 감염국’ 미국에서는 말라리아약 하이드록시클로로퀸(HCQ)을 둘러싼 소모전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유명 대학의 이름을 도용한 근거없는 논문, 소셜미디어의 소문을 증폭시킨 기업인, 이를 띄운 우파 언론, 비판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가 합쳐지면서 이 약이 이슈가 돼버린 것이다.

 

FDA를 ‘적’이라 부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HCQ를 재차 옹호하면서, 이 약을 코로나19 치료에 쓰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는 미 보건당국의 경고마저 ‘적들의 공격’으로 몰아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공화당 상원들과 오찬하면서 “이 약에 우호적인 의사들에게 물어보라. 이 약 없이는 직장에 나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HCQ를 복용하고 있다고 밝혔고, 백악관 주치의 션 콘리도 이를 확인했다. 콘리는 “대통령은 아주 건강하지만, 백악관에서 확진자가 나온 상황이어서 대통령과 나는 수많은 토론 끝에 (복용하는 것이) 상대적 부작용보다는 잠재적 이익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미국 대통령 주치의 션 콘리가 18일(현지시간) 백악관 언론담당관실에 보낸 메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말라리아 치료제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복용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워싱턴 AP연합뉴스

 

트럼프는 상원의원 오찬 발언 뒤 기자들이 “대통령은 의사가 아닌데 이 약을 권유하는 게 옳다고 보나”라고 묻자 “내가 직업적 의료인들보다 잘 알 수도 있다”며 억지를 부렸다. “(기자들이) 나쁜 조사결과 하나만 보는데, 그들(의료인들)은 사람들에게 나쁜 정보만 준다”고 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HCQ를 코로나19에 함부로 적용했다가 심각한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트럼프 적들의 성명(Trump enemy statement)”이라 부르면서 의료전문가들을 “아주 늙고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머스크와 폭스뉴스,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이 HCQ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3월 중순부터다. 출발점은 소셜미디어였고,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이를 증폭시켰다. 머스크는 3월 16일 말라리아약이 코로나19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며 그레고리 리가노 등이 구글문서로 쓴 글을 링크했다. 몇 시간 뒤 우파 언론 폭스뉴스가 HCQ를 처음 언급했다. 그날 저녁 리가노는 폭스뉴스에 출연해 “HCQ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리가노는 의사가 아닌 변호사다. 그는 스탠포드의대의 자문을 받았다고 했지만 스탠포드대는 공식 부인했다. 머스크가 링크한 리가노 등의 글은 구글문서에서 사라졌다.

 

3월 17일 디디에 라우라는 프랑스 의사가 “HCQ와 항생제 아지트로마이신을 함께 쓰니 코로나19 치료효과가 있었다”는 글을 국제항생제저널에 실었다. 미국 코로나19 방역책임자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장은 폭스뉴스에 나와 “신중해야 한다, (프랑스 측) 논문은 조율된 연구결과가 아니며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논문을 실은 저널 측도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코로나19 치료에 ‘게임 체인저(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글.

 

그럼에도 근거가 취약한 HCQ 옹호론은 트럼프 대통령과 정치적 후원자들을 통해 본격 확산되기 시작했다. 3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은 “클로로퀸과 HCQ는 말라리아 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끔찍한 (코로나)바이러스에도 잘 듣는다”며 이 약을 첫 거론했다. 이틀 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HCQ와 아지트로마이신이 코로나19의 ‘게임체인저(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오라클 회장이고 올 대선 트럼프 캠프 주요 후원자들 중 한 명인 래리 엘리슨도 나섰다. 3월 25일 엘리슨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클로로퀸과 HCQ을 코로나19 처방에 활용하도록 정부 시스템을 만들라”며 오라클이 파트너가 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곧이어 폭스뉴스에 자주 출연해 ‘닥터 오즈’라 불리는 의사 겸 방송인 메메트 오즈가 트럼프 대통령 보좌관들과 접촉한 사실이 뉴욕타임스 보도로 알려졌다.

 

대통령 약 복용 동의해준 주치의

 

플라쿠에닐 등의 상품명으로 팔리는 HCQ는 말라리아에 널리 쓰이지만 자가면역질환인 류머티스성 관절염이나 루푸스병 등의 치료제로도 처방된다. 1955년 FDA 의약품 승인을 받았고 미국에서 연간 500만건씩 처방된다. 한달치 약값이 미국에서는 25달러 정도, 개도국에서는 5달러 미만인 저렴한 약이며 WHO 필수의약품 목록에도 올라가 있다. 다만 메스꺼움과 구토, 안질환 등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FDA는 이 약을 코로나19 치료제로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치료효과를 시험할 수 있도록 4월 7일 긴급사용승인(EUA)을 내줬다. 아지트로마이신을 비롯한 다른 약들과 함께 코로나19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2014년 훈장을 받는 션 콘리. 콘리는 2018년 3월부터 백악관의 대통령 주치의가 됐다. 사진 military.wikia.org

 

그러나 코로나19 감염자도 아닌 사람이 약을 먹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이 HCQ을 복용하며 스스로를 ‘임상시험’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조언자는 주치의 콘리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콘리에게 이 약을 먹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원한다면 먹으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밝혔다. 주치의 스스로 “대통령은 건강한 상태”라면서 허가받지 않은 약을 코로나19 ‘예방용’으로 복용하도록 했다는 것은 논란거리다.

 

군의관 출신인 콘리는 의학분야 경력이 길다고 볼 수는 없으며 감염병 전문가도 아니다. 필라델피아 의대를 나왔고 2013년 포츠머스 해군의료센터 응급의료프로그램을 수료했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주둔군 군의관으로 일하며 트라우마 치료를 담당했다. 아프간 복무 중 무장세력들이 많이 쓰는 급조폭발물(IED) 공격에 다쳐 훈장을 받은 경력이 있다.

 

미국의 대통령 주치의는 ‘백악관 군의료책임국’ 산하 백악관의료팀 팀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군의관 중에서 대통령이 뽑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인 2006년 이래로 해군장성 로니 잭슨이 대통령 주치의를 계속해왔으나 2018년 3월 보훈처장으로 영전했다. 잭슨은 트럼프 대통령이 “훌륭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다. 그 후임으로 콘리가 임명됐지만 잭슨이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건강과 관련해 백악관에 훈수를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HCQ 때문에 장관 바뀐 브라질

 

HCQ 논란은 미국 코로나19 대응에 혼선을 불렀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로도 확산되고 있다.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HCQ를 무턱대고 옹호하면서, 브라질에서는 방역이 급한 판에 보건장관이 두 번이나 경질됐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보건당국과 방역에 투입된 의료진들에 HCQ 처방을 늘리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브라질리아의 알보라다 대통령궁 앞에서 마스크를 쓰고 지지자들을 만나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코로나19 치료제로 쓰는 것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 달 새 보건장관을 두 번 경질했다. 브라질리아 AP연합뉴스

 

제네릭약품(카피약) 생산대국인 인도는 미국과 아프리카에 HCQ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 내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이코노믹타임스는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약을 외국에 보내는 것을 전문가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위스 제약회사는 노바티스는 지난달 스위스 당국에 HCQ 1억3000만회 복용분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달 23일 유럽의약국(EMA)은 코로나19에 이 약을 처방할 경우 “심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유럽국들은 사용을 권장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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