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에 군 헬기가 떴다. 국방부의 주방위군 ‘파병’ 요구를 여러 주들이 거부했다. 뉴욕에선 병력 동원을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일주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시위대와의 전쟁’은 또 다른 갈등을 부르고 있다.
마틴 뎀프시 전 미군 합참의장은 2일 트위터에 “미국은 전쟁터가 아니고 우리의 적은 시민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몇몇 예비역 장성들도 잇달아 시위대를 국가의 적처럼 몰아가는 트럼프 정부를 향해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전날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는 복수의 헬기가 워싱턴 상공에 떴고, 그 중 최소 한 대는 미군 마크가 찍혀 있었으며 블랙호크로 보인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블랙호크는 미군 지상작전에 많이 쓰이는 헬기다.
더힐 등은 이날 헬기가 떴고 라코타 기종이나 블랙호크 기종으로 추정된다고 썼지만, 블랙호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국방부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밀리터리닷컴은 의료용 수송기로 쓰이던 라코타와 블랙호크가 동원됐다고 보도했다.
워싱턴에 헬기가 뜬 날 트럼프는 교회에 가서 “미국을 지키겠다”며 사진을 찍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도 동행했다. 군 수뇌부마저 대선을 앞둔 대통령의 정치쇼를 거들자 비판이 고조됐다. 에스퍼 국방장관은 “전쟁터를 장악할 필요가 있다”며 자국민을 ‘적’으로 몰아가는 발언을 해 비난이 빗발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밀리 합참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수행하면서 군 작전 때 입는 위장복을 입고 나와 더욱 거센 비판이 일었다.
워싱턴에는 시위를 막기 위해 이미 1300명 넘는 주방위군이 투입됐으며 1500명이 더 투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등 민주당 소속 주지사들이 있는 주들은 워싱턴에 주방위군을 보내달라는 국방부 요청을 거부했다. 국방부는 “뉴욕 주방위군의 워싱턴 이동을 뉴욕주지사가 승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장 자신들의 주에 주방위군이 필요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백악관의 거친 수사가 소요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코로나19 대응에서 한 목소리로 트럼프 정부를 비판했던 민주당의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와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 사이에 이견이 생긴 것이다. 쿠오모 주지사는 2일 기자회견에서 “시장이 사태를 과소평가했다”며 주방위군 투입을 제안했는데 더블라지오 시장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반면 더블라지오 시장은 주방위군을 뉴욕시에 투입할 필요가 없다면서 ‘외부의 군대’라고 지칭했다. 경찰력만으로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전역에서 시위 진압에 동원된 주방위군은 약 2만명이다. 이라크, 시리아, 아프간에 나가 있는 미군 규모와 거의 비슷하다고 CNN은 보도했다.
논란의 핵심이 된 주방위군(National Guard)은 미국 연방제도의 역사가 만들어낸 독특한 예비군 병력이다. 상설군을 제외하고 미국법상 합법인 ‘군사조직’은 2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주방위군이고 또 하나는 해군 주방위군 격인 ‘해군 민병대(Naval militia)’다. 17세기 영국 이주민 정착지역과 프랑스 출신 정착지역 등에서 민병대를 조직한 것이 주방위군의 시초이고, 1824년 뉴욕에서 ‘내셔널 가드’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정식 부대가 창설됐다. 현재 주방위군은 미국 50개주와 수도 워싱턴, 괌, 버진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 4곳을 합쳐 총 54개가 있으며 전체 규모는 45만명에 이른다.
주방위군은 평소에는 직장생활을 하며 일반인과 똑같이 지내다가 필요한 경우에 동원된다. 이번엔 시위 진압에 나섰지만 미국이 2000년대 대테러전을 벌일 때에는 아프간·이라크전에도 투입됐다. 원래는 주지사의 통제를 받는 지역 군대 성격이었지만 1986년 연방법이 개정돼 주지사들이 주방위군의 해외 파병을 거부할 수 없게 됐다. 조지 W 부시 정부 때인 2007년의 국방수권법은 연방정부가 주지사의 동의 없이도 주방위군들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이론적으로는 시위 투입이나 워싱턴 이동에 주지사들이 반대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동원을 강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위대와의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지지보다는 비판 여론이 높다. 군 내에서도 시위대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현역군과 예비군 40% 이상이 유색인종”이라며 이들이 진압명령에 당혹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흑인 현역 공군이 트위터에 “내가 조지 플로이드다”라는 글을 올리며 경찰의 흑인 살해를 비판하기도 했다. 2일 공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4%가 이번 시위에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시위 대처에 대해서는 33%만 ‘적절하다’고 했고 55%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방위군뿐 아니라 연방군 투입까지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1일 백악관 로즈가든 기자회견에서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에 필요한 조치를 거부하는 주와 시에는 내가 미국 군대를 보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폭동법’에 근거해 1992년 로스앤젤레스 소요 때 연방군이 투입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주방위군이 아닌 ‘현역군(연방군)’을 투입하면 진짜 국민과의 전쟁을 벌이는 셈이 된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이튿날 공영라디오방송(NPR) 인터뷰에서 “미군이 시위 진압에 불려나올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의 잭 리드 상원의원도 대통령의 발언이 무책임하다며 “폭동법을 무모하게 끌어들여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의 시위는 다소 잦아들었고, 2일 이후 대도시들의 폭력·약탈도 줄어드는 분위기라고 AP통신 등은 전했다. 그러나 4일부터 미니애폴리스 등지에서 플로이드 추모행사가 이어질 예정이고 9일에는 플로이드의 고향인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장례식이 열리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시위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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