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독일 주둔 미군을 대거 감축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을 압박하려는 트럼프 정부의 방침에 독일 측은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미국 내에서 오히려 반발이 나오는 상황이다.
로이터통신은 9일(현지시간) 독일 주둔 미군을 감축하라는 지시가 미 국방부에는 전달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도했다. 앞서 5일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트럼프 정부가 “독일 내 미군 규모의 상한선을 2만5000명으로 정하고, 현재 3만4500명인 미군 병력을 9월까지 9500명 줄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측근’ 마크 밀리 합참의장과 이 문제를 논의한 뒤 이런 방침을 담은 메모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보도들을 보면 국방부와 긴밀히 의논하지 않은 채 백악관이 ‘주둔군 감축’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추측된다.
메르켈에 통보도 없이…트럼프, ‘주독 미군’ 감축 지시
미군 규모에 2만5000명 ‘상한선’
독일 내 미군 수는 유럽 전역 미군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독일 정부에 따르면 2006년 7만2400명에서 2018년 3만3250명으로 줄었다가 지난해 8월 3만8600명으로 다소 늘었고, 올들어서는 현재 3만4500명 수준이다. 하지만 유럽 다른 곳의 미군이 이동해오면 5만2000명까지 주둔할 때도 있다.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독일은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미군이 많이 있는 나라”다.
독일의 미군기지들은 대개 1945~1955년 연합군 점령기에 설치됐다. 1949년 ‘점령법’에 따라 서독이 세워진 뒤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머물렀다. 점령기간이 끝나자 점령법의 군사 관련 조항 상당수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협정으로 이관됐다. 1954년 서독과 나토가 ‘외국군 주둔 협정’을 체결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미군 주둔의 국제법적 근거다. 한때는 미군이 최대 40만명까지 주둔했지만 냉전이 끝나고 독일이 통일된 뒤 1990년대에 크게 줄었다. 냉전 시절 200개가 넘던 미군기지 중 지금은 37개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독일은 미군 운용에 빼놓을 수 없는 ‘기지국가’다.
독일 남서부 슈튜트가르트에는 유럽 전역 미군을 관리하는 유럽사령부(EUCOM) 본부가 있다. 아프리카사령부(AFRICOM) 본부도 같이 있다. 유럽 내 미군 주요 기지(garrison) 7곳 중 하나는 벨기에, 하나는 이탈리아에 있고 나머지 5개는 독일에 있다. 슈투트가르트의 유럽사령부와 미 해병대 유럽본부 병력이 4600명 정도다. 미 육군 바바리아 기지에 약 1만명, 라인란트-팔츠 기지에 7000여명, 안스바흐 기지에 4400여명이 있다. 프랑크푸르트 외곽 비스바덴에는 미 육군 유럽본부가 있어 2100여명이 주둔 중이다.
미 공군기지는 람슈타인과 슈팡달렘에 있는데 병력이 1만명에 가깝다.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 직원과 군·직원 가족들도 체류하기 때문에 큰 기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며, “람슈타인 기지의 쇼핑몰에서는 달러만 받는다”고 도이체벨레는 적었다. 미군기지가 아닌 독일군 기지에도 미군 무기가 배치돼 있다. 20개 이상의 미국 핵무기가 뷔헬 독일공군기지 등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내에서 핵무기의 존재를 두고 끊임없이 비판이 제기돼왔다.
트럼프 정부가 구체적으로 독일 어느 기지의 부대를 빼낼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슈팡달렘의 F16 비행대가 철수 대상으로 거론된다. 30대 가까운 F16 전투기를 보유한 이 부대가 철수하면 내년 가을 영국에 미군 F35 비행대가 배치되기 전까지 “적의 방공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미군 부대가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미군 매체 스타스&스트라이프스는 분석했다.
[뉴스 깊이보기]“터키 미군기지에 핵무기 있다” 트럼프 발언 또 논란
G7 참석 거부한 메르켈 ‘괘씸죄’?
독일이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비로 쓴다는 나토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된 레퍼토리다. 그러나 미군을 줄이겠다는 결정에 불을 당긴 것은 올해 미국에서 열리는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메르켈 총리가 불참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메르켈 정부가 미국의 반대에도 러시아에서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노르드스트림2’ 가스관 개통을 강행하려 하는 것도 한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을 줄임으로써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흔들려 하지만, 미군 감축은 독일 좌파 야당들이 줄곧 요구해온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러·중 470조원짜리 가스관…‘시베리아의 힘’과 푸틴의 가스 정치학
미국 안보전문가들과 우파들은 트럼프 정부가 독일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포린폴리시는 9일 “독일이 방위비를 적게 낸다며 미군 철수로 ‘벌을 주는’ 것은 전형적인 트럼피즘(트럼프주의)”이라며 “독일의 미군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 파병된 것이지 독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독일의 미군 병력과 시설은 독일이나 유럽이 아니라 중동,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여러 곳의 작전에 쓰인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공격에 사용된 병력과 무기·물자 대부분이 람슈타인 기지에서 출발했다. 독일 기지의 미군은 미국 네바다주의 공군기지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드론 작전을 벌인다. 유럽 전역 미군들도 독일의 기지에서 훈련을 한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은 독일 란트슈툴의 기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미국은 바일러바흐에 9억9000만달러를 들여 병실 5000개의 병원을 새로 짓고 있다.
포린폴리시는 독일 자체가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의 중요한 동맹임을 트럼프 정부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냉전이 끝나고 옛소련이 해체될 때 발트 국가 리투아니아에 군대를 보내 독립 과정을 도왔다. 독일 해군은 발트해에서 벌이는 나토 군사작전의 주축이다.
폴란드로 미군 옮기려면 돈 더 들 것
트럼프 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리처드 그리넬 전 주독 미국대사는 줄곧 미군 감축을 주장하면서 “독일은 국방예산을 늘리려는 계획도 안 내놓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2014년 나토 정상회의 때 이미 독일은 국방비를 늘리겠다고 했고, 지난해 국방장관이 “2031년까지 GDP 2% 기준을 맞출 것”이라 약속했다. 지난해 독일은 GDP의 1.36%를 방위비로 썼다. 전년대비 56억달러를 늘린 것이었다. 독일 언론들은 ‘냉전이 끝난 이래 최대 규모의 군비확대’라고 했다. 독일 정부는 미국의 압박이 계속되자 “2012년 이후 미군기지들을 지원하는 데에만 2억4300만유로를 썼다”고 지난해 8월 공개했다.
독일을 떠난 미군은 폴란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 언론들은 내다봤다. 폴란드 우파 정권은 내년까지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끊고 국방예산을 GDP의 2%로 맞추겠다며 미국에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폴란드에 새 미군기지를 지으려면 돈도 더 들고 정치적 부담도 커진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뒤 미국·유럽과 대립이 심해졌는데 미국이 폴란드에 기지를 만들면 적대가 더 깊어질 게 뻔하다. 폴란드 기지의 미군은 독일에 있을 때보다 경계태세를 더 높여야 할 것이고, 정치적·재정적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정부는 한국과 일본에도 방위비를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두 나라는 세계에서 미군 주둔비용이 가장 싼 곳”이라며 백악관의 이번 결정이 한국과 일본에 미칠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화당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하원 군사위 소속 공화당 의원 22명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군 감축을 우려하는’ 서한을 보냈다. 민주당 의원들은 동맹 관계와 국가안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정부의 미군 감축 방침이 예정대로 시행될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시리아에서 철군한다고 했다가 터키군이 시리아 쿠르드 지역을 침공하고 세계의 비판이 고조되자 사실상 철회했다.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 군사원조 10억달러를 감축하겠다고 했던 것도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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