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플로이드 사망에 '인종차별 반대' 목소리 내는 아프리카

딸기21 2020. 6. 1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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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 필로니스가 17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긴급회의에서 화상 발언을 하고 있다.  제네바 AFP연합뉴스

 

백인 경찰의 폭력에 숨진 미국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 필로니스가 유엔에 미국 경찰의 인종차별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필로니스는 17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인권이사회 긴급회의에서 화상 증언을 하며 “형이 숨지던 모습이 미국에서 경찰이 흑인을 다루는 방식”이라며 경찰의 흑인 살해와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조사할 독립적인 위원회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인권이사회의 안건으로 부각시킨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이었다.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플로이드가 숨지고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아프리카연합(AU)의 무사 파키 마하마트 의장은 29일 성명을 내고 인종주의 철폐를 촉구했다.

 

파키 의장은 성명에서 AU의 전신인 아프리카연합기구(OAU)의 1964년 결의안을 언급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영웅으로 지금도 추앙받는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 대통령 주도로 1963년 만들어진 이 기구는 이듬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첫 정상회의를 열고 인종차별 반대 결의를 채택했다. 미국의 흑인 차별을 비판하면서 파키 의장은 아프리카의 독립 역사와 회원국들의 연대를 상기시킨 것이다.

 

이어 지난 12일 54개 회원국을 대표해 아프리카 북서부의 내륙국인 부르키나파소 대사가 인권이사회에 서한을 보냈다. 서한은 “세계에서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이들이 늘 겪는 불의와 야만성”을 거론하며 “인종과 관련된 인권 침해, 구조적인 인종주의,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야만적 행위,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 사용을 시급히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권이사회는 긴급회의 소집 요구에 이사국 중 단 한 나라만 동의해도 회의를 열어야 한다. 이번엔 다수의 찬성으로 긴급회의가 열렸다고 AFP통신 등은 전했다.

 

17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인권이사회 긴급회의에 앞서 참석자들이 인종차별에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며 묵념을 하고 있다.  제네바 AFP연합뉴스

 

미국은 그동안 인권이사회가 미얀마, 베네수엘라 등의 인권탄압을 조사하는 것을 지지해왔다. 만일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면 미국이 그간 지탄해온 ‘인권탄압국’들과 함께 유엔 조사대상국이 되는 셈이다. 조사위가 만들어질지는 알 수 없다. 유엔은 출범 초기부터 인권선언과 인권 관련 협약들을 채택했으나 다른 이사회들과 대등한 인권이사회가 만들어진 것은 2006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후 14년 동안 인권이사회는 31개 사건에 대해 조사위를 만들고 조사단을 파견했는데, 서방 국가에 대한 조사는 한 건도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8년 아예 인권이사회를 탈퇴했다. 인권이사회 긴급회의에 대해 앤드루 브렘버그 제네바 주재 미국대사는 성명에서 “미국에 인종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경찰개혁 나서는 등 우리는 투명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에서 미국의 흑인 인권문제가 공식 제기된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을 문제삼으며 위구르인권법에 서명했다.

 

인권이사회의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이 미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키우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간 쌓여온 미국의 위선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일 수 있다. 미국 외교관계협회(CFR)의 젠다이 프레이저는 16일 웹사이트 글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미국이 세계 인권의 파수꾼이라는 도덕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아프리카가 표현의 자유와 평화시위 같은 기본권을 억압한다고 설교를 늘어놨던 미국의 위선에 대한 반발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프레토리아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지난 8일(현지시간) 야당인 ‘경제자유를 위한 투사들(EFF)’ 지지자들이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앞서 남아공 경찰에 의해 숨진 콜린스 코사라는 남성의 사망에 항의하며 케이프타운 등 주요 도시들에서 경찰 폭력을 비판하는 시위도 진행해왔다.  프리토리아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나아가 서방의 위선에 대한 아프리카의 반감은 오랫동안 쌓여왔다. 일례로 반인도범죄를 처벌하는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경우 2002년 출범 이래 지금까지 아프리카인들만 기소됐다. ICC 회원국이 123개국인데 미국은 가입도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출신이 미국에서 피부색 때문에 경찰 폭력에 희생된 적도 있었다. 1999년 기니 출신 유학생 아마두 디알로가 뉴욕에서 경찰에 사살됐다. 디알로는 총탄을 41발이나 맞았다. 2009년에는 아이오와에서 수단 난민이, 2016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우간다 출신 이민자가 경찰에 사살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플로이드 사건에 관심을 갖는 데에는 자국민의 안전이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부의 움직임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항의시위다. 플로이드가 숨진 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가나 등 아프리카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인권탄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근래 남아공, 우간다, 케냐, 나미비아 등에서는 경찰이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콜린스 코사라는 남성이 지난 4월 경찰에 구타당해 숨졌다.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던 시위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며 미국을 비판하는 시위와 결합됐다. 아프리카의 언론과 학자들은 미국 트럼프 정부가 자국민 시위대를 대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동시에, 아프리카 국가들 정부에도 평화시위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17일(현지시간)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 긴급회의 참석자들에게 화상 발언을 하고 있다.  제네바 신화연합뉴스

 

오랜 세월 백인정권이 흑인을 탄압한 남아공의 경우 명목상 흑인 차별은 없어졌으나 여전히 흑백 빈부격차는 심각하다. 경찰의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빈부격차 등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는 것은 미국 흑인사회에서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이례적인 ‘아프리카의 관심과 연대’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플로이드 사건이 촉발시킨 인종차별 논쟁은 오랜 인종 불평등과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과 반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칠레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인권이사회에서 “수백년 간의 인종차별을 보상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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