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바레인에 이어 최근 북아프리카의 수단 대표단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압델 파타 알부르한 통치위원회 위원장 등 수단 정부 대표들이 UAE의 아부다비에서 지난 21일(현지시간) 수단-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위한 ‘결정적인’ 협상을 했다고 미국 미디어 악시오스와 수단 SUNA통신 등이 22일 보도했다.
미국은 수단에 당근을 내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과 관계를 풀면 수단의 빚을 줄여주고 제재를 해제하는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수단은 과거 알카에다 우두머리 오사마 빈라덴이 근거지로 삼았던 나라로, 미 국무부 테러지원국 리스트에 올라 1995년부터 경제제재를 받아왔다. 이번에 아부다비를 찾아간 수단 대표 중에는 나세르-에딘 압델바리 법무장관도 포함돼 있다. 수단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자지라방송은 보도했다. 수단 측은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대가로 미국에 30억달러의 원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단에서는 지난해 4월 장기집권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가 축출되고 알부르한이 이끄는 과도정부가 구성됐다. 아직 나라가 안정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80만㎢가 넘는 국토에 석유를 비롯한 자원도 많다. 바시르 시절 석유를 팔아 개발 드라이브를 걸기도 했으나, 문제는 미국의 제재와 국제적 고립이었다. 수단의 4500만 인구는 70%의 아랍계와 30%의 아프리카계로 나뉘어 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기독교가 대립해왔다. 바시르는 아랍계가 아프리카계를 학살하고 노예화하는 것을 방조·조장해 다르푸르 학살 같은 참사를 불렀다.
세계가 독재를 비난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자 바시르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국들과 밀착하는 동시에 중국과 손을 잡았다. 1959년 아프리카에 독립국가들이 많지 않던 시절, 수단은 아프리카에서는 최초로 중국과 수교한 나라이기도 했다. 중국은 1990년대부터 수단의 에너지와 건설 등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노동력을 대거 들여보냈고, 그 이후로 중국 정부에 수단은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이 돼왔다.
아프리카에서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리비아는 유럽계 기업들이, 나이지리아는 미국·영국 기업들이 대부분 수십년 전부터 진출한 반면에 수단은 후발 산유국이어서 중국의 투자 비중이 매우 크다. 더디플로맷 기사에 따르면 중국은 2017년 기준으로 수단 석유산업의 75%를 통제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페트로차이나(CNPC) 한 회사가 수단에 투자한 돈만 10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단은 미군의 아프리카 핵심 군사기지가 있는 소국 지부티나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의 뿔’과 붙어 있어 중국에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바시르는 2018년까지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아프리카 포럼의 귀빈 중 한 명이었고, 심지어 BBC방송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대통령궁도 중국이 지어준 것이었다. 중국이 수단과 거래하는 것에 대해 서방은 “독재자를 돕는다”고 비난했으며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들은 중국이 석유를 가져가면서 수단 독재정권에 무기를 판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는 서구와 달리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의 제재 때문에 수단으로서는 중국 외에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수단의 새 정부는 미국과 화해하고 원조를 받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 관계를 푸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2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동아프리카의 우간다를 방문하자 알부르한 위원장이 찾아가 비밀 회동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수단 내에서 반발이 일자 알부르한 위원장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지지한다는 수단의 입장은 굳건하다”고 강조했으나 그 회동 뒤 곧바로 수단과 이스라엘 간 민항기 노선이 열렸다. 과도정부는 다르푸르 반군 수단혁명전선(SRF)과도 지난달 말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지난해 수개월에 걸친 시위로 독재자를 쫓아낸 이후 수단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사하라사막 끝자락에 위치한 수단은 기후변화 피해가 심한 나라다. 다르푸르 갈등도 사막화로 목초지를 잃은 아랍계 유목민들이 아프리카계 정주민들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기후위기의 사례로 보는 시각이 많다. 최근에는 홍수 때문에 50만명이 집을 잃었고 몇 주 새 물가가 급등했다. 수단 정부는 당장 국민들을 먹여살릴 돈이 필요한 처지다.
하지만 중국도 아프리카의 교두보를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연구해온 영국 학자 로라 바버는 5월 미국 국제평화연구소(USIP)에 낸 보고서에서 “중국과 수단 관계의 기본이 석유인 것은 사실이지만 10년 새 변화가 적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이 ‘바시르 이후의 수단’에 대비해왔으며 새 정부와도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계획을 추진해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바시르 정권 때부터 제안해온 일대일로 참여는 수단 새 정부에도 유효하다. 바시르를 쫓아낸 수단의 시위 와중에 대규모 파업이 벌어지고 주요 석유수출항인 포트수단과 하르툼 국제공항이 일시 마비됐으나 CNPC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중국은 또 2011년 남수단이 독립하자 이 신생국가에도 공을 들였다. 수단이 갖고 있던 대규모 유전들 중에는 현재의 남수단 땅에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남수단에는 인프라가 부족하다. 그래서 남수단의 원유를 수단이 수송해 수출하고, 수익을 나눠갖기로 독립 때 약속했다.
중국은 그 때부터 남수단을 지원해왔다. 글로벌타임스 보도를 보면, 최근 ‘중국 최초의 평화유지군’을 다룬 ‘푸른 방어선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가 공개됐다. 2015년부터 촬영했다는 남수단의 중국 평화유지군을 소개한 다큐 영화다. 아직 미개발 상태에 가까운 남수단에 중국은 평화유지군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여러 원조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17개월에 걸쳐 중국 안휘성 의료지원단이 남수단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7일 임무를 끝냈다. 17일에는 중국이 남수단에 쌀 3000톤을 보냈다. CNPC는 수단과 남수단이 공동 소유한 최대 석유회사인 그레이터나일석유회사(GNPOC)의 지분 40%를 갖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수단에서 중국의 최대 경쟁자가 이스라엘과 함께 수단에 손짓하는 UAE라는 것이다. 2017년 UAE는 수단산 원자재 17억달러 어치를 수입했다. 중국의 3배였다. 이에 맞서 중국도 수단에서 에너지뿐 아니라 최근 몇년 새 면화산업, 축산업, 금광개발 등 다방면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바버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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