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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남미에서 우익 쿠데타의 시대는 갔다"

딸기21 2020. 10. 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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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서부 도시 엘 알토에서 사회주의운동(MAS) 지지자들이 19일(현지시간) 국기를 흔들며 루이스 아르세 후보의 대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로이터

볼리비아 대선에서 좌파 후보가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14년 가까이 집권한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60)를 축출한 군부와 우파의 쿠데타 소동은 1년만에 끝나게 됐다. 이번 선거 결과는 자원 국유화와 수익의 재분배, 환경친화적 개발, 인프라 확충과 빈곤 감소 등 모랄레스 정권이 펼쳤던 정책의 승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칠레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반복돼온 ‘좌파 집권, 우파 쿠데타’라는 패턴이 더 이상 남미에서 작동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모랄레스가 이끄는 사회주의운동(MAS)의 루이스 아르세 후보는 19일(현지시간) 대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전날 실시된 대선 출구조사에서 아르세는 52~53%를 득표해 결선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지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자였던 우파 후보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은 30%대 초반 득표에 그쳤다. 메사는 아르세의 승리가 “명확하다”며 패배를 인정했고, 임시정부 대통령 자니네 아녜스도 트위터에 “승자에 축하를 보내며, 볼리비아를 통치하면서 민주주의를 마음에 새기길 부탁드린다”는 축하 글을 올렸다.

모랄레스 정부에서 두 차례 경제·재정장관을 지낸 아르세는 이번 선거에서 지난 10여년의 경제적 성과를 강조하며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하지만 출구조사가 보여주는 득표율은 선거 직전 여론조사들과 비교해도 아르세 쪽으로 훨씬 많이 쏠렸다. MAS 지지자들은 군부를 뒤에 둔 우파들에게 이번 선거를 ‘빼앗길까봐’ 투표소 주변에 식량을 쌓아놓고 농성까지 준비하며 투표소로 결집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의 입김을 받는 미주기구(OAS)가 우파와 군부의 편을 들었던 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의 반미정서를 자극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대선에서 모랄레스가 메사에 승리를 거뒀으나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나온 야권의 반발을 명분삼아 군부가 전면에 나섰고, 모랄레스는 쫓겨나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이후 미주기구는 대선 부정선거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는 보고서를 냈고 우파 임시정부는 이를 모랄레스와 MAS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았다.

볼리비아 엘알토에서 19일(현지시간) 사회주의운동(MAS) 지지자가 ‘루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루이스 아르세 후보의 선거포스터를 차창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로이터

‘루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아르세는 “국가의 단결을 위한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며 축제 분위기에 빠진 지지자들과 우파 지지자 모두에게 안정을 호소했다. 올해 57세인 아르세는 모랄레스 정부의 핵심 각료였고 이제 ‘후계자’가 됐으나 인생 경로는 많이 다르다. 원주민 코카재배농 출신인 모랄레스와 달리 아르세는 수도 라파스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중산층으로 자랐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영국 워윅대에 유학했다. 1987년 볼리비아 중앙은행에 들어간 이래로 인생 대부분을 금융·재정정책과 함께 보냈다. 대학 강의 등 학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해왔다.

모랄레스는 2006년 대통령 취임 뒤 아르세를 재정장관에 발탁했다. ‘에보노믹스’라 불리는 모랄레스 경제정책의 기획자로 아르세를 꼽는 이들도 있다. 아르세는 장관 시절 광업과 통신, 수력발전 등의 국유화 과정을 관리감독했으며 가난에 시달리는 원주민 기금을 만들고 소비재 붐을 이끌었다. 2009년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등과 일종의 지역 통화기금인 방코델수르(남부은행) 설립도 주도했다. 그가 장관이던 기간에 볼리비아의 국내총생산(GDP) 은 3.4배로 커졌고 빈곤율은 38%에서 15%로 줄었다. 아르세는 볼리비아의 사회적 경제 모델을 다룬 책들을 낸 에보노믹스의 이론가이자 선전가이기도 하다.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망명 중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원주민 전통문양이 그려진 마스크를 쓰고 있다.  로이터

2017년 아르세가 신장암을 앓자 모랄레스는 그를 사임시키고 브라질에서 치료받도록 ‘강제 요양기간’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세는 지난해 1월 다시 장관으로 복귀했다가 모랄레스가 축출되자 물러났다.

올 1월 모랄레스는 아르세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8시간 회동을 한 뒤 그를 MAS의 대선후보로 선언했다. 우파들은 선거기간 내내 ‘모랄레스의 꼭두각시’라고 아르세를 폄하했다. 그래서 아르세는 장관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면서도 모랄레스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MAS 지도부도 “에보(모랄레스)는 아르세의 정부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랄레스가 귀환하면 정치 전면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우파 임시정부는 모랄레스가 떠나 있던 1년 동안 그를 독재자로 몰아가며 정계 복귀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최고선거재판소(선관위) 수장을 갈아치우고, 모랄레스의 상원의원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음이 대선에서 드러났다. 모랄레스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인 승리”라며 “조만간 돌아갈 것”이라 못박았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트위터에 볼리비아 사회주의운동(MAS) 대선후보 루이스 아르세의 승리를 축하하는 글을 올렸다.  마두로 트위터

아르세의 승리는 남미 좌파 전체의 승리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등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일제히 모랄레스와 아르세 후보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고 텔레수르 등은 전했다.

이번 MAS의 승리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다. ‘에보의 귀환’은 군부 쿠데타라는 해묵은 우익 전술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남미의 9·11’로 불리는 1973년 칠레의 군사쿠데타는 좌파 정권을 뒤집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가, 남미 좌파 진영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후로 남미 대부분 나라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가 집권했다. 군사정권들은 1980~90년대를 거치며 대부분 무너졌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도 ‘21세기 사회주의’ 정권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우파들의 공작은 계속됐다. 올들어서도 미국의 ‘용병’이 베네수엘라 해안에 침입하려다 적발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은 흔들리지 않았고, 미국의 또 다른 숙적이던 모랄레스를 겨냥한 우파의 쿠데타극은 1년만에 막을 내렸다. 베네수엘라 좌파 학자 윌리엄 카마카로는 19일 싱크탱크 반구위원회(COHA) 웹사이트 글에서 “MAS의 결정적인 승리는 (남미) 대륙의 변곡점”이라며 “이제 원주민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쿠데타는 남미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적었다. 이번 볼리비아 대선은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우파 정부엔 압력이 될 것이며 미국도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년 2월 치러질 에콰도르 대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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