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마이클 돕스, '1945'

딸기21 2021. 1. 1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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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From World War to Cold War

마이클 돕스. 홍희범 옮김. 모던아카이브

 

정말 길고 자세하다. 너무 상세해서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잼나다. 

 


철도교차점은 작센주의 주도인 드레스덴 북서쪽에 있었다. 러시아 측 전선에서 110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떨어진 이곳에는 소련군의 진격을 피해 도망친 피난민들이 들끓었다.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한다는 목적은, 오래된 작센 주 주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순수한 군사적 고려만큼이나 중요했다.
드레스덴 공습은 얄타회담 이틀 뒤인 2월 13일 저녁에 실시됐다. 영국 공군이 먼저 오후 10시 14분에 도심부를 고폭탄 500톤과 소이탄 375톤으로 융단폭격했다. “엘베강의 피렌체”로 알려진 이 바로크 시대 도시의 심장부가 불길에 휩싸였고 철도조차장과 성당, 궁전과 주택이 모두 불탔다.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 중폭격기는 세 시간 뒤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새벽에 찾아와 한참 불을 끄느라 소방대가 분주할 때 또 다시 폭탄 1800톤을 퍼부었다. 미공군 중폭격기 527대가 2월 14일과 15일에 일을 마무리하려고 찾아와 폭탄 1247톤을 주간 ‘정밀’ 폭격으로 철도조차장에 퍼부었다.
영국 공군 폭격사령부의 사령관 아서 해리스 원수는 모든 것이 끝난 뒤 이렇게 쏘아붙였다.
“드레스덴? 그런 곳은 없소.”
(145쪽)

 


우파 육군 장성인 라데스쿠는 안토네스쿠 독재 정권하에서 구금당했다. 과거 정치범이라는 라데스쿠의 신분은 러시아인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곧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이 평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은 이제 라데스쿠가 전직 파시스트 공직자들을 추방하지 못하며 합의된 전쟁배상도 무시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1월 6일, 소련군 사령부는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17~45세 모든 남성과 18~30세 모든 여성을 강제이주시킨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들 대다수의 선조는 12~13세기에 루마니아 중서부에 있는 트란실바니아의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이주해왔지만, 스탈린은 이들을 러시아에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킬 작정이었다. 인구 목록을 손에 쥔 NKVD 부대가 부쿠레슈티를 비롯한 곳곳의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을 마치 1년 전 크림반도의 타타르계 마을에서 그랬듯 봉쇄했다.
(183쪽)


해리먼은 아직 미국에 있었으며, 조지 케넌이 대사 대리였다. 케넌은 한 영국 기자에게 왜 자신이 소련 군중과 함께 기쁨을 순수히 나누기 어려운지 털어놓았다. 러시아는 폐허가 된 나라였다. 재건은 길고 험한 여정일 터였다. 평화는 기쁨에 들뜬 군중의 부풀어오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터였다. 케년은 사람들로 가득 찬 광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죠."
이 상반된 반응은 케넌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상처받고 내성적이며 여러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인 조지 프로스트 케년은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미국 중서부 장로교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20세기보다 18세기에 더 안주했다.

1925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뒤 놀랍게도 국무부 외교국에 취직한 케넌은 그 당시 미국이 외교 관계조차 맺지 않은 소련을 전문 분야로 택했다. 모스크바로 갈 수 없던 젊은 케넌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는 감청기지에서 러시아에 대해 공부했다. 
원래 성격과 경험 모두로 인해 케넌은 비관론자였으며,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미소 관계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보낸 두 차례의 긴 임기 동안 소련이 미국에 대해 “실제로 그렇든, 잠재적으로든 잘 들어맞는 동맹국이거나 우호국이 아니”라는 자신의 원래 견해를 바꿀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과거 토크빌이 그랬듯이 현재의 사건보다는 두 떠오르는 초강대국의 역사와 문화,정치, 경제 체제, 지리, 심지어 기후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의존해 의견을 제시했다.

러시아의 팽창주의는 “광활한 평야 속 난폭한 유목민과 오랫동안 함께 지낸 정착민의 뿌리 깊은 불안감”을 반영했다.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땅덩어리를 지배해야 했기에 강력하고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나라가 필요했다. 당연히 외침을 몰아낼 강력한 군대와 내부의 불만 및 그 어떤 외국의 영향력도 억압할, 광범위하게 퍼진 경찰력도 필요했다. 이반 뇌제부터 스탈린에 이르는 러시아 지도자들은 “외국문화와 외국사상에 접촉해 계몽되느니, 국민들을 어둠 속에 남겨 두는” 쪽을 선호했다. 표트르 대제와 같은 서구화주의자들조차 다른 유럽 나라와의 접촉에 제한을 두려 했다. 
(310-311쪽)


스탈린은 다르다넬스 해협에 소련군을 주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상대와 먼 거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 외에 이를 실천할 물리적 수단이 없었다. 반면 이웃인 이란은 비교적 쉬운 상대로 보였다. 1941년 영국군이 이란 남부에 진주하자 소련군은 북부를 점령했다. 
이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서로 충돌하면서 20세기판 그레이트 게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인도로 통하는 육로가 아니라 중동의 방대한 석유 매장량이 목표였다. 미국은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를 자청하며 열린 문 Open Door 정책을 추구하려 했다. 물론 스탈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짜고 전략물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여겼다.

몰로토프의 보좌관 세르게이 카브타라체는 테헤란에 파견되어 석유와 관련된 이란의 양보를 요구하려 했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란 정부는 이란 영토에서 모든 외국 군대가 떠나야 새 협상을 할 수 있다며 버텼다.
이란의 결정은 스탈린에게 상당한 타격이었다. 석유에 대한 권리에 더해 이란 북부에 동유럽에서와 같은 완충 지대를 만들고싶었기 때문이다.

(375쪽)

민족문제인민위원장 출신인 스탈린은 국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민족 문제를 카드로 활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스탈린은 영토를 재편하고, 민족 간 마찰을 부추기며, 분리주의 운동을 악화시키거나, 말 안 듣는 민족을 강제이주시키고, 영토 수복 명분을 지어내는데 이골이 났다.
이란을 상대로 민족카드를 꺼내기는 쉬웠다. 이란 북부에는 사실상 국경 너머 소련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과 민족적 기원이 똑같은 아제르인 수백만 명이 살고 있었다. 이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제르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이란의 아제르인들에게 테헤란 중앙정부에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하도록 부추기면 되는 것이다. 남부 아제르바이잔 자치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것은 이 지역을 소련에 병합하는 첫 걸음이 될 터였다. 그리고 이란에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이 분리되면 터키와 이라크에 인접한 쿠르드족 거주 지역도 뒤따를 터였다. 7월 7일 크렘린은 남부 아제르바이잔 “분리주의 운동”을 시작하고, 소련 측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이를 통제하도록 지시했다.
(376-377쪽)


“히로시마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7시 15분에 10분의 1의 적은 구름층만 있는 양호한 시계하에 육안조준으로 폭격당했음. 적 전투기 및 방공포의 저항은 없었음 . 모든 측면에서 아주 성공적인 결과임. 그 어떤 실험보다도 장대한 시각적 효과를 목격함.”
트루먼이 전령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군!"
대통령은 펄쩍 뛰면서 식당 건너에 있는 번스에게 외쳤다. “이제 집에 갈 시간입니다!”
대통령은 해독된 전문을 힘차게 흔들면서 승조원들에게 연설했다.

대통령 명의로 된 발표문이 맨해튼 계획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도박”이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우주의 원초적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태양이 내는 힘의 원천이 극동의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7월 26일 포츠담에서 발표된 최후통첩에 명시된 완전한 파멸에서 일본 국민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 상에서 목격한 바 없는 파멸의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원자폭탄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생긴 “당혹스런 경외감"을 묘사했다. “그것은 아마 이런 발견을 가능하게 한 문명의 말살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거나 죽여야 한다."
아직 “방사능"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뉴욕타임스의 군사평론가 핸슨 볼드윈은 폭탄의 “부수적 효과”가 초기 폭발에서 살아난 생존자를 “부상당하거나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 수도 있고, 시력과 청력을 빼앗거나 질병으로 죽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어제 인류는 원자의 힘을 해방시켜 상대를 파멸시키려 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어제 우리는 태평양에서 승리를 확정지었지만, 돌풍의 씨앗도 뿌렸다." 영국 외교관 피어슨 딕슨은 그날 밤 일기의 간결한 도입부에서 당혹스런 가능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유토피아, 혹은 세계 종말의 여명."
(524-526쪽)


스탈린과 고위 측근은 트루먼의 진짜 의도에 대해 일말의 의문도 없었다. ‘영도자'는 히로시마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몰로토프도 원자폭탄이 “일본이 아니라 소련”을 겨냥했다는 주군의 생각에 공감했다. 미국인들은 사실상 “너희들은 원자폭탄이 없고, 우리는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건 너희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 얻게 될 결과다!”라고 말한 셈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맞섰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대일전 참전을 대가로 루스벨트에게서 약속받은 모든 영토적 양보를 쥐어 짜낼 작정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폭탄에 완전히 굴복하기 ‘이전’에 소련군이 만주를 정복하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527쪽)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침공 병력의 바로 뒤에 전리품 부대가 따라와 공장과 정부청사를 해체해 러시아로 실어날랐다. 연합국 배상위원회 미국 대표인 에드윈 폴리는 그 직후 현지에 도착해 만주 지역 경제에 이들이 끼친 피해가 2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일본군은 얼마나 빨리 후퇴했는지 만주국의 괴뢰 황제 푸이를 탈출시켜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푸이는 결국 소련군에 붙잡혀 러시아로 끌려갔다. 러시아 침략자들은 만주 동부를 장악한 뒤 한반도를 휩쓸면서 들어왔고 서울 바로 북쪽의 38도선에서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정지했다(그로부터 며칠 전, 미 육군 대령 두 명이 펜타곤에서 밤 늦게  내셔널지오그래픽 지의 지도를 살펴본 뒤 북위 38도선이 한반도에서 연합군 작전구역을 나누는 “편리한 경계선”이 되리라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간신히 시간 맞춰 행동할 수 있었다. 소련군이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한 지 10시간 뒤, 미국의 B-29 폭격기 한 대가 두 번째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6일 뒤인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끝났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한 세대 전체가 수많은 인명과 에너지, 그리고 이념적 정열을 소모할 새로운 형태의 국제분쟁으로 대체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이 냉전의 라이벌로 바뀌는 과정은 단 6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530-531쪽)


냉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처럼,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단일 사건은 없다. 일부는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감행한 쿠데타가 누가 뭐래도 유럽을 분명하게 두 라이벌 진영으로 나눴다고 본다. 일부는 1947년 3월 그리스와 터키에 군사원조를 제공한 트루먼의 결정을 시발점으로 본다. 전통주의적 역사학자들은 1946년 3월까지 이란 북부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스탈린이 냉전기 최초의 대립을 일으켰다고 본다. 수정주의자들은 트루먼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를 폭격함으로써 초강대국들 간의 수십 년에 걸친 대립을 촉발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대립하는 여러 역사관에 깔린 전제는, 어느 쪽 이념에 서있건 정치 지도자 한 명이 냉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외교역사가들은 정치인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어떤 전설적 인물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때로는 역사 자체가 의도를 가진 것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의 결정을 비웃으며 그 반대 방향으로 내달린다. 역사는 황태자 암살이나 사랑에 빠진 지도자, 갑작스런 날씨의 변화 같은 우연한 사건으로 엉뚱하게 변할 수 있다. 때때로 역사는 정반대의 흐름에 말려든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보면 100퍼센트 말이 되는 내부의 논리를 따른다.
냉전은 100년 이상 전에 예견되었음에도 여전히 당사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의 완벽한 사례다. 나치독일과 싸우는 동안 두 강대국은 동맹을 유지하고 서로 맞지 않는 모든 의견을 덮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공통의 적이 무너지는 순간 두 나라가 직접 맞닥뜨리면서 정치적 이념적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된다. 히틀러는, 제3제국의 패배가 “서로 대립할 수 있는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만을 남겨둘 것이다”라고 제대로 예견했다. 히틀러는 “두 나라 모두 유럽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위대한 민족인 독일인의 도움을 분명히 원하게 되리라!”고 예측했다.
(533-534쪽)


베를린의 무인지대는 처칠과 괴벨스가 일찌기 “철의 장막"이라고 표현한 그 경계선을 표시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스탈린은 사할린섬과 쿠릴열도를 소련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일본과 새로운 영토 분쟁의 서막을 연다. 한반도에서 북위 38도선은 공산주의 북한과 자본주의 남한을 나누는 아시아판 베를린 장벽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동서 대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란 북부에서 벌어졌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너무 멀리까지 진출했음을 알아챘다. 트루먼 행정부의 갑작스럽고 강력한 압박에 직면한 스탈린은 돌연 “남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이 자치공화국은 1946년 5월 소련군이 예정보다 3개월 늦게 철수한 뒤 곧바로 붕괴된다.
“냉전”이라는 표현은 1947년 미국 자산가 버나드 배룩과 평론가 월터 리프먼에 의해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흔히 쓰이는 정치적 용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용된 기원은 반공풍자소설 ‘동물농장’을 갓 집필했던 작가 조지 오웰이 1945년 10월에 쓴 에세이에서 찾을 수 있다. 오웰은 원자력 시대의 대두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전 세계를 날려버릴 능력을 가진 초강대국들 간의 대립을 경고했다. 그 결과는 “마치 고대의 노예제 제국만큼이나 끔찍하게 안정적인 새로운 시대 이며, ‘냉전’이라는 영구적 상태로 상징되는 ‘평화가 아닌 평화’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536쪽)


스탈린이 자본주의세력과 일정 기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증거도 많다. 스탈린은 선택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 양보를 어느 정도 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핵심적인 관심사만큼은 절대로 희생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 얻은 제국의 통합, 소련 체제 생존, 러시아의 절대적 지도자인 자신의 권위에 대한 모든 위협 제거 등이 그것이다. 
스탈린은 동유럽에 소련 체제를 고스란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스탈린은 위성국들이 각국의 관례에 따라 속도를 조절해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게끔 허용하는, “인민민주주의”라는 새 용어를 만들었다. 공산당은 어느 나라에서나 소수파였다. 이들은 다른 “진보” 세력과 손잡고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정권이 소련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한 일정한 수준의 자치권도 보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던 소련과 소련의 동유럽 하수인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소수파의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바르샤바부터 프라하, 부다페스트, 소피아에 이르기까지 공산당 독재만이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미국 지도층도 소련 지도층 못잖게 이념적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민주주의가 가능할 만큼 안전해야 한다”는 윌슨주의적 자세를 고집했다. 미국은 나머지 인류를 비춰줄 등대가 있는 “빛나는 언덕 위의 도시”였다. 노골적이건 아니건 미국인들은 자유로운 국민, 자유시장, 자유언론이라는 혼합물이 전 세계에 보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은 스스로 정복하지도 못한 곳에 자유선거를 요구함으로써 ‘영도자’의 절대권력에 의한 철권 통치를 우회하려 했다. 

(537-538쪽)

 

미국 쪽도 강경해지고 있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1946년 2월 모스크바의 조지 케넌이 보낸 “긴 전보 Long Telegam"라고 알려진 문건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을 책임지게 된 케넌은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을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가르치겠다는 목표를 실천하기로 했다. 케넌이 작성한 5350단어짜리 문건에는 그의 옛 비망록에서 여러 번 언급된 내용 이외의 것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케넌의 주장을 수용할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란 북부의 갈등에 깜짝 놀라 행동을 취한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 각료들은 마침내 황야에서 울부짖던 한 외교관의 외침에 주목했다. 케넌이 보기에 크렘린은 “불필요한 위험은 지지 않는다. 이성적 논리에는 끄덕도 하지 않지만, 힘의 논리에는 매우 민감하다.” 케넌의 처방전은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 원칙인 봉쇄의 기반이 된다.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세계 각지에서 겹쳤다. 스탈린은 전후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에서 배제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트루먼은 소련이 지배하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정권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를 “신탁통치” 혹은 “반식민지 상태”로 두자고 주장했다. 트루먼은 베를린의 미군 점령지를 끝까지 유지하려 했다.

(540쪽)

그 어떤 주요 인물도 냉전을 원하지는 않았다.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트루먼 모두 자기 방식으로 세계가 이념적 군사적 라이벌 진영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도 알렉시 드 토크빌이 한 세기도 더 전에 “하늘의 뜻”이라고 부른 것을 꺾을 수는 없었다.
(5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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