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전반기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드문 시기였다. 십자군 원정은 끝났고, 타타르족은 길들여져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세계는 그물망처럼 얽혔다. 킵차크 튀르크족 노예였던 아버지를 선왕으로 두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다스렸던 맘루크 술탄은 칭기즈칸의 후손이며 중국 원나라 황제의 사촌이자 이라크와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젊은 타타르족 일 칸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었으나, 일 칸의 다른 사촌인 킵차크 칸의 딸과 결혼했다. 킵차크 칸은 비잔티움 황제의 딸과 결혼했는데, 황제의 서녀 한 명은 트레비존드의 황후였고, 사보이의 안나가 낳은 적녀 두 명은 각각 불가리아 왕자와 제노바의 귀족과 결혼했으며, 그 제노바 귀족의 계모가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이’라 불렸던 헨리 공작의 딸이었다. 혼인이 맺어졌고, 돈도 그랬다. 동서 교역로로 물밀 듯이 상인들이 오갔다." (28쪽)
"디자인과 기술의 세계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이족 혼인이 발생했다. 수 세기 동안 페르시아 도공들은 코발트를 이용해 밑그림에 푸른 무늬를 입혀왔다. 중국 도공들은 이 ‘무함마드 청색'을 자기들이 만드는 고가의 하얀 도자기에 시험해 보았고, 1325년경에는 파격적인 결과물을 다시 근동 지방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곧 페르시아에서 모조품이 만들어졌고, 이집트와 시리아도 뒤를 따랐다. 나중에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청화백자를 마음에 새기며 단지에 튤립을 그려 넣었다. 다음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청화백자와 사랑에 빠져 단지에 풍차와 문장을 그려 넣고는 튤립을 꽂았다. 지금도 스토크온트렌트에서는 그림만 바뀌는 청화백자의 사생아들이 버드나무 무늬를 입고 수백만 점씩 출하된다. 14세기 초반은 고대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왕래’의 시대였다." (29-30쪽)
영국에서 태어나 예멘에서 살고 있다는 팀 매킨토시-스미스의 <아랍-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신해경 옮김, 봄날의 책)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읽었다.
먼저 이야기하자면, 책은 너무나 너무나 좋다. 번역은 아주 훌륭하고 만듦새도 참 이쁘다. 다만 꼭 짚어야 할 것이, 제목을 잘못 붙인 책이라는 점. 14세기 마그리브 출신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여정을 따라 가는 여행기이며 원제가 <Travels With a Tangerine>이다. 베르베르족의 세계에서 출발해 크림반도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끝나는 여행기에 어쩌자고 '아랍'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또 뭔 말인가. '이슬람=아랍'이고 '아랍=테러범의 동네인 줄 다들 알겠지만 사실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목이라, 당혹을 넘어 화가 난다. 마리니드, 라술리드 식으로 왕조 이름에 영어 접미사를 그대로 넣어 옮긴 것도 좀 거슬림.
그거는 그거고. 이 여행기는 나로서는, 좋아하지 않으려 해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책이다. 탕헤르에서 시작해 이스탄불에서 끝나는데(저자의 바투타 따라잡기 여행기 중에서 이 책은 일부분이라고 한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게다가 툭툭 던지는 영국식 유머(혹은 예멘식 유머? ㅎㅎ).
이바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시리아인 아불 피다는 탕헤르가 세 가지로 유명하다고 썼다. 탕헤르 포도와 탕헤르 배와 탕헤르 사람들의 멍청함,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근 사브타 토박이인 어느 지리박물학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탕헤르 외곽에 바르깔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멍청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탕헤르인들이 멍청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바르깔 물을 마셔서 그런 거지, 그 사람들 탓은 아니야.'”
이런 짤막한 언급들을 제외하면 내가 읽은 책에서 이바가 살았던 당시의 탕헤르를 알려주는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탕헤르가 등장하는 빈도는 이바가 죽고 한 세기가 흐른 후인 1471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때부터 잦아졌다. 그때를 시작으로 여러 유럽 국가들의 손을 거치면서도 이 도시는 용케 아랍의 특성을 지켜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변했다. 그날 밤 나와 함께 파스퇴르 대로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더라면 이바도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자들 중에 두건 달린 긴겉옷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몇몇은 심지어 깡똥한 반바지를 입었다. 여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긴 겉옷에 머릿수건을두른 부류와 맨팔을 드러내고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부류. (40쪽)
탕헤르, 딴지르, 혹은 딴자. 모로코 북쪽 끝, 지브롤터 해협에 맞닿아 있는 곳이다. 스페인 남단 알헤시라스에서 페리를 타면 한 시간만에 탕헤르에 닿는다. 이바(이븐 바투타)의 고향이라는 탕헤르는 오랫동안 내게는 꿈 같은 곳이었다. 내게 맨 처음 이 도시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사람은 미셸 투르니에였다.
탕헤르는 독특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아랍의 특성을 오랫동안 지켜냈던' 이곳은 20세기 전반부에 여러 나라들의 점령지 혹은 조차지가 됐고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등이 '국제지구'라는 이름으로 발을 걸쳤다. 그래서 만들어진 특이한 퓨전 혹은 크레올적인 문화. 책에서 잼났던 것은 위에 인용한, '멍청함'에 대한 구절. 나는 그곳에 아주 잠시 머물렀고 그곳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멍청한 사람을 한 명은 만났거든. 카페 청년. ㅎㅎ
탕헤르의 풍경들, 허름하지만 꽤 괜찮았던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던 풍경, 모로코 여행 내내 열 한 살 딸을 들뜨게 했던 따진, 그리고 아침마다 잠을 깨우지만 그래도 좋았던 아잠, 그런 것들을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렸다.
저자의 여정은 모로코-이집트-시리아-오만-터키-크림반도-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진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중동 아랍인들은 카이로까지만 자기들 세력권이라 간주하여 그 바깥의 서쪽 땅은 어디든 별개의 세상으로 취급한다. 마그리브인들은 미묘한 데서 고유한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식 숫자 대신 아랍식 숫자를 사용하고, 중동에서는 천 년 전부터 일상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 서체의 화석이라 할 수 있는 쿠파체를 고수한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다.
이슬람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인 마그리브인들은 가장 모험적인 여행가이자 가장 위대한 여행작가였다. 저작이 워낙 많다 보니 교양 있는 마그리브 구성원이라면 디포의 철저한 영국 신사처럼 서재를 떠나지 않고서도 책만으로 세계를 둘러볼 수 있었다. (55쪽)
칼리드가 말했다. “전 이곳에 머무느니 타카르파스가 되겠어요.” 그가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았다. “모로코 말인데, ‘떨어져 사는’, 뭐 그런 뜻이에요., 전 집에서 죽은 듯이 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나는 경제적 이주노동자들의 지저분하고 절망적인 모습과 굳건하게 빛나는 이 순교자의 눈을 비교해보았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난 이제 가야겠어.” 나는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의 주인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잠깐만요.” 칼리드가 만류하더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주소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러 가로되,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성자와 성부도 두지 않으셨으며, 그분과 대등한 것 세상에 없노라”라고 적었다. 날카롭게 위로 부풀어오르고 아래로 내리뻗은 서체가 고풍스러웠다. 강력한 부적으로 쓰이는 꾸란 112장이었다. 변화와 돈벌이와 부패로 가득 찬 세상에 영원한 것이 하나 있다고, 그 글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찡한 마음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넌 이상한 사람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인타 피 알 마그리브 와 라 타스타그리브(여긴 마그리브잖아요. 어떤 것도 이상할 게 없지요).”
그의 말이 옳다. 아프리카를 벗어나고자 하는 데에는 뭐든 이상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지금은 그 동기가 경제적인 단위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순교자라거나 하나님의 길이라거나 하는 언어는 여전히 종교적이다. 아프리카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내가 젊은 이바의 환생을 찾고 있었던 거라면 아마도 조금 전에 만났으리라. (63-64쪽)
마그리브인들의 여행 본능. 호주/뉴질랜드인들의 여행 본능에 대한 익살맞은 구절들도 재미있다.
투숙객 대부분은 뉴질랜드에서 온 배낭여행객들이었다. 탕헤르에서 만났던 여자들처럼 그들도 국가적인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었고 대량의 여행 처방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대화의 대부분은 예방주사와 비자, 요르단으로 담배를 밀반입해 푼돈 버는 법 같은, 여행에 관련된 궁여지책들이나 묘안들이었다. 이런 주제들은 안내대에 보관된 여러 권의 공책으로도 이어졌다. 이 공책들은 환상적인 필사본 정보집이었다. 동글동글한 여성적 필체로 스웨덴어가 적힌 쪽도 있고, 상세한 일본어 주석이 달린 손으로 그린 근사한 지도도 있고, 웰링턴에서 온 롭이 휘갈긴 낙서도 있었다. 론리 플래닛이 우리 시대의 순례 안내서라면, 이런 공책들은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다언어 참고자료라 할 수 있다. (229-230쪽)
아불 하산과 아부 이난이 속한 마리니드 왕조는 ‘메리노'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모로코 양모 수출업자들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앞의 두 왕조와 마찬가지로 마리니드 왕가도 베르베르인이었다. 선행 왕조와 달랐던 점은 그들이 자신의 혈통에 대해 이유 없는 열등감을 발달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이 예언자의 후손이 건설한, 극도로 아랍적이면서도 다소 무표정한 페스를 수도로 정한 것도 아마 그 열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수많은 비아랍인 출신 통치자들이 쓰는 방식대로 그들은 예언자의 조상인 아드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결정적인 혈통을 발굴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은폐해버렸다. (75쪽)
마그리브라는 이유 때문에, 아랍의 변방이라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이슬람 세계에서 존재의 증명을 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 같은 모로코의 왕조들. 지금도 그런 냄새가 날 정도. 하지만 '극도로 아랍적이면서도 다소 무표정한 페스'라니! ㅎㅎ
다음은 이집트.
가건물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건물들이 무너진 깔라운의 둥근 천장들 사이로 솟아 있었다. 나는 700년이나 되는 전통을 지켜와서 자랑스럽겠다고 말했다. 원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 때문에 전 가끔 우리가 얼마나 천천히 진보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제 말은,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기본적인 기술은 똑같아요. 당신의 그 여행가가 이곳에 왔을 때에도 백내장 수술이 시행되고 있었어요. 전 늘 ‘너회는 약간의 지식을 얻었을 뿐이다’라는 꾸란의 구절을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147쪽)
알-나시르는 자기 아버지 묘 옆에 안장됐다. “변치도 사라지지도 않을 유일자께 영광 있으라, 그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고,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 죽었다”라고 알-마크리지는 썼다.
멋진 묘비명이다. 맘루크 술탄들은 250년간 아랍 이슬람의 중심지를 지배하여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에도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이방인이었다. 저 먼 흑해의 끄트머리 너머에서 온 튀르크족과 시르카시아인 노예들. 추방된 사람들의 소수 독재 정치가들. 아랍의 기성 체계는 언제나 그들이 아웃사이더임을 상기하게 했다. 이븐 하자르는 전기적 인명사전인 <숨은 진주들>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장음 ‘아’로 시작하는 이름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아쿠쉬’ 같은 튀르크족의 이름과 ‘아미나’ 같은 여성의 이름만 있는 관계로, 이런 이름들을 뒤로 돌리고 이슬람 학자들의 이름이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했다.” 맘루크 술탄들은 글자 그대로 알파벳순에서 추방됐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과 한데 묶여 취급됐다. (151쪽)
카이로의 오래된 서점에서 책의 지층을 발굴하는 구절. 이슬람의 오래된 세계를 엿보는 기분.
손에 넣고 싶은 책이 하나 더 있었다. 알-마크리지가 언급했던, 이바의 방문으로부터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쓰인 옛 카이로 안내서였다. 가든시티에 사는 친구 토비가 그 책이 있을 만한 서점으로 나를 데려다줬다. 서점 주인이 가게 바깥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알-주바이리 말이오? 본 적이 있다는 말은 못 하겠소만, 찾아봐서 나쁠 건 없지.”
그곳은 책으로 만든 살아 있는 고대 유적층이자 서적으로 표현된 카이로 자체였다. 책이 천장까지 무더기로 쌓여 다락방과 곁채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알-주바이리의 책이 살아남아 출판되었다 하더라도, 또 이곳에 한 권이 숨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찾으려면 못해도 몇 주, 아마 몇 년은 끈기 있게 발굴해야 할 판이었다. 아래쪽 지층에 속한 책더미의 상당량은 산호초 밑동의 산호충처럼 말라 죽은 지 오래였다. 책을 빼낸답시고 순전한 구조물의 일부가 된 아래쪽 더미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전체 구조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릴 참이었다. 기록된 문자의 불멸성이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보면 정신이 확 깰 만한 광경이었다.
이 죽은 도서관의 잔해들로부터 우리는 총독 통치기가 저물어가던 시대의 카이로 독서 계층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터키모자를 쓰고 수염에 포마드를 바른 파샤들이 남을 속이거나 유혹할 꿍꿍이로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는 그림을 말이다. (167쪽)
룩소르의 신전에 대해 저자는 "광대해 보이는 동시에 폐소공포증을 유발했다. 숲처럼 무성한 파피루스 모양 기둥 아래에서 나는 오르간 기계장치 속에 갇힌 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거의 모든 벽에는 명문과 신들의 모습, 눈이 빠질 듯이 복잡하고 빼곡한 영웅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적었다. 룩소르의 신전들이 그랬던가? 아무튼 '낙서'에 대한 구절은 어쩐지 이해되는 기분. 오래 전 룩소르에 여행을 갔을 때 어느 방자한 유럽인이 남긴 낙서를 보았는데, 100년도 더 전인 19세기의 낙서여서 웃었던 기억이 났다.
"옛날의 영웅들과 황제들은 어디 있는가? 사람도 보물창고도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무덤 속에 갇혀 누웠으니, 그들과 함께 갇힌 것은 공허뿐이니라.” 세상에 이보다 더 우아한 낙서는 몇 안 될 것이다. (182쪽)
이 책이 나온 것은 2001년이다. 저자가 여행을 한 것은 20세기의 마지막 몇 년 사이의 일이고. 9.11 테러도, 이라크 전쟁도 일어나기 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
이바는 과실이 무르익는 8월에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한 때는 계절이 겨울로 꺾어지는 시점이었다. 과실 대신에 ‘알-아사드의 시리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초대형 대통령 초상화가 원기 왕성한 작물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처럼 자주 사진에 찍히는 사람치고 하페즈 알-아사드는 놀라울 정도로 사진이 잘 받지 않는다. 이웃인 사담의 사진에서는 뭔가 산적 같은 허풍스러움이 엿보이는데, 알-아사드는 조명을 위에서 비춰보고, 밑에서 비춰보고, 뒤에서 비춰보고, 돋을새김으로 새겨보고, 입체로 빚어보고, 모자이크로 박아보고, 워홀의 마릴린 먼로 그림처럼 여러 개를 붙여보아도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 잡화점 주인처럼 보이고 마는 것이다.
공항 진입로에는 알-아사드의 아들인 바실의 사진도 무성했다. 시리아는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에 조종사 선글라스를 쓴 바실을, 때로는 유명한 다비드의 나폴레옹 그림처럼 앞발을 치켜든 말 등에 앉아 있는 바실을 보여주었다. 바실은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메르세데스 벤츠를 탄 채 바로 이 도로 위에서 박살이 났다. 새로운 적통 후계자인 바실의 동생 바샤르는 형만큼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외모만큼은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218쪽)
시리아 여행 뒷부분에 가면 하페즈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유명한 아싸씬의 '산상의 노인'에 대한 비유로 바뀐다. "그 모든 광경 위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식료품점 주인 같은 얼굴이 보였다. 독재자, 알라위들을 지도하는 새로운 산정의 노인, 아니면 통합의 천재. 그를 올려다 보면서도 나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297쪽)
아랍어 이름의 의미를 따져 보고픈 충동을 자제하려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는 ‘자밀(아름다운)'이라 불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고, ‘사담'은 '자주 깨지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자동차 범퍼에나 즐겨 쓰일 이름이며, 평범한 여자 이름인 '카디자’는 유산한 암낙타를 이르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그러나 ‘초승달의 지혜’ 또는 ‘괄호의 철학'을 뜻하는 ‘히크마트 히랄’이라는 이름은 책방 주인에게 딱 맞는 울림을 가졌다. 독서용 안경을 쓰고 웅크린 금욕적인 인물이 저절로 연상됐다. (234쪽)
위의 구절을 스크랩해놓는 이유는 하나다. 저자는 시리아의 책방에서 히크마트를 만났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1990년대에 카불을 맹공격해 학살을 저지른 야만적인 군벌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였다. 그토록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니.
둘은 바다로 향한 바람 잘 통하는 방으로 커피뿐만 아니라 대추야자와 사과, 오렌지, 그리고 카르다몸과 생강, 비스킷 맛이 나는 겉이 바삭한 수리 특산 젤리과자도 내왔다. 우아함 면에서는 오만인의 손님상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정확하게 자른 과일, 장식용 냅킨을 깐 우아한 그릇에 담긴 대추야자, 맛과 향을 음미하며 적절하게 빨리 마셔야 하지만 들릴 정도로 후루룩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아주 작은 컵에 4분의 1만 채운 커피. 라시드가 커피 예절을 일러주었다. “여자들만 컵을 가득 채워요. 너무 크게 소리를 내고 있어요. 안 돼요, 절대 컵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돼요! 그리고 세 잔을 마시고 나서부터는 컵을 이렇게 바닥부터 흔들어요.” (305쪽)
오만 부분은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뉴스나 책에서 볼 일이 많지 않은 나라인 까닭도 있고. 한때 잔지바르 등등을 거느렸던 오만 술탄왕국의 과거에는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데, 정작 저자가 오만 여행을 하면서 (하페즈와는 좀 다르지만) 끊임없이 의식해야 했던 까부스 술탄에 대해서는 사망한 뒤에야;; 관심이 갔었다.
그는 그립다는 듯이 유향을 싣고 아덴과 바스라, 인도로 갔던 일이며 말린 상어를 싣고 동아프리카로 다녔던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바로 이바가 언급했던 산물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유향이 거의 모이지 않는데다 말린 상어는 홍콩 사업가들의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아준다는 고무 같은 전복과 얼린 생선으로 대체되었다. 수세기, 어쩌면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교역은 사라졌다.
알리는 내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 장례식에 불려가는 바람에 부지사 관저의 관리 임무를 나에게 맡기고 하시크를 떠났다. 인도인들이 밥과 괴물같이 큰 생선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일지를 썼다. 그리고 위성TV를 시청했다. 아랍위성방송 채널들을 무작위로 잠깐씩 보여주는 채널이 있었다. 꾸란 낭송을 의학적 치료제로 쓰는 방안에 관한 논쟁(수단), 20분짜리 불면증 치료 베개 광고(위성 쇼핑), 교통경찰을 다룬 드라마다큐(두바이), 맞춤형 주방에 관한 토론(카타르), 거의 울 듯이 북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는 세 명의 늙은 남자들(또 수단), 뱃살깎기 광고(또 위성쇼핑), 꾸란 읽기 수업인가 싶더니 그 어느 때보다 롤링스톤즈의 한 사람, 또는 롤링스톤즈 전체를 한데 섞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카다피 대령(리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집이 있는 오래된 도시 사나의 사진과 함께 예배를 알리는 소리(예멘).
(395-396쪽)
크림반도 풍경, 비잔틴과 가톨릭과 이슬람이 겹치고 겹쳐져 있는 투르크의 옛 땅. 크림반도와 아나톨리아에는 못 가봤지만 오래 전 터키에서 본 건축물이 생각났다. 에페스였던 것 같은데, 이집트에서 넘어온 아이시스의 신전이었다가 로마 제국의 건물이었다가 비잔틴의 건물이었다가 오스만의 건물이었다가 지금은 허름한 창고...처럼 남아 있던 유적.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크림 보스포루스를 굽어보는, 대륙의 끝에 선 언덕이라니. 알-카디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우기에 딱 적합한 곳이 아닌가. 나는 이바가 "꼭대기에 알-카디르와 엘리야의 이름을 딴 암자가 있다”라고 했던 시노프의 그 반도를 생각했다. 알-카디르와 엘리야보다는 엘리야로도 알려진 알-카디르, 또 기독교도에겐 성 게오르기우스로도 알려진 알-카디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결국은 집에 두고 나온 걸 알게 된 열쇠처럼, 거기에 답이 있었다. 엘리야/엘리아스, 일명 알리는 게오르기우스(조지)였다.
이바 시대에 크림 반도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기독교 고행자들의 단식 습관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원 성당에서 이슬람의 기도 벽감이 너끈히 성수반 역할을 해내는 곳이다. 이곳 페오도시야는, 니나가 해준 얘기인데, 제노바인들이 운영한 화폐 주조소에서 앞쪽은 라틴어, 뒤쪽은 아랍어로 된 동전을 찍어냈던 곳이다. (485쪽)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
알-카디르와 엘리야, 성 게오르기우스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면, 추상화된 하나님과 인간화된 하나님이 같이 자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돌이켜보면 이 행복한 이중 현신을 드러낸 것이 세속주의라는 사실이, 이 성당-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꾸고 고대인들의 규칙과 회반죽 칠을 모두 벗겨내 버린 것이 아타튀르크의 군사적 세속주의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슬람의 선례가 있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알-하라위는 순례 안내서에서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에 “원래는 천사와 예언자, 천국의 나무와 아브라함,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와 그 어머니의 성화가 걸려 있었다. 예언자께서 메카를 장악하고 계실 때 구세주와 그 어머니의 성화를 제외하고 모두 흔적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라고 말했다. 예언자가 죽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카바 신전에 불이 났다. 그 불에 소실된 것들 중에는 메카의 마돈나, 카바의 성모 마리아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이런 병치가 살아남았다. 유럽과 아시아가 교차하는 곳, 거기다 성스러운 지혜에 바쳐진 건물인 하기야 소피아보다 이에 더 적합한 무대가 달리 있을까? (503-504쪽)
하지만 작년에 에르도안은 하기아 소피아를 결국 모스크로 바꿔버렸다.
나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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