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총리가 바뀔 모양입니다.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2일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 내각을 새로 구성하겠다면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와 만나겠다고 밝히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소식만으로도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올라갔다고 하고요.
이탈리아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돼야 합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의회에서 어느 정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 대통령이 당 대표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총리가 결정됩니다. 총리가 실권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도 허수아비는 아닙니다. 연립정부가 붕괴될 경우에는 '내각 구성권'을 누구에게 줄 지, 즉 차기 총리를 누구로 할지를 대통령이 결정합니다.
이탈리아 의원 수는 현재 상원 321명, 하원 630명으로 총 951명이나 됩니다. 정당들도 많아서, 2018년 3월 총선으로 구성된 현 의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 수가 10여개에 이릅니다. 여러 정당이 활동하다 보니 과반 의석을 한 정당이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연립정부 구성을 놓고 늘 복잡한 협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된 것은 과거 파시즘의 악몽이 있기 때문에 권력이 한 쪽에 집중되지 않도록 최대한 분산시킬 수 있게끔 전후 헌법과 정치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9월 국민투표를 통해 의원 수를 상하원 총 600명으로 줄이기로 했으나 어쨌던 현 의회는 그 전에 뽑은 것이고, 지금 상황은 꽤나 복잡합니다.
상대적으로 오래 집권한 기업가 출신 추문 제조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2011년 이후로 마리오 몬티, 엔리코 레타, 마테오 렌치, 파올로 젠틸로니 총리가 집권을 했고요. 지금의 총리는 2018년 취임한 주세페 콘테입니다. 한마디로 총리가 자주 바뀌었고, 그 때마다 지지부진한 협상과 밀당과 분란이 일었습니다. 연립정부 구성이 제대로 안 돼서 대통령이 정당들에게 통사정을 하는 일도 있었고요.
이번에 총리를 새로 뽑는 이유는, 늘 그랬듯 연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의석 분포를 보면 포퓰리스트 정당인 ‘오성운동 Movimento 5 Stelle’의 의석 수가 상원에서나 하원에서나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레가 Lega’라고 부르는 '북부동맹 Lega Nord'과 ‘이탈리아 비바 Italia Viva’ 같은 중도 정당들이 있고, 중도 혹은 중도 좌파 성향인 민주당 Partito Democratico과 좌파 '자유와평등 Liberi e Uguali, LeU' 등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정당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2018년 취임한 주세페 콘테 현 총리는 법학자 출신입니다. 오성운동과 북부동맹 등이 연립해서 총리를 정하기로 했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을 고르다 보니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콘테를 낙점하는 결과가 됐습니다. 일단 정치적 교착상태를 봉합하기 위한 관리자로 총리직을 맡았으나 의외로(?)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도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2019년에 북부동맹이 떨어져나갔을 때에도 마테오 렌치 전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 비바'와 손잡아 연정을 유지했고, 지방선거를 그럭저럭 치러냈습니다.
하지만 정당들의 이합집산 속에 연정의 색깔은 뒤죽박죽이 됐습니다. 극우 포퓰리스트 성격의 오성운동에 중도 좌파 민주당, 민주당에서 갈라져나온 이탈리아 비바 등이 혼재했으니까요. 결국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연합(EU)이 이탈리아에 주기로 한 경제회복기금 2090억 유로(약 280조원)를 어디에 쓸 것이냐를 놓고 다투다가 이탈리아 비바가 연정에서 나가버렸습니다. 상하원 합해 45석 밖에 없는 작은 정당이 탈퇴한 것이지만 의회 과반선이 무너졌기 때문에 연정이 붕괴한 겁니다.
콘테 총리는 지난달 말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원래는 다른 정당들과 손잡아 다시 연정을 구성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진전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마타렐라 대통령이 드라기를 만나 내각 구성을 요청했고, 드라기는 3일 여러 정당들과 의회에서 총리 신임투표를 치르기로 합의했습니다. 정당들이 표를 던지면 무난히 총리가 되겠지요. 마타렐라 대통령은 팬데믹 상황에서 총선을 치르기보다는 위기를 타개할 인물을 인선해 우선 총리를 맡기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73세의 드라기는 국제사회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로마 태생이고 로마 사피엔자 대학을 나왔습니다. 미국 매서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로 돌아와 피렌체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 있다가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은행에서 일했습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간 재무부 관료를 지냈고, 2002년부터 3년간은 미국 골드만삭스 부회장을 역임했습니다. 그 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를 하다가 2011년 유럽중앙은행으로 갔습니다. 한마디로 정치인이 아니라 금융계 인물입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고, 이후 유럽은 재정위기에 빠졌지요.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타격과 혼란이 특히 심했습니다. 독일이 자국 재정을 걱정하느라 지원을 꺼린 까닭에 유럽은 재정위기를 이겨내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유럽연합 차원의 대응을 주도한 사람이 드라기였습니다. 2012년에 “유로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라는 선언을 했고 결국 유로의 붕괴를 막아 ‘수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드라기가 차기 총리로 부상한 것에는 코로나19 경제 위기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누적 감염자는 2600만명에 이르고 사망자가 9만 명이 넘습니다. 이탈리아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8.8%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유럽연합은 이보다 더 비관적으로, 지난해 이탈리아 성장률을 -9.9%로 추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기가 구원투수가 돼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사임한 콘테 전 총리는 연정이 무너진 뒤 드라기와 '아주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며 힘을 실어줬습니다. 일단 좌우를 망라하고 여러 정당들이 드라기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최대 의석을 가진 오성운동은 '드라기 총리'에 동의한 것 같고요. 연정을 붕괴시킨 이탈리아 비바의 렌치 전 총리는 "새 내각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면서도 일단 드라기를 선택한다면 밀어줘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오성운동 같은 '반EU' 진영뿐 아니라 친유럽 정당들도 새 정부를 빨리 구성해 드라기의 지휘 아래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친유럽 진영으로서는 명실상부 '유럽의 인물'인 드라기가 전면에 나서는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어쨌든 이탈리아가 EU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고요.
의회에서 신임안이 통과되면 드라기가 곧 총리가 돼 새 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는 총리가 되면 당장 업무에 나서서 유럽연합 기금 2090억달러를 가지고 보건의료시스템을 확충하고 경제 구조개혁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응에, 경제 살리기에… 과제가 만만찮습니다.
무엇보다, 콘테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드라기 역시 국민의 투표로 뽑히지 않은 총리가 됩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탈리아는 열차가 선로를 벗어날 때마다 테크노크라트를 불러들이는 것에서 해법을 찾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렌치도 그렇고 콘테도 그렇고, 드라기까지 10년 새 취임한 총리들 중 4명이 국민이 뽑지 않은 관료나 학자 출신입니다. 콘테 전 총리가 "드라기의 새 정부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정치에 신물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새 얼굴'을 내세우자니 번번이 그렇게 된 겁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선택하지 않은 아웃사이더가 만능 해결사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 간의 혼란이 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드라기 역시, 국제무대에서 금융관료로 유명하다 해도 결국은 정당이라는 정치적 기반이 없습니다.
오성운동은 기존 정치체제에 극렬 반대하는 것으로 성공한 정당입니다. 이번에 그들이 드라기를 지지하고 있으나,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드라기는 오성운동과 지지자들이 최대의 적으로 규정해온 전형적인 엘리트 인사입니다. 북부동맹은 지역 이해관계에 기반한 정당인데다 대표인 마테오 살비니는 이민자 혐오 선동을 일삼는 극우파입니다. 거기에 민주당과 이탈리아 비바, 친유럽 정당들까지 아울러야 하는데 누가 봐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10년 전 재정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유럽연합 지원을 받을 때 늘 그렇듯 구조개혁 요구가 따라붙었습니다. 정부와 은행을 살리기 위해서 서민들을 희생시킨다는 비판이 많았고요. 드라기는 그 개혁을 강요한 인물의 하나라고 국민들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드라기가 앞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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