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바이든은 러시아 측의 잇단 미국 주요 시설 해킹 공격에 항의했다. 미국의 핵심 인프라 목록 16개를 러시아에 건네기도 했다. 이 시설들에 러시아가 사이버 공격을 가하면 보복을 불사할 것이며, 러시아의 송유관을 파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연히 해킹과 러시아가 무슨 상관이냐고 일축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인권상황도 거론했다. 크렘린에 맞서온 인권운동가 겸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옥중에서 사망한다면 “러시아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나발니는 범죄자”라고 맞섰다. 하지만 2026년 종료되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을 대체할 새로운 핵군축 협상을 시작한다는 데에 합의한 것은 이번 회담의 성과였다.
미-러 정상회담은 2018년 푸틴과 도널드 트럼프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만난 이후 3년만이다. 날을 잔뜩 세우고 서로 공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미미한 성과였다. 두 정상은 외교장관들을 대동하고 93분 대화했고, 양측 대사들까지 불러서 87분 동안 확대정상회담을 했다. 원래는 그 뒤에 바이든과 푸틴 두 사람만의 대화가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이 대화는 취소했다. 그래서 당초 예정보다 짧은 3시간만에 회담이 끝났다.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다.
푸틴 68세, 바이든 78세. 푸틴은 집권 첫 해인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푸틴에게는 바이든이 정상회담을 한 5번째 미국 대통령이다. 바이든은 대통령이 된 지 반년 밖에 안 됐지만 널리 알려진 외교 전문가다. 상원의원으로 러시아를 처음 방문한 게 1979년이었다. 이번 만남에서 두 정상 모두 노련함을 과시했다.
푸틴은 상습 지각쟁이에다, 심지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날 때에는 상대방이 무서워하는 개를 끌고 나오는 행태까지 보이는 등 ‘의도된 결례’로 유명하다. 이번엔 격식을 갖추고 서로 예의를 다했지만 허그 같은 친밀한 표현은 없었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의지보다는 계산하고 탐색하는 양상이었다.
푸틴은 바이든을 “아주 균형잡힌,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며 “아주 경험 많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서로 이해하며 대화를 나눴다(speak the same language)”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영혼을 찾거나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바이든은 이번 회담이 “좋았다, 건설적이었다, 퉁명스런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했다. 올초 바이든이 언론과 인터뷰할 때 푸틴을 ‘살인자(killer)’라고 표현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는 물음이 나왔고, 바이든은 동의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두 나라가 서로 대사를 불러들이는 지경까지 갔다. 이번 회담 뒤 회견에서 바이든은 '살인자' 표현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더 말할 문제가 못된다”고 했다. 푸틴에 대한 비난의 수위는 낮춘 것이다. 푸틴도 바이든이 당시의 그 표현에 대해 만족할만한 해명을 했다고 설명했으며, 일단 각기 불러들인 상대국 주재 대사는 다시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이든은 푸틴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두 정상 모두 “솔직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평가했으나 이견을 솔직하게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회담 후 회견에서 CNN 기자가 "왜 푸틴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라 믿느냐"는 질문을 했다. 바이든은 “내가 언제 바뀔 거라 확신한다고 했느냐”며 약간 언쟁을 벌였고, 잠시 뒤 사과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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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2008년 러시아가 인근 조지아에 군대 보내면서 미국과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9년 집권한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리셋’하겠다면서 건설적인 관계를 다짐했으나 2012년 푸틴이 재집권한 후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미국은 그 해 마그니츠키법이라는 제재법으로 러시아 주요 기업들과 경제인들을 제재하고 푸틴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러시아도 보복조치에 들어갔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로는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2015년부터는 러시아가 내전이 벌어진 시리아의 독재정권을 지원해 갈등이 극도로 고조됐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러시아가 트럼프를 도우려고 인터넷 여론조작 등 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미국 민주당과 크렘린의 사이는 더 벌어졌다. 이토록 내리막길을 치닫던 두 나라 사이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점에 이번 회담의 의미가 있다. 트럼프 시절에는 오직 트럼프와 푸틴의 관계만 좋았을뿐, 국가 관계는 나빴으니까.
러시아로서도 서방과의 대립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립이 너무 심해졌고, 유가하락과 코로나19 등으로 경제 사정도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푸틴이 순순히 미국에 고개를 숙일 리는 없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의 위상을 과시하는 것으로 국내 지지를 유지해왔다.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시절, 2014년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비난하면서 러시아를 ‘지역 강대국(regional power)’이라 불렀다. 세계를 이끄는 국가가 아닌 지역 패권국가 정도로 묘사한 것이다. 이번에 바이든은 제네바를 떠나기 전 연설하면서 “러시아는 강대국으로 남기를 필사적으로 바라고 있다”고 평가했다. "몇몇 비평가들의 표현처럼 ‘핵무기를 가진 어퍼볼타(Upper Volta)’가 되는 것을 러시아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어퍼볼타는 아프리카 내륙 국가 부르키나파소 일대를 가리키는 옛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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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표현과는 다소 달랐지만 냉담하긴 마찬가지였다. '러시아가 바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려면 러시아가 태도를 바꾸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미국의 한 러시아 전문가는 로이터통신에 “바이든이 세계무대에서 푸틴의 중요성을 훼손하려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사실 러시아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더 우선적인 과제로 놓고 있다. 바이든은 푸틴과 만나기 전 주요 7개국(G7)과 나토(NATO)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G7 만남에서 코로나19 이후 세계 경제 회복을 논의하면서 그는 ‘더 나은 세계 이니셔티브(Build Back Better World Initiative)’를 주창했다. 팬데믹에서 회복되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나라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인 동시에, 국제 교역질서를 교란하는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모이라고 동맹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이런 구상에서 러시아의 자리는 어디일까. 바이든은 잇단 회의에서 ‘규칙에 근거한 국제질서’를 강조했다. 푸틴 앞에서 ‘함께 공유할 기본적인 규칙’을 거론했다. 그 핵심은 '미국의 근간'인 민주주의라는 것이 바이든의 주장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중국이 아닌 미국 편에 서고,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해하지는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 거라고 봐야할 것 같다. 바이든은 회담 뒤 러시아가 “중국에 쥐어짜여 아주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다(Russia is in a very, very difficult spot right now. They are being squeezed by China)”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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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은 “러시아는 중국과 수천 마일에 걸친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중국이 점점 앞서나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파워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는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했다. 냉정한 진단이다.
중국은 당연하게도 바이든이 러-중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글로벌타임스는 “근거 없는 도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를 바보취급하는 것, 러시아 국민들의 굴욕” “전략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한 나라가 어디인가" "최근 몇 년 간 러시아의 경제를 어렵게 만든 근원은 미국”이라고 적었다. 바이든이 그 책임을 중국에 전가한다면서 “정치적 자폐증과 나르시시즘에만 나올 수 있는 환상”이라고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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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야단쳐가며 자기편에 서라 하지만, 러시아는 중국과 경제적으로 훨씬 더 밀접하다. 글로벌타임스는 미국이 러시아를 봉쇄하는 사이에 중-러 첨단기술 협력은 더 활발해지고 있으며 에너지 안보 분야에서 상호지원하고 있고 두 나라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이미 시험대를 통과했다고 주장했다. 미국보다 중국이 러시아와 교역도 훨씬 많이 하고 있다고 썼다.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가 중국과 더 밀접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미 무역대표부(USTR) 자료를 보면 2019년 미국의 대러시아 상품·서비스교역액은 약 350억달러였고 미국이 130억달러 넘게 적자를 봤다. 하지만 교역만 보면 러시아의 중요성은 미국에 그리 크지 않다. 미국의 교역상대국 가운데 교역액 규모로 러시아는 26번째이며 관련된 미국 내 일자리는 6만6000개 정도다. 러시아에 미국이 외국인직접투자(FDI)로 투자한 액수는 2019년 144억 달러에 그쳤다. 제재 탓이 크긴 하지만, 미국 전체 FDI 4조5000억달러 중에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정도로 미미하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미국과의 경제관계는 비중이 매우 낮다. 미국과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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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정치적, 지리적, 경제적으로 모두 밀접하다.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 분석에 따르면 2018년 중국의 교역액 가운데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0.8%였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전체 교역액의 15.5%가 중국과 주고받은 것이었다. 교역액은 490억달러, 러시아가 60억달러 적자였다. 그러나 바이든 말처럼 러시아가 중국에 쥐어짜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푸틴은 지난달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하며 양국 관계가 ‘역사상 가장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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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이든 정부도 러시아가 중국과 손절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정치분석가 파리드 자카리야가 워싱턴포스트에 썼듯이, 러시아가 중요한 것은 경제적 지위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는 세계 10위 경제국에도 못 낀다. 하지만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다르다. 유라시아 전체에 걸쳐져 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고, 핵 보유국이다.
[워싱턴포스트] Under Biden, American diplomacy is back. But America isn’t.
독일 언론 도이체벨레기고에서 한 분석가는 "푸틴에게 중요한 것은 정권의 생존"이라며 미국이 냉전적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푸틴을 좀 더 안심시켜줘야만 크렘린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러시아가 중시하는 국제적 위상을 인정해주고, 모욕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 점에서 바이든은 푸틴에게 많은 걸 내주지 않았다. 그는 이번 회담의 성격에 대해 “신뢰보다는 각기 자국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하는 자리였다”고 했다. 두 나라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올 가능성은 적어 보이며 푸틴도 양국 관계가 나아질지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크렘린의 20년 집권자가 “일말의 희망은 보인다”고 했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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