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저녁(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유로(UEFA 유럽 축구 선수권대회) 2020 4강전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이 덴마크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루 전 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이탈리아와 11일 저녁 맞붙게 된다.
영국은 축구 종가를 자부하며,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프로축구 리그로 유명하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이 그동안 월드컵과 유로에서 거둔 성적은 종주국의 명성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월드컵의 경우 자국에서 열린 1966년 대회에서 한 차례 우승한 것 말고는 결승에 올라간 적이 없다. 유로에서는 1960년 첫 대회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4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두 메이저 대회에 결승에 진출하게 된 것은 무려 55년만이다.
7일 경기 뒤 영국은 광분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밤새 거리에서 축제를 벌였고, 발 디딜 틈 없이 거리를 메운 축구팬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흥분한 이들은 시내버스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열광했다. 2016년 브렉시트를 결정한 이후 유럽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영국이 축구로 권토중래한 듯한 모습이다.
코로나19 때문에 1년 연기돼 올해 치러진 이 대회에서 영국이 우승한다면 유로2020의 최대 승자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될 것 같다. 사실 존슨은 열렬한 축구팬은 아니다. 2006년 영국과 독일의 전직 축구선수들, 정치인, 유명인들이 자선 축구경기를 펼쳤다. 당시 의원이던 존슨도 참가했는데, 맨시티에서 뛰었던 독일 미드필더 출신의 마우리치오 과디노를 끌어안고 방해하는 ‘럭비 태클’을 선보였고 결국 과디노를 크게 다치게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팬이든 아니든, 유로2020의 선전은 존슨에겐 숱한 실책을 덮을 수 있는 호재가 될 수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주도한 존슨은 어찌어찌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유럽연합(EU)과의 협상이 지지부진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피로감이 쌓였다. 거기에 코로나19가 덮쳤고, 경제사정은 나빠졌고, 정부의 팬데믹 대응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영국의 코로나19 상황은 유럽에서도 특히 심각한 편이다. 미국, 인도, 브라질, 프랑스, 러시아, 터키에 이어 세계에서 7번째로 확진자가 많다. 10일까지 누적 확진자 수는 500만명이 넘고, 13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인구 100만명 당 사망자 수로 보면 브라질, 미국에 이어 3번째로 많다. 특히 존슨 총리는 일부러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고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과 악수를 하는 식으로 만용을 부리다가 본인이 감염돼 위중한 상황을 겪었고, 집중치료실까지 갔다.
이달 들어서도 하루 2만명씩 확진자가 늘고 있지만 영국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19일 코로나19 록다운을 풀 방침이다. 유로2020이 불러온 축제 분위기가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전염병은 더 퍼질 게 뻔하다. 또한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만일 우승을 하지 못하면 소동이 벌어질 수도 있다. 1996년 유로 대회가 영국에서 열렸을 때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개최된 4강전에서 잉글랜드팀이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흥분한 팬들 2000여명이 트라팔가 광장에서 난동을 부려 200여명이 체포됐다. 가뜩이나 영국은 '축구 난동'으로 악명 높은 나라이고, 대형 참사도 있었다.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대회는 무사히 끝나야 하는데 말이다.
잉글랜드 축구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고 팬들은 환호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를 둘러싼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EPL 소속 클럽들은 작년부터 미국 흑인 사망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왔으며 인종주의에 항의하는 뜻에서 경기 시작 전에 한쪽 무릎을 꿇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유로 대회에서 국가대표팀이 그 예식을 할 때에 팬들의 야유가 터져나온 일이 있었다.
무릎꿇기 세리머니는 공감과 연대의 표시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의사 표시'라고 규정될 수 있는 동작이다. 축구장에서 그런 제스처를 하는 것을 놓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관중석의 야유는 백인이 아닌 선수들에게는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인종주의와 싸우겠다는 제스처에 야유를 보내는 그 영국 관중들, 그들이 지금 열광하고 있는 대표팀이야말로 다양성의 산물이다. 영국 통계청(ONS)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영국 인구 6600만명의 14%인 950만명이 외국 태생이다. 부모나 조부모가 이민자인 케이스까지 따지면 이주민 가정 출신 인구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축구 대표팀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다. 결승 진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해리 케인은 아일랜드계이고 부카요 사카는 나이지리아계다. 이번 대회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멤버 중 가장 두드러진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는 라힘 스털링은 자메이카 태생이다.
6월 29일 잉글랜드가 50년만에 처음으로 독일을 이겼을 때 영국은 열광에 빠졌다. 당시 런던 이민자박물관에서 만든 캠페인 포스터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졌다. 대표팀 스쿼드에서 부모, 조부모 세대 가운데 '이주자'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면 4명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포스터였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프랑스 팀이나 2000년대 중반 독일팀이 승승장구할 때, 이민자 가정 출신 선수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번 잉글랜드 팀도 비슷하다. 대표팀의 유로 대회 성과를 놓고 영국 잡지 뉴스테이츠맨은 “30여년에 걸친 ‘열린 국경(open border)’ 정책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숱한 분석이 나왔듯이 브렉시트는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결정된 측면이 있으며 존슨 정부는 이민자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잉글랜드 대표팀이 독일과 싸워 이긴 날, 존슨 정부의 내무장관 프리티 파텔이 트위터에 축하 글을 올렸다. 그러나 대표팀의 무릎꿇기 제스처에 관중들이 야유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파텔 장관은 인종주의를 비판하기는커녕, ‘제스처 정치’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오히려 야유한 관중들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자신이 인도계인 파텔 장관은 잉글랜드 결승 진출이 결정된 7일 영국 이주를 희망하는 이들의 범죄 전과 심사를 강화한다는 국적-국경법을 의회에서 공개했다.
인종주의 문제는 축구의 고질적인 논란거리이고, 무릎꿇기가 이슈가 된 것도 영국만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대표팀의 동작에 관중들이 보여준 행태가 문제였으나 이탈리아에서는 선수들이 이 제스처를 거부한 것이 도마에 올랐다. 이탈리아 축구계는 유럽에서도 인종차별 논란을 유독 심하게 불러일으켜왔다. 이번 대회 이탈리아-웨일스 경기 때 웨일스 팀은 전원 무릎을 꿇었으나 이탈리아 팀에서는 5명만 따라 했다. 그에 앞서 열린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경기 때에는 두 팀 모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반이민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는 대표팀의 '거부'를 편들며 “선수들에게는 축구만 시키자”고 했다. 인종주의에 맞서는 상징적인 동작을 정치적 제스처로 비아냥거렸다. 무릎을 꿇는 예식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인종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길도 아니고, 축구장의 인종주의를 없앨 해법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거치면서 이 제스처와 그에 대한 반응은 이미 정치적 신호이자 상징이 돼버렸다.
그런가 하면 독일에서는 무지개 조명이 이슈가 됐다. 조별리그 때 F조 독일-헝가리의 경기가 뮌헨에서 열렸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새로 지은 뮌헨의 주경기장 알리안츠아레나는 경기장 외벽을 색색깔 조명으로 장식할 수 있다. 뮌헨 시는 이번 헝가리와의 경기 때 성소수자 인권의 상징인 무지개색으로 경기장을 비추는 계획을 세웠다.
헝가리의 극우파 오르반 빅토르 정부는 배타적인 반이민 민족주의를 내세워왔으며 성소수자 차별과 반민주적인 정책들로 비판을 받고 있다. 유로2020 본선 개막 직전에 헝가리는 성교육 등의 명목으로 대중문화에서 동성애 표현을 통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뮌헨 시가 무지개 조명을 계획한 것은 그런 움직임에 대한 항의로 해석됐다.
문제는 UEFA가 이 조명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었다. 독일 언론들은 UEFA를 비난했고, 하이코 마스 외교장관도 “축구는 물론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축구는 사람들, 공정성, 관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무지개 조명은 무산됐지만 독일-헝가리 경기 때 알리안츠아레나 앞에서는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무지개 깃발과 마스크를 시민들에게 나눠줬고, 무지개 의상을 차려입은 관중들이 눈에 띄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UEFA나 국제축구연맹(FIFA)은 경기장에서의 정치적 표현에 매우 민감하다. 축구, 특히 국가대항전은 정치적 대립이나 갈등을 격화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폭력사태가 일어난 적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실제 국가 간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이듬해 열릴 월드컵 본선진출을 놓고 다투다가 감정이 격화돼 100시간 동안 교전을 했는데 이것을 '100시간 전쟁' 혹은 '축구전쟁 La guerra del fútbol'이라고 부른다)
뮌헨의 무지개 조명을 막은 것뿐 아니라 UEFA는 이번에 우크라이나팀에게 저지(유니폼)를 문제삼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대표팀이 유로2020 본선을 앞두고 공개한 새 유니폼의 노란 셔츠 앞면에는 우크라이나 지도가 표시돼 있고 등에는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그리고 안쪽에는 “영웅들에게 영광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합병한 이후로 양국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우크라이나팀 유니폼의 지도 모양에는 크림반도가 포함돼 있었으며 슬로건은 군대식 구호였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 때에 많이 등장했던 바로 그 대통령)은 이 유니폼을 들고 있는 자기 사진을 보란 듯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러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림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잘 알고 있으니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크림반도 주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크림반도 주민들 스스로 러시아에 귀속되길 바랐다는 그간의 주장을 고수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축구선수들 중에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안드레이 셰브첸코. AC밀란에서 활약했던 셰브첸코는 한때 고국에서 정치에 도전했지만 축구에서처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결국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는 “러시아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 팬들 반응이 궁금할 뿐”이라며 유니폼 설전을 이어갔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UEFA에 항의했고 UEFA도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셔츠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EU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가 여전히 우크라이나 땅이라는 입장이며, 우크라이나 대표팀에 유니폼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2014년 친러시아 성향 대통령이 시민 시위로 쫓겨난 뒤, 우크라이나는 내부적으로도 분열됐다. 러시아계가 많이 사는 동부에서는 친러시아 무장조직들이 러시아의 공공연한 지원 속에 군사행동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이번 유로2020 덕에 국민통합 효과를 봤다. 비록 8강전에서 잉글랜드에 패하긴 했으나 7년만에 국민들 여론이 하나로 뭉쳐졌다고 BBC 등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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