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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로 에스코바르, <플루리버스>

딸기21 2022. 9. 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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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리버스 - 자치와 공동성의 세계 디자인하기 
Autonomía y diseño: la realización de lo comunal (2016년)

아르투로 에스코바르 (지은이), 박정원, 엄경용 (옮긴이) 알렙

 

오랜만에 공부하는 느낌으로 읽은 책.

콜롬비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학자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실험들을 예시로 들면서 '여러 세계가 있는 세계(Pluriverse)'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논의이지만, 책 자체는 굉장히 학술적이랄까.

젠더 분석을 포함한 이반 일리치의 근대 문화 비판, 라나지트 구하 등이 얘기한 '기록되지 않는 역사', 서발턴 논의, 반세계화포럼의 '더 나은 세계' 담론,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반다나 시바와 아룬다티 로이, 사스키아 사센의 축출 자본주의 등등 온갖 이야기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여러 통찰/이론의 접점들을 훑어나가는지라 쉽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이 있었고 공감가는 것과 더 알아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베를호프는 서구 문명 위기의 뿌리를 지난 5천 년 동안 모계문화를 희생하면서 오랫동안 진행된 가부장제의 발전에서 찾았다. 저자에게 가부장제는 여성 착취를 넘어 자연의 구조적인 파괴를 의미한다. 베를호프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문명의 가장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라틴 아메리카 페미니스트들은 이 마지막 단계의 기원을 아메리카 정복과 근대 식민 세계 시스템의 건설에서 찾아낸다. 세계의 국가는 남성에 의한 공적 영역이 점점 더 여성의 사적 영역을 종속화하여 점진적으로 공공의 세계를 점유하는 이분법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페미니스트들은 아이마라 선주민 지식인·활동가 훌리에타 파레데스가 말한 "인류가 지배 방식을 배우는 장소는 여성의 몸"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39~40쪽)
건축은 항상 디자인의 중심에 있었다. 건축가들이 일상적으로 가구, 패션, 음악, 물질, 심지어 유토피아를 디자인 과정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은 빈곤한 사회 이론에 가까워지기보다는 세계화, 도시화, 환경, 근대성, 미디어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중요한 토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 스펙트럼의 또 다른 극단에는 해결하기 힘든 도시의 빈곤, 환경 악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공간과 문화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지구의 구성 요소를 동원한다. 장폴 부르디에와 트린 민하의 책에서 토착적인 것은 더 이상 엄격한 전통주의가 아닌 토착적인 형태 공간과 구체적인 경관, 환경의 복구, 환경과 디지털 기술이 통합된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창조적인 계획과 연결되는 가능성을 지닌 공간을 지칭한다. (72~73쪽)

토니 프라이는 도시에 대한 질문을 약 1만 년 전 유목에서 정착으로 변화된 지구의 주거라는 큰 규모의 역사에 위치시킨다. 인간 주거의 세 번째 형태가 활발하게 재구성돼야 하는데 프라이는 이를 미정착(unsettlement)로 명명한다.
기후변화의 효과로 나타난 극단적인 세계 내의 세계를 근대 도시에서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주거에 담긴 불안정성은 지구의 주거가 고민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존재론적 디자인 전략이다. (215쪽)
해리 할핀과 알렉산더 모닌은 웹에 대한 매력적인 철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할핀은 집단적으로 형성된 환경이 확장된다는 측면에서 집단 지성의 개념을 옹호한다. 이 개념은 인공지능인 네오 하이데거 프로그램의 중심이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웹을 집단지성으로 파악하게 되었고 개인으로 체현되기보다는 집단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정치적 존재론의 혐의를 지닌 디지털 체계가 샌디에고의 벤자민 브레턴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스택 혹은 플랫폼이라고 불리는 행성 규모의 새로운 사고인 우연한 거대 구조를 제안하도록 했다. 스택은 지구의 새로운 노모스 혹은 지구의 새로운 정치지리학이다. 이는 국가, 시민사회, 시장이라는 세 가지 축에 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새로운 차원이다. 이렇게 이제 우리는 플랫폼 또는 스택을 갖게 되었다. (79~80쪽)

나는 기술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열린 존재론적 선택, 즉 시공간의 다양성이라는 조건에서 어떤 기술이 지구와 우리 공동체에 도움을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디지털이 존재론적으로 선택의 폭을 줄여 결국 인간 중심주의에 빠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디지털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이라는 신중하게 규범화된 방식으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라'는 유혹적인 슬로건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가장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를 강제하면서 '자유롭다'는 규범에 순응하도록 하는 기획이다. (189쪽)

위노그레드와 플로레스는 인터페이스가 인간을 모방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이 준비된 도구가 적절한 공간에서 사용자와 적절하게 결합하는 방식을 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은 일종의 인터페이스 인류학이다. 
균열은 위노그레드와 플로레스에게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불확정성의 상황으로서 균열은 행위를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하는데 이 공간은 새로운 대화와 연결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균열은 디자인과 경험 사이의 상호작용을 요구하며 나타난다. 균열을 예측하고, 그것이 발생할 때 이를 제대로 다루는 적절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에 의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05쪽)
수많은 인도주의적 디자인은 내구성, 단순성, 휴대성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좀 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복지는 상품의 논리에 종속된다. 그럼에도 피터 레드필드는 이 디자인 실천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구로 축소되거나 정보 또는 개발주의로 동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와 관료화 경향을 넘어 잠재적으로 새롭고 중요한 무언가가 인류학과 인도주의적 실천, 그리고 디자인 사이의 교차점인 최소주의 생명 정치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주의적 디자인은 여전히 작지만 성장하고 있으며 혁신과 디자인 분야에서 발전과 빈곤의 감소를 재검토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108쪽)
정치생태학을 정의하고 그 계보를 추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영미권을 비롯한 세계의 사회과학자들은 사회 이론과 특정 마르크스주의에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문화 및 인류 생태학 학교에서 발전된 생태학적 관점을 결합하여 사회, 자본주의, 환경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때부터 지질학, 인류학, 생태경제학, 사회학, 환경 역사 등에서 협업이 진행되었다. 
1990년대부터 후기구조주의는 재현과 권력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시도했고 이 시각을 통해 자연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장소를 통해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자연, 문화, 역사, 권력의 여러 교차점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정치생태학이 개념화되었다.
현재는 후기구조주의와 신유물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 번째 시기로 명명할 수 있다. 자연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구성주의적 순간의 수많은 아이디어를 통합하고 세계화 조건에서 자본에 의한 자연의 사회적 생산에 주목하지만 현재 이 관점의 중심에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경시했던 모든 측면이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적절하게 담고 있는 개념이 바로 존재론적 전환일 것이다. (112~113쪽)

다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단지 구조, 기술, 제도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없애거나 다시 디자인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존재론적이다(일리치). 다시 말해, 지속불가능성을 낳는 것이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다른 인간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거나, 우리 의지대로 우리 존재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210쪽)
문제는 이원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많은 사회는 이분법에 기초하여 구조화되어 왔다. 비록 대부분 음양론과 같은 비위계적인 쌍이라는 상호보충적 측면에서 다루어졌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부분이 문화적으로 다뤄진다는 것, 특히 두 부분 사이에서 확립된 위계 그리고 그 위계로 나타난 사회적 생태적 정치적 결과이다.
식민성의 가장 큰 성격은 차이를 위계적으로 범주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 시스템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문명, 근대성 그리고 발전을 가져오기 위한 기획의 핵심이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식민성 없이는 그 어떤 곳에도 근대성은 없다.
근대성, 식민성의 개념화에 대한 귀결은 그것을 실행하는 바로 그 과정이 언제나 만남, 경계지대, 저항 및 혼종화, 문화적 차이의 주장과 같은 식민적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근대의 지배적 형태가 자신을 완성하는 것에 실패하며, 그 결과 플루리버스에 대한 제안, 탈식민적 관점에서 '다른 방식의 세계와 지식'이라고 불리는 것이 낳는 우연성이 나타난다. (164~165쪽)

 

역자가 해제에 적었듯,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라틴아메리카의 논의들을 줄줄 풀어놓는 것도 엄청난 강점이다.  

 

근대성은 모든 문화의 마지막 상태도 아니며 제도적 창조성에 등장하는 마지막 단어도 아니다. 어느 날 탈근대사회와 탈근대 의식이 출현할 것이고, 그러한 사회와 의식은 근대에 토대를 두기보다는 비근대 혹은 전근대 세계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건설될 것이다. 
하지만 아쉬스 낸디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수호하는 것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문화들 사이의 대화다. 낸디는 잃어버린 혹은 억압된 서구를 복원하고 이를 위해 싸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물론 가부장제와 같은 형태의 억압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호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형태의 전통이 오늘날 미래와 지속가능성, 그리고 비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없냐고 이제는 질문할 수 있다. 다행히도 문화들은 그것을 번역하는 이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열려 있고 자기반성적이다. 
볼리비아 학자 실비아 리베라 쿠시캉키는 '감싸안은 사회 sociedades abrigadas'의 개념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선주민 및 민중 문화의 역량을 언급한다. 이들이 지배적이기보다는 공존을 지향하는 자신만의 근대성을 가꿔왔다고 분석한다. 선주민과 지역의 습관을 지역적이지 않은 것과 교직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역사에서 영양분을 찾아온 결과, 하나로 완전히 섞이지는 않는 여러 다른 문화의 가닥으로 구성된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228~229쪽)

최근의 전환 담론은 '지각 pansentience'이라는 사고를 강조하는데 이는 장소에 기반한 선주민들에게는 익숙한 사고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의식과 의미의 소유자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지질신학자로 칭하는 토마스 베리는 정부, 기업, 대학과 종교라는 대체되어야 할 네 가지 축을 설정한다. 베리와 허먼 그린은 산업 경제에서 생태문화 시대, 생태학적 문명으로의 이행을 제한한다. 베리와 마찬가지로 그린은 세계의 창조 과정에서 지구를 활동적인 참여자로, 운명적 변화를 행동이 요구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파악한다. (252~255쪽)

포스트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가지의 중요한 영역은 '잘 살기' 혹은 '더불어 잘 살기'의 뜻을 가지며 케추아어로는 수막 카우사이 sumak kawsay, 아이마라어로는 수마 카마냐 suma qamaña로 불리는 부엔 비비르와 자연의 권리이다. 
부엔 비비르는 선주민의 투쟁으로부터 성장했는데 이후 농민, 흑인, 환경론자, 학생, 여성, 젊은이들의 사회 변화 아젠다와 결합된다. 2008년 2009년 각각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헌법으로 명문화되면서 부엔 비비르는 그 자체로 새로운 형식의 삶을 집단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부엔 비비르가 순수하게 안데스의 문화 정치 기획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는데, 그것은 서구 사상 내의 비판적 조류에 영향을 받았으며 전 지구적 토론에 영향을 주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262~263쪽)

전환에 관한 연구는 전환이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발현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들은 자신과 타자가 상호 활동하면서 구성되는 역동적 과정에 의존한다. 발현 emergence은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데 지역적 행위의 복합성이 낳은 결과로 나타난다. (269쪽)

비이원론적 존재가 일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분리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에 속하면서 이 세계를 끌어들이는 참가자이자 디자이너라는 현상학적 통찰이다. 안다는 것은 관계한다는 것이다. 마푸체의 시인이자 샤먼인 아드리아나 파레데스 핀다가 채플힐 대학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세상을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279쪽)

대지는 명령하고 민중은 주문하며 정부는 복종한다. 그렇게 자치를 건설한다. - 사파티스타 슬로건 (293쪽)

콜롬비아 같은 나라들에서 보여주는 선주민과 흑인들의 장구한 역사적 저항에서 자치는 문화적 생태적 정치적 과정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계획을 갖는 것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지구적으로 조직된 범죄 시스템의 일부가 될 것이다." 콜롬비아의 주요한 선주민 조직이 작성한 문서의 내용이다.
2005년 사파티스타의 유명한 라캉도니아 밀림에서 보낸 여섯 번째 선언과 같은 시기에 오아하카에서 일어났던 자치 운동을 에스테바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은 오아하카 사람들 자신의 전통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성격과 시각 세계를 보는 방식은 엄밀히 말해서 동시대적이다. 그것은 뿌리와 가까운 지구적 수준에서 나온다." (308~309쪽)

쿠시캉키는 자유주의와 공동적 형태 사이의 긴장이라는 측면에서 1780~1781년에 일어난 투팍아마루와 투팍카타리의 유명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선주민의 투쟁을 해석한다. 이 두 형태 사이의 긴장은 식민적 지배관계의 연쇄고리로 직조되었기에 볼리비아 역사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이 역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데 모랄레스의 당선 이전인 2005년의 강력한 저항 운동은 1781년의 사건, 즉 카타리를 절단하여 죽인 후 그의 시체 각 부분을 선주민 사회의 공적 공간에 전시한 것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선주민 사회에서 파편화된 몸을 다시 결합하려는 정치를 위한 열망을 낳은 것과 겹쳐진다.
라파스에 인접한 아이마라 선주민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 엘알토는 30년이 채 되지 않아 인구가 100만 명으로 성장했다. 제프리 삭스가 제안하고 군부 정부에 의해 승인된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쫓겨난 많은 숫자의 농민 이주자들이 거주하게 된 이 도시는 사회학자 펠릭스 팟지 파코에 의하면 '공동적 사고를 위한 학교'가 되었다. (319쪽)

공동체 그 자체에 호소하는 것은 근대인들이 무시하던 것과 달리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반대로 공동체는 집단의 에너지를 소환한다. 서발턴이라는 위치로 인해 이 공동체들에서는 불가피하게 이질성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 연대성, 그리고 저항이 나타난다. 공동체의 내부적 다양성이 극심한 억압과 분열이라는 압력 아래에서 다툼과 해체를 초래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확장하는 능력을 지닌 상호 문화적 다양성을 형성할 수 있다.
민중 공동체와 소수 인종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적 탈식민 페미니즘보다 더 명확한 예는 없을 것이다. 아이마라 지식인이자 운동가인 훌리에타 파르데스에게 공동체적 페미니즘은 탈가부장제와 탈식민화라는 한 쌍의 목표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틀에서 공동체는 생명을 배려하기 위한 포괄적인 원칙으로 이해된다. (325쪽)

탈식민화된, 그리고 자유로운 중간계급의 도시적 근대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명령은 재영토화와 함께 다시 공동적인 것을 구성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세계가 지속하도록 도움을 줄 선조들의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필요한 질문은 어떻게 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다시 공동적인 것을 만들어내는가이다.
우리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의 네트워크, 더 정확하게는 교직과 직조 속에서 매듭 혹은 계주자로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씨앗으로서 커먼즈를 구축할 우정과 사랑이 존재한다. 
글로리아 안살두아는 많은 이들이 현재 직면한 조건을 서로 다른 지각과 신념의 체계 사이의 중축된 공간, 즉 네판틀라 Nepantla 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파악했다. 
안살두아에게 네판틀라가 되는 것은 두려움이나 닫힌 경계를 만드는 요인이 아닌, 가능성의 공간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부족주의'를 상상하고 창조하기 위한 근거가 된다. (354~355쪽)

비판적 학자들의 공통된 전략은 바로 근대성을 복수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존재한다. 유럽의 다른 근대성과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성, 중국 및 아랍의 근대성, 혹은 여러분들이 이름 붙이는 무엇이건 전 세계에 걸친 대안적 혹은 복합적 근대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의미가 크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위험은 오직 하나의 세계 혹은 실재라는 전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성이라 불리는 근대의 지배적인 방식을 재도입하는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어떤 잘못이 있어도 근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371쪽)

베닌만으로부터 유래한 판티-아샨티 전통에서 양성을 다 가진 거미의 신 아난시는 끊임없이 삶을 교직한다. 정복과 노예화 이래로 아난시의 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통합하며 콜롬비아의 태평양 지역에서 아난시는 배에서 꺼낸 실로 조각난 정글과 구불구불한 강어귀를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아난시는 생존과 충만함의 메타포다. (375쪽)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선주민과 서벌턴에게 이 거대한 변신은 다름 아닌 파차쿠티이다. 파차쿠티는 존재하는 사회 질서를 심도 있게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것으로, 갑자기 벌어지는 행위 혹은 지식의 등장에 의한 위대한 종합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 질서를 끊임없이 흔들며 변화하는 점진적인 확장이며 그 자체로 불연속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파차쿠티는 역사적인 시간에 역전을 초래하는데 파국 혹은 재생에서 정점을 이루는 과거와 미래의 반란이다. (397쪽)
저는 전 지구적 남반구의 영토에서 풍부하게 나타나는 개인과 공동체의 새로운 문화적 체계를 연구하는 다양한 비본질적 개념과 방식을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아킬레 음벰베의 아프로 정치, 실비아 리베라 쿠시캉키와 베로니카 가고의 다채로운 사회, 바로크 경제와 활발한 실용주의, 리타 세가토의 지구촌의 식민 근대 포착하기가 포함됩니다.
특히 다채로운 논리에 관한 개념 부분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변두리에 있는 대규모의 비공식 시장인 라살라다의 바로크 경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421~422쪽)

사회운동과 저항에는 일정 정도 향토성과 민족성의 경향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가 허구라는 지적이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도시학자인 동시에 디자이너인 펠리페 코레아의 최근 저작은 자원에 대한 채굴 경제와 도시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도시에 대한 상상은 두 가지 극단 사이를 배회합니다. 한편으로는 도시를 모든 악이 튀어나오는 판도라의 상자로 파악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를 유일한 형태의 혁신 창의성과 문화로 보는 경향입니다. 도시를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비지속가능성의 기계와 다시 전유해야 하는 혁신의 장소 사이로 파악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438~439쪽)

 

결국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사고 말았다. 토니 프라이의 책은 절판됐는데 중고 가격이 후덜덜이라 못 샀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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