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인권연대] 국가의 잘못, 국가의 역할

딸기21 2022. 11. 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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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서울 이태원을 지나가는데 극우 시위대가 집회를 하고 있다. 기사 아저씨가 물으신다. “그래서, 누가 잘못한 거예요?” 


참사의 원인은 무엇이며 누가 잘못한 것일까. 핼러윈이라고 놀러왔던 사람들? 현장에 배치되지 않은 경찰? 하필이면 빨간색으로 구청장의 소속이 바뀌어 늘 하던 축제 대비도 제대로 못한 용산구?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느닷없이 ‘용와대’로 옮겨가 안전을 놓치게 만든 대통령?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조차 ‘미제 귀신’ 씌운 사람들을 탓하는 걸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놀러왔던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아무도 그런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이태원 골목에서 150여명이 목숨을 잃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테니까. 공교롭게도 사고가 난 그 길은 나도 종종 지나치는 곳이고, 참사 2주 전 이태원에서 세계문화축제가 열렸을 때 나도 거기 놀러 갔었다. 


대규모 압사사고는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는 자주 발생한다. 인도에서는 거의 서너 해 간격으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라크에서는 2005년 테러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이 우르르 대피하다가 1000명 가까이 숨졌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15년 순례객 2400명 이상이 참극을 맞았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는 2010년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350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 브라질에서는 나이트클럽에 불이 나자 출구에 사람들이 몰려 240여명이 사망했다. 비슷한 일로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에서는 2003년 100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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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한 달 전에도 인도네시아의 축구장에서 13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포털사이트 뉴스 기사에는 ‘후진국형 참사’ ‘수준 낮은 나라’ ‘미개하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경멸과 차별을 담은, 한국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에 대한 편견이 담긴, 인종주의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비난들이다. 하지만 그런 비난들에도 부인할 수 없는 본능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라는 통찰 말이다.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을.


택시 기사 아저씨의 질문에 우리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저런 참사는 국가가 막았어야 했다, 주말 외출한 사람들이 생명을 걱정하는 나라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라고. 그러나 사고가 나면 어디서나 정부들은 일차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애쓴다. 대규모 참사 때마다 거론되는 영국의 1989년 ‘힐스버러 압사사고’가 딱 그런 예였다. 100명 가까이 숨진 이 사건 뒤 정부는 ‘축구장에서 난동을 피운 훌리건들’을 탓하면서 은근슬쩍 사망자들에 훌리건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언론도 정치인들도 거들었다. 하지만 유족들은 편견과 선동에 맞서 싸웠고, 국가의 역할이라는 핵심 이슈로 여론을 끌고 갔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고 이듬해와 그 다음해 2년간 정부가 조사를 했고, 부실하다는 지적에 다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의회 청문회가 열려 경찰의 대응과 축구팬들의 구체적인 행위와 긴급구조와 사고 뒤 수습까지 전 과정이 공개됐다. 영국 축구장들의 안전조치들이 도마에 올랐다. 그럼에도 조사는 여전히 부실했고 유족들의 슬픔과 분노는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다. 노동당으로 정권이 바뀐 뒤인 1997년 다시 내무장관이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그걸로도 끝나지 않았다. 2009년 다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당국의 총체적 과실을 인정한 최종적인 판결이 나온 것은 참사 이후 27년이 지난 2016년이었다. ‘후진국형 참사’가 일어난 영국을 그래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지난했고, 2010년에조차 영국의 문화체육부 장관은 힐스버러 사건의 책임을 축구팬들에게 떠넘기는 발언을 해 비난을 받았다. 그 사람은 보수당 정권의 핵심 실세가 돼 주요 장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총리에 이은 2인자 재무장관이 돼 있다. (실은 ‘후진국’이라는 말도 한국에서만 유독 쓰이는 용어다. 나라들을 줄세워 선진국 후진국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유엔 같은 국제기구들이나 학자들이 쓰는 용어는 ‘개발된 나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식으로 돼 있다.)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2016년 영국을 찾아간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 아픔을 나눴다. 힐스버러 유족들이 보여준 연대의 표시는 따뜻했고, 고마웠다. 또 다시 한국에서 참사가 일어나자 힐스버러 생존자로서 재난관리 전문가가 된 사회학자 앤 에어 박사는 10.29 참사 뒤 한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며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위로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참사’가 아닌 ‘사고’라는 규정한 정부를 질타했고, 당국의 부실대처를 인권위원회가 직권조사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주최자가 없어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사고’라는 태도를 보인 정부를 질타했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까지 시작됐다. 그러나 분향소 순례를 마친 대통령은 비극의 깊이를 가늠해보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이며, 대통령 부인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병에 걸린 아이를 끌어안고 ‘빈곤 포르노’를 찍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맞아 ‘K방역’이 세계의 찬사를 받았고, K팝의 명성은 이젠 뉴스도 아닐 정도다. 한국은 국제기구가 콕 집어 말해주기 전부터도 발전된 나라, 잘 사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10.29 참사로 실체도 없는 ‘국격’이 떨어진다거나 혹은 갑자기 우리가 다시 ‘후진국’으로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사람들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는 그런 평가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월호 사건과 그 처리과정이 남겨준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또 다시 참사가 일어나니 모두의 마음에 회복불가능한 상처가 덧씌워지는 것이 마음 아플 뿐이다. 무능한 정부가 들어서면 언제고 참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정도로 무능한 정부가 언제고 다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 비극적일 뿐이다. 


‘참사’를 ‘사고’로 이름붙이고 국민들의 눈을 가리기에 급급한 정부가 아닌 더 나은 정부를 가질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아픔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위로와 공감을 건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태원에 다녀오는 길, 택시에서 내려 그 골목 앞을 걸었다. 도로를 덮은 꽃들 사이로 “형의 죽음, 반드시 밝힐게”라고 적힌 팻말이 보인다. 나는, 우리는 분명 이 상처로부터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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