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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청>

딸기21 2023. 7. 2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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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윌리엄 T. 로, 기세찬 옮김. 너머북스. 7/8

 

지금 역사가들은 40~50년 전과 매우 다르게 청 제국을 이해하고 있다. 1950~1960년대에는 학계에서 '청의 역사’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중국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중국의 과거를 계속 이어지는 통치 가문들의 관점에서 체계화해왔다. 1912년에 탄생한 중화민국 정부도 청 왕조의 정사를 편찬했다. 1927년 청 제국의 관료였던 조이손(자오얼쉰) 주도하에 <청사고>가 발간되었다.
그렇지만 유가적인 시대 구분법은 20세기 후반까지 서양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 미국에서 실질적인 중국 근대사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하버드 대학교의 존 킹 페어뱅크는 지난500년의 중국 역사를 1842년을 경계로 나누는 관점을 고수했다. 페어뱅크에 따르면 1842년 이전은 '전통적 중국'이었고, ‘근대적 중국'은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이라는 서구의 충격과 함께 시작했다.
-12-13

1842년 이전 제국 후기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정체'되었으며, 진정한 발전적 변화는 단지 서구에 대한 중국의 대응으로 시작되었다는 생각 … 유럽 중심주의가 내재되어 있었는데도 중국의 사학자들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서구 제국주의가 중국 최근대사에서 유일한 지배적인 힘이라고 여긴 레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중국사회과학원은 아편 전쟁을 기준으로 연구 영역을 구분하여 역사연구소와 근대사연구소를 설립했다.
대만 역시 '근대화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국민당 당국은 청대사를 1842년 전후로 나누어 연구하도록 중앙연구원의 사학자들을 역사언어연구소와 근대사연구소로 분리했다. 2차 대전 후 일본의 연구자들도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도쿄대학교의 학자들은 ‘근대' 중국이 아편 전쟁과 함께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아편 전쟁의 분기점을 고려하지 않고 청의 역사 전체를 커다란 하나로 연구하려고 했던 급진적인 학술적 시도는 .. 그 성과물은 바로 당시 예일 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던 조너선 스펜스가 1965년에 만들었던 <청사문제>라는 도발적인 이름을 가진 회보였다. -14-15

 

역시 조너선 스펜스!

(넘나 사랑하는 스펜스의 책들: 현대 중국을 찾아서 / 천안문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 왕여인의 죽음 / 칸의 제국 / 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 )

 

지난 반 세기 동안 청대 역사학 방법론의 진전에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70~ 1980년대에 천천히 진전되었던 사회사로의 전환이다. ... 중국사 영역에서는 아날 학파의 영향이 다소 늦게 나타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연구자들이 집대성했던 방대한 사회경제사 전집을 미국 연구자들이 조금씩 흡수하면서 촉진되었다. 이후 청 제국의 막대한 공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당안관(문서 기록 보존소)이 1970년대에 대만에서, 1980년대 초에 북경에서 외부 연구자들에게 개방하면서 아날 학파의 영향이 확대되었다. 
사회사 전환의 결과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역사학자들은 '서구에 대한 중국의 대응' 모델에 내재하고 있던 중국 근대의 도구적 관점을 비판하고, 중국 내부 역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금 학자들은 중국의 역사가 정체된 것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둘째 결과는 동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과 마오쩌등 이후 중국의 경제 기적이 뒷받침되면서 청의 역사를 실패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인식이 점차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뿐만 아니라 비교 사회학자들도 18세기 중엽의 청 제국이 대부분의 서유럽보다 더 번영한 경제와 매우 높은 생활 수준을 보유했다고 주장한다. 사회사 전환의 셋째 결과는 시대 구분의 영역에서 나타났다. 청대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 관점이 ‘전통'과 ‘근대’로 구분하는 경향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왕조 자체도 중국의 구조적 진화 과정에서 단지 표면의 잔물결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16-17

둘째, 청대 역사의 기초적인 재개념화는 '내륙 아시아로의 전환'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청을 하나의 역사 시기로서 재개념화하는 것과 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은 종족이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연구였다. 수정주의자들이 진전시켰던 주요 논의들은 ‘만주족'의 정체성이 그 자체로 역사적 구성체였고, 대체로 명을 정복한 후에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청사의 시각은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연구 영역도 제국의 변경 팽창사로 확장되었다. 연구 초점은 중국을 제국주의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는 대신, 18세기에 가장 활발했고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도 적극적이었던 제국주의 행위의 참여자로 바꾸어 바라보는 데 있었다. 신청사의 시각은 중국 중심적인 편견과도 맞서 싸웠다. 남아시아 역사가들이 이끈 민족주의적 탈식민주의 비평의 영향을 받은 신청사는 청대가 근대 한족 민족 국가의 출현을 위한 긴 도입부라는 관점과 더 나아가 민족 국가 역사의 필연적인 결말이라는 관점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20-21

청대 역사 서술의 세 번째 큰 변화는 '유라시아적 시각으로의 전환’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 변화는 대체로 두 번째 변화로부터 생겨났지만, 세계사와 생태사의 하위 연구에서도 유래했다. 이 분야에서 중국 역사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연계했던 주제는 이른바 '17세기의 전반적인 위기'로, 이것이 어떻게 명청 왕조의 전환을 갑자기 촉진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중화제국 후기에 끼친 이 위기에 관해 많은 학자들은 다국적 경제적 요인, 특히 금과 은의 국제적인 유통 불안정과 이른바 소빙기라고 하는 세계적 기후의 변화를 강조했다.
근대 초기 제국들의 비교 연구는 유라시아의 단일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켰다. 청은 고립된 예외라기보다는 새로운 통신 기술에 도움을 받은 행정적 중앙 집권화, 계획적인 다민족적 구성 요소, 적극적인 영토개척의 형태 면에서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로마노프 왕조, 심지어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들과 대체로 유사했다고 재인식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유라시아 세력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오래된 '유목 문화'를 봉쇄하고 압박했다.
-22-23

 

 

청의 부상은 아이신 기오로 Aisin Gioro 씨족에서 잇따라 등장한 세 지도자들, 즉 누르하치(1626년 사망), 홍타이지(1643년 사망), 도르곤(1650년 사망)의 업적이었다. '아이신'은 ‘금'을 의미하며, 금은 1115년부터 1260년까지 북중국을 통치했던 여진족 왕조의 이름으로, 아이신 기오로 씨족은 자신들을 금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명대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만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양한 중국 동북의 인구 집단들을 모두 통합하는 정체성은 없었다. 과거의 여진족이나 서쪽의 몽골족과 달리 아이신 기오로 씨족은 유목민이 아니었다. 요하 유역에서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를 거치면서 농경과 수렵이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고, 특히 모피와 값비싼 인삼을 매개로 하는 국제 교역이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17세기 초에 명은 유럽과 신대륙에서 들여온 은의 25퍼센트를 아이신 기오로 씨족에게 재수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역을 통해 얻은 수익은 화기를 비롯 한 무기를 확보하고 숙련된 무장들을 고용하는 데 사용되었고, 정복을 위한 자금 조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과 신하의 관계에 있었던 부족장 중의 한 사람이었다. … 부족들의 연합이 명에 중대한 위협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영구적인 제도화가 필요했다. 첫째 조치는 문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1599년 학자들에게 몽골 문자를 차용하여 여진어를 표기하도록 명을 내렸고, 만주어라 불리는 문자가 탄생했다. 더 결정적인 조치는 기 제도의 창설이었다. 처음에는 4개였다가 후에 8개가 되었고, 각각의 기는 부대의 단위이자 거주지와 경제 생산의 단위였으며 병사들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운영되는 과정에서 각 기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이라는 민족 집단과 일치되어 갔다. 중세 서남아시아의 맘루크처럼 팔기의 군인들은 법적으로는 모두 노예들이었다.
-36-38

기존의 관점이 본래부터 분별 가능한 만주족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면, 신청사 담론은 왕조가 흘러가면서 만주족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건륭제를 비롯한 황제들의 노력들은 기원 신화, 민족의 언어와 문학, 일련의 뚜렷한 문화적 특색을 규정하여 만주족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 이 새로운 담론 자체도 과장되어 있다. 2세대 학자들은 적어도 동시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왕조가 건국되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민족적 또는 인종적 차이가 실재했다고 주장한다.
-34-35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은 다른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여진인,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 통치자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칸 중의 칸(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은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그리고 추측건대 '세계 제국'이었다.
-41-42

 

타이난의 질란디아 요새(熱蘭遮城).


태은이랑 타이난 여행갔을 때 들렀던 질란디아 요새와 정성공 이야기도 나온다.

[201904] 타이난, 안핑의 오래된 골목들과 나무 집

 

청은 자신들을 도와준 정지룡을 우대하기는커녕 체포하여 북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청은 15년 동안 정지룡을 인질로 잡고 있었고,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지자 1661년 처형했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아버지보다도 명에 충성을 다했다. 1658년에 그는 강남을 공격했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장악했다. 1659년 정성공은 남경을 공격했으나 많은 사상자만 발생했다. 이듬해 청은 정성공의 하문 기지를 포위했다. 청의 포위는 무위로 끝났으나 정성공은 중국 본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수십 년 동안 네덜란드와 정성공 정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1661년 4월 30일 정성공은 900척의 배와 함께 대만 해안 안평에 있는 열란차성 앞에 나타났다. 무사히 입성한 그는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1662년 2월 1일에는 네덜란드가 대만에서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로 철수한다는 협정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정성공은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그는 우울증에 빠졌고, 결국에는 자살했다. 그의 아들 정경이 이끄는 정권은 1683년 강희제가 지시한 대규모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54-55

 

저자는 과거 청 제국을 낮잡아 봤던 서양 역사학자들의 시각과 이를 재검토한 후속 세대 연구자들의 시각을 계속 비교한다. 이전에는 못났다고만 했으나 사실 청은 계속해서 스스로 진화해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청 제국에 대한 역사적 해석 자체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중화제국은 정복될 수는 있지만 영원히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긴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와 견줄 만한 규모의 어떠한 정치 체제, 즉 서양에서의 로마 제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 이슬람 세계의 맘루크 왕조나 오스만 제국, 중앙아시아의 몽골 제국도 그렇게 오래 살아남지는 못했다. 
천자가 제국이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당, 송과 명말청초에 제국의 생산성을 크게 확대시켰던 경제적 개혁 덕분이었다. 성장하는 경제적 생산성과 더불어 병참도 성공을 거두어, 청 제국의 예산은 사회 전체의 경제 생산에서 낮은 비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잘 작동했을 때 청의 행정은 저비용으로 유지되었다.
명은 상인들이 배로 운송해온 곡물의 양에 비례하여 소금 독점 판매권을 승인해 줌으로써 북쪽 변경을 따라 배치된 군 주둔지에 저렴한 비용으로 곡물을 조달할 수 있었다. 덕택에 제국은 저비용 소규모 상비군으로 거대한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다. 최고조로 팽창하던 시기에 청 제국은 팔기와 한족 녹영을 포함한 100만 명의 상비군으로 4~5억의 인구를 안정시키고 방어했다. 군사 분야에서의 효율성만큼 중요했던 것은 전체 사회와 경제의 규모에 비해 민정 관료를 작은 규모로 유지할 수 있는 제국의 능력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도구로서 이학(신유학)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국가 차원에서 이용한 것이었다. 
-66-67

 

<보보경심>의 강희제.

 

'성세' 챕터를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 강희와 건륭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던 옹정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근래의 추세이고, 저자의 시각도 그렇다.

 

13년밖에 안 되는 옹정제의 치세는 청 제국, 나아가 중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아버지 강희제와는 달리 허세와 과시욕, 그리고 정제된 지적,  심미적 취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옹정제는 자신과 비슷하게 바른말을 하는 하위층의 만주 귀족과 배경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변경 출신의 한족 관료들을 종종 주변에 두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계획에 대한 그들의 비평을 들었고 합의 제와 실용주의 정신으로 일을 진행했다.
옹정제 치세의 기본적인 성격은 '엄격함’이다. 그러나 그는 호전적이거나 잔혹하지는 않았다. 위험스러운 군사 정책을 펼치지 않았고, 범죄자들을 비교적 관대하게 다루었다. 그의 엄격함은 비용이나 저항에 상관없이 관료 행정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중앙 집권 을 확립하려 했던 완강한 추진력을 일컫는 것이었다. … 요컨대 옹정제는 처음으로 초기 근대 국가를 만든 사람이었던 것이다.
1735년 홍력은 할아버지처럼 어리지도 않고 아버지처럼 나이 든 것도 아니었던 25세에 황위를 물려받았다. 건륭제는 아버지의 엄격함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통치는 관대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황위에 오른 후 약 15년 동안 옹정제 치세의 많은 정책들을 뒤바꾸었다.
-124-125

건륭제는 과시의 측면에서는 경쟁자가 없는 군주였고, 항상 눈에 띄는 제국의 모범적 중추였으며, 훌륭하게 성세를 이끌었던 근면하고 견실한 통치자였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의상들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즐겨 그리게 했다. 예를 들면 티베트 불교를 믿는 백성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불교 보살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도록 했고, 예수회 궁정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는 유럽식의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다.
건륭제는 만리장성 북쪽 승덕에 있는 황제의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에 청 시대의 대중 건축 양식을 상징하는 웅장한 정원을 건설했다. 티베트 양식을 잘 보여주는 소 포탈라 궁, 강남 풍경의 남중국 사원을 비롯해 다른 여러 건물들이 지어졌다. 건륭제의 허세를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795년의 퇴위였다. 60년의 재위 이후 그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치세 기간보다 하루 전에 자신의 치세를 끝냄으로써 조부에 대한 자신의 효심을 연출했다.
-131

 

<보보경심>의 옹정제.
<후궁견환전>의 옹정제.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두 드라마의 옹정, 더더욱 충격과 경악이었던 것은 오기륭과 진건빈이 동갑(1970년생)이었다는 사실...


* 옹정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에 아마도 가장 크게 기여했을, 조너선 스펜스의 <반역의 책>

 

건륭에 관한 재미난 에피소드.

 

정은 정보 소통에 많은 주의를 기울었는데 … 군기처의 설치와 함께 주접이라는 보고 체계가 따로 만들어졌다. 황제는 6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조로 올라온 주접을 군기처와 상의하여 살펴보았고, 지침이나 실행 방안을 내각과 담당 부서로 하달했다. 주홍색 먹물을 찍은 붓을 사용해서 황제는 대개 각각의 주접에 의견을 달거나 '주비(주접에 대한 황제의 답)'를 내렸다. 주비는 종종간단하게 ‘알았다'로 썼으나 관료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고 싶었던 황제는 매우 사적인 구어로 주비를 작성해서 관료들을 자극했다. 건륭제가 휘갈겨 쓴 다음의 예가 그 전형이다.
"형부에 근무할 때 너는 훌륭한 관료였다. 그런데 그 성에 부임하자마자 우유부단하고 부패한 타성에 물들 었으니 정말 가증스럽다...너는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보고한 문서에 진실한 말은 한 글자도 없도다. 너는 진실로 짐의 신의를 저버렸으니 배은망덕하도다!"
-80-81

 

<연희공략>의 건륭제.

 

하지만 그래도 건륭제라고 하면, 전설의 이 아저씨가 나와줘야지!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 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 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 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100-101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청의 국내 무역은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잘 발달되어 있었다. 대략 11~13세기 송대의 상업 혁명 시기에 동남아시아와의 외국 무역이 시작된 것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장거리 무역이 이루어졌다. 상인 계층이 출현해 혁신적인 조합을 만들어 자본을 축적했다. 그러나 송의 상업은 중요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지역 간 무역에서 많은 양을 차지한 것은 비단, 향신료, 약초, 그리고 자기, 칠기, 금속 세공류 같은 등의 사치품들로, 대부분 도시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중국은 첫 번째 상업 혁명보다 더 혁신적인 두 번째 상업 혁명을 겪었다. 이 시기에 상업화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지방의 농촌 사회까지 침투했다. 처음으로 수많은 농가들이 상당한 양의 곡물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고, 일상 소비품의 수요를 시장 교환에 의존했다. 18세기 말에는 곡물의 10퍼센트 이상, 면화의 25퍼센트 이상, 면직물의 50퍼센트 이상, 생사의 90퍼센트 이상과 차의 대부분이 시장 판매를 위해 생산되었다.
-220-221

서양 학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이 고의로 상업을 저해하는 정책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아이신 기오로 씨족과 그 동맹자들은 상업 활동의 이익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청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민생의 향상에 전념했다. 가파르게 증가한 인구는 정부에 모든 경제 분야의 육성을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청은 이전의 어떤 중화제국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무역에 신경을 썼다.
-235

 

청 말기,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무렵 상인들의 이야기를 묘사한 <나년화개월정원(那年花开月正圆)>. 한국어 제목을 <꽃 피던 그 해 달빛>으로 넘나 아름답게 번역했다.

 

경제를 설명하면서 환경생태학적 관점을 추가한 것 역시 요즘 동향+이 시리즈의 <원, 명>과 일맥상통.

 

자기는 강희제 시대에 기술적 발전의 정점에 도달했다. 17세기 말 강서성 북동쪽 경덕진에서 생산되는 양은 명말의 최고점을 회복했고, 곧 능가했다. 청대 중기 경덕진에서 생산된 많은 자기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시장으로 수출되었다. 건륭제 말기에는 자기 수출 시장이 유럽 제조업자들과의 경쟁 때문에 심각하게 침체되기 시작했다. 유럽 제조업자들은 유럽에서 새롭게 발견된 고령토와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 같은 산업스파이가 중국에서 훔쳐 온 제조 기술을 활용했다. 
-151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되는 구조적 변화를 겪었던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크게 증가한 지역은 도시들과 주변 농촌이었다. 청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외딴 국경 지대와 고원 지대에서 개간으로 인구가 급증했다.  청 조정은 의도적으로 서쪽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1720년대 사천성의 인구 중 70~80퍼센트가 토착민이 아니었고, 100년 후에는 그 비율이 85퍼센트 정도로 올라갔다. 청대의 사천성에서 일어난 사회적, 문화적 혼합은 연쇄적이고 복잡하면서 긴장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1750년대와 1760년대에 신강을 정복한 이후 건륭제는 의도적인 농업 식민화 정책을 시행했다. 식민지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교도·기인·한인들로 구성된 군사 식민지, 유배 범죄자들의 식민지, 그리고 자유민들의 식민지가 있었다. 
여진족이 발원한 동북부로의 이주는 처음에는 서북부보다 느리게 진행되었다. 1668년 이전에 청 조정은 요동의 식민화를 장려했고, 1670년대와 1680년대에는 길림성과 흑룡강성 변경 지역에 약간의 식민지 개척자들을 보냈다.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2500만 명이 산동성과 하북성에서 만주로 이주했다. 이는 근대에 나타난 가장 거대한 인구 이동 중의 하나였다.
-167-168

농지 개간을 향한 열정은 식량 생산을 크게 증가시켰고, 18세기 말까지 급격한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개간이 낳은 예상하지 못한 재앙은 생태 환경의 황폐화였다. 화북 평원의 황하와 수로들은 만성적으로 범람했지만, 화중과 화남의 잘 정비된 양자강과 하천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청 중기와 후기에 전체적으로 생태 환경이 파괴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영구히 바뀌었다. 문제는 화중에서 가장 큰 두 호수인 호남성의 동정호와 강서성의 파양호의 호수 유역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172


청의 팽창과 그 필연적 결과인 민족 문제, 분리주의.

 

다민족 국가인 청의 민족 정체성 문제는 이전의 왕조에서는 없었던 논쟁거리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의 통치자가 비한족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엄청난 제국주의적 팽창이다. 이로 인해 민족 분리주의라는 골칫거리가 생겨났다. 세 번째 이유는 주변부와 변두리 지역을 내지로 편입시킨 것이다.
-179

객가는 남쪽으로의 이주 시기 막바지에 화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후손으로, 몇백 년 동안 근친 결혼과 고립된 생활로 다소 독특한 외모와 방언, 음식, 전족을 거부하는 등의 사회적 관습을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청 중기는 객가에게 우호적인 시대였다. 그들이 생산하는 물품에 대한 수요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옹정제와 건륭제 초기에 일어난 채광 열풍은 오랫동안 고지대 생활에 적응했던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부유해진 객가 남자들은 학위를 얻고 청의 문화적 엘리트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되어서 '객가'라는 신분 자체가 널리 용인되기 시작했고, 19세기 초에 새로운 객가 지식층의 지도 아래 지리적으로 흩어져 살던 객가인들에게 일종의 우월적이고 자존심 강한 문화적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적극적이었고, 태평천국 운동과 1911년의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

19세기 중반 함풍제 연간에는 서부 국경에서 대규모의 분리주의 운동도 일어났다. 분리주의자들은 다양한 문화적 기원을 가졌지만 청 조정은 그들을 모두 회족으로 범주화했다. 
만주족 안찰사가 민족 청소를 명령하면서 1856년 5월에 운남성 곤명에서 이슬람교도 40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저항이 점점 거세졌고, 티베트와 미얀마로 가는 주요 교역로에 위치한 다문화 도시 대리에 본거지를 둔 이슬람 국가가 분리 독립했다. 이것이 ‘판타이 난’이었다. 운남성의 인구를 500만 명가량 죽이고 난 1873년에야 이 반란을 진압했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18세기에 잔인하게 정복한 북서부 신강에서는 카리스마적인 이슬람 전사 야쿱 벡이 이끄는 자치 정권이 생겨났다. 이 정권은 영국과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 1877년에 야쿱 벡이 급사할 때까지 존속했다. 좌종당이 야쿱 벡 정권을 토벌했으며, 이때 소모된 비용은 1870년대 말 청의 1년 총예산의 17퍼센트에 달했다. 좌종당이 거둔 성과는 단순한 반란 진압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광대한 이슬람 중앙아시아의 재정복이었다.
신강 재정복에 대해 한족 지식인들은 재정 낭비라며 비난했다. 반대의 주역은 이전에 좌종당과 함께 태평천국군 진압을 위해 협력했던 이홍장이었다. 18세기의 전쟁과는 달리, 1875년의 신강 정복은 통일된 제국을 만들려는 성전포도 아니었고,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 군인들은 청 제국에 복무하는 다민족 기인들도 아니었다. 좌종당은 호남성 출신의 신사이자 민병대의 지도자였고, 신강을 정복한 것은 그와 그의 호남군(초군)이었다.
위구르족과 몽골족의 토착 지도자들은 정규 관료인 지현들(절반 이상은 좌중당의 동료 호남인)로 대체되었다. 또한 정주 농경을 위해 중국인 수천 명(이 역시 호남인들이 대부분이었다)이 이주했으 며, 중국식 유교 학당 조직이 설립되었다. 이 거대한 지역은 한 세기 이상 청 제국의 일부로 간주되었지만, 중국화된 것은 처음이었다. 1884년에는 이홍장이 항의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성으로 선포되었다.
-368-369

 

청 후기의 사회상.

 

19세기 초가 되면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은 최소한 상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고, 저명한 남성 학자들과 함께 문화적 정치적 문제들을 토론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산문체 소설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여성들은 작가, 평론가, 독자로서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재정립했다.
성에 관한 또 다른 쟁점은 여성의 전족이었다. 정복 직후에 청은 이 관습을 금지했다. 전족의 금지는 한족 남성과 소년들에게 변발을 강요한 명령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청 제국 말기에 전족에 대한 반감은 유명한 쟁점이 되었고, 많은 지방에서 천족회(天足會)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남성 개혁가들은 전족이 야만적일 뿐만 아니라 인구의 절반에 해당되는 여성의 노동력과 잠재력을 낭비하는 것이며, 낡은 중국의 모든 역기능적 특성을 완벽하게 상징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194-195

엘리트들은 이웃들에게 사회적 규율을 강요하는 효과적인 수단을 찾게 만들었고, 종족의 건설은 그 해답을 제공했다. 그러나 종족은 단지 반동적이거나 방어적인 사회적 전략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청의 종족은 생물학적 혈통에 근거했지만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물이었다.
종족 조직은 평민들에 대한 엘리트들의 통제를 위한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이점을 제공했다. 그중 하나는 지리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친족들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공동재산, 즉 족산의 소유는 또 다른 장점이었다. 많은 종족들은 종족 조직을 통해서 공동의 자본을 동원하고 관리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종족 위탁 기금은 광동성의 주강 하류 해안 지대에 논을 개간하는 자본 집약형 산업과 사천성 남부의 소금 채취 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이용되었다.
-209-210

 

그런데 청은 왜 흔들렸냐고?

 

케네스 포머란츠는 2000년에 출판되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저서에서 18세기 '성세' 동안 청 제국의 평균 생활 수준이 서양보다 더 높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19세기로 전환할 즈음 '대분기 great divergence’가 발생하면서 바뀌었고, 서양은 최소한 두 세기 동안 중국을 앞질렀다.
포머란츠는 이 분기를 청 제국이 실패해서 일어난 결과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발생한 것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서양에서 산업 혁명으로 촉진된 그 격차가 과거의 '진보'나 더 혁신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으로 특별한 '우연성'의 연속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노예 노동을 이용한 유럽의 신대륙 착취가 그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포머란츠의 주장들은 청 제국의 성취와 능력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했던 신청사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9세기로 넘어갈 때 청 제국 내부에서 제도적인 쇠퇴가 명백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19세기의 분기가 단순히 상대적으로 유럽에 뒤처지게 되는 문제만이 아닌, 내재적이고 절대적인 능력 상실의 문제였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19세기로 들어설 때 나타난 청 제국의 위기는 동시에 발생한 세 가지 문제들, 즉 팽창하는 서구에 의한 외부적 충격, 장기간에 걸친 사회·경제적 어려움들의 축적으로 촉발된 위기, 그리고 심각한 정치적 기능 장애가 연계되어 발생한 것이었다. 
-265-266

18세기 중반에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 대한 군사 정복을 감행했고, 영국 왕실로부터 수백만 파운드를 빌려야만 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 빚을 삼각 무역으로 갚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도에 있는 농장에서 재배된 면화를 청 제국으로 보냈고, 이로 인해 청에서는 방적·방직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광주에서 면화의 대가로 받은 차는 런던으로 운송되었고 차를 팔아서 챙긴 수익금은 영국산 제조품의 형태로 전환돼 인도에 있는 동인도 회사로 보내졌다.
18세기 말이 되자 청에서 인도산 면화 수요가 감소하면서(중국에서 직접 재배 하는 면화로의 대체와 청의 국내 경제의 침체로 인한 결과) ... 한 가지 대안은 신대륙의 은이었다. 영국 상인들이 런던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중국산 차를 재수출하고 여기에서 획득한 은을 광주에서 차를 구입하는 데에 이용하는 두 번째 삼각 무역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은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나타난 혁명적 움직임이었고, 보스턴 항구에서 버려졌던 것은 바로 중국산 차였다. 19세기 초반에는 은의 공급처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체품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영국인들은 인도산 아편에 눈길을 돌렸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광주를 통해 수입 되는 아편의 양은 10배나 증가했다. 영국은 이러한 교역이 비난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 선교사들은 일상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영국 왕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결국 아편 무역을 계속하게 되었다.
-293-294

아편 무역은 18~19세기에 서양의 작품에서 묘사된 청의 모습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보스턴의 작가 윌리엄 더글러스가는 1749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적인 실패를 비난하면서 중국은 도덕성, 예의, 공식적 정부, 생산적인 농경, 종교, 문자 등의 관점에서 "인류가 세운 모든 국가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보스턴 사람 새뮤얼 쇼는 "중국인들의 악행, 특히 상인 계층의 나쁜 행동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라고 썼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의 기본적인 태도와 시각 자체가 몇 년 사이에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증기 동력을 이용한 제조 산업의 출현은 대외 무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창출했다. '자유 무역' 철학으로 무장한 영국인들은 서양의 상업적 침투에 대한 모든 제한과 개인적 이동을 규제하는 광동 무역 체제를 즉각 포기하도록 청에 압박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296-297

 

태평천국 운동과, 그에 대한 해석의 충돌.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 서술은 팽팽한 이념 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 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326

태평천국 운동은 청의 군대보다는 지방의 신사들이 이끄는 지방군에 의해 결국 진압되었다. 이들 중에는 전시에 급제하여 학위를 소지한 호림익, 증국번, 좌종당이 있었다. 부유하고 박식하며 문벌이 좋고 열정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백련교도의 난으로 나타났던 새로운 전쟁 기술을 더욱 다듬어나갔다. 
-341

 

애로호 사건 뒤 1860년 가을 엘긴은 북경을 점령하여 함풍제와 조정이 만리장성 밖 피서 산장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엘긴은 자금성을 불태우려 했지만 도시의 북쪽에 있는 원명원을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엘긴은 아버지 토머스 브루스7세 엘긴 경이 엘긴 마블스를 가져왔던 것처럼, 당시 약탈한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져왔다. 여기에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전시된 청 황제의 옥좌도 포함되어 있었다. (338-339쪽)

엘긴 부자... 진짜 나쁜 놈들이네...

 

그리고, 비틀거리던 청의 짧았던 '동치 중흥'.

 

1860년 말 청 제국은 멸망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조정은 만리장성 밖으로 피난을 떠나 웅크리고 있었고, 외국 야만인들은 수도를 점령하고 원명원을 불태웠다. 그러나 청은 살아 남았다. 오히려 청은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함풍제가 병사한 뒤 복잡한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고... 패배한 파벌에 속했던 세 명의 친왕이 처형되면서 갈등은 마무리되었다. 승자는 권력층의 임시 연합이었다. 연합의 수장은 서열이 낮았던 함풍제의 후궁인 여허나라 씨 자희황태후, 즉 서태후로 새 황제 재순의 모친이었다. 함풍제와 황실 가족들이 도망을 갔을 때 북경에 남아 있었던 젊은 공친왕도 연합에 포함되어 있었다. 공친왕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뜻밖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서양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였던 증국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순의 연호는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로 동치라 선포되었다.
-356

1869년이 되면 청의 지식인들은 동치제의 치세(1862~ 1874)를 '중흥기’로 선언하기 시작했고, 조정은 이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페어뱅크는 몇 가지 요인들이 동치기를 청의 '근대화’를 이룬 시기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외교적 측면에서, 서양은 1858년의 천진 조약과 뒤이은 북경 조약을 통해 중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는 임무를 완수했다. 청 조정은 외교 사절을 서서히 외국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1861년 설치된 총리아문은 청의 실질적인 외무부가 되었고, 27년 동안 공친왕이 몇 차례 총리아문대신을 맡았다. 
청과 서양의 상거래는 매우 활발해졌다. 서양 상인들은 중국인 직원과 상업 중개인을 고용했고, '매판’이 출현했다. 개항장은 화북 해안과 양자강을 따라 화중 지역까지 개방되었다. '조계' 내에서는 복합적인 문화가 나타났다. 상해는 이 시기에 세계적인 상업 중심 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862년에는 청의 젊은 이들에게 서양 언어를 교육하고 유럽의 과학• 사회 • 정치 사상을 다룬 주요 저서를 번역하기 위해 경사동문관이 설립되었다. 
-357-358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에 대비되는 중국의 '실패'는 여러 해 동안 청말에 관한 역사 서술에서 주된 주제가 되었다. 대다수 학자들은 중국의 초기 산업화가 왜 실패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만 노력을 기울였고, 정작 실패의 여부는 따져보지 않았다.
20세기 말에 네 마리의 작은 용이 급속히 성장했고, 중국 역시 그러한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에 청의 자강 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문화적 배경에서만 찾는 것은 점점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실패의 원인을 경제학적, 인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흥미를 끄는 주장은 1972년에 마크 엘빈이 제기한 '고수준 균형 함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제국 후기 경제는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생산량을 높였다는 것이다.
변화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상위 단계의 기술, 즉 산업화로 이동할 유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엘빈은 이와 관련하여 '기술적 속박'이라는 주장을 덧붙여 내놓았다. 그는 치수 시설을 예로 들면서, 옛 기술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커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가 거의 불가능했으며, 옛 기술을 유지하지 않아 발생할 사회적 비용도 감당하기에는 매우 컸다고 주장했다. 
다른 원인은 중국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끼친 불균형한 영향일 것이다. 19세기의 서양 국가들은 일본 시장보다 중국 시장에서 더 탐욕스러웠으며, 군사력과 법적 권한을 동원하여 청을 세계 경제 안에서 '속국'이나 '주변국'의 지위로 격하시키려 했다. 그들은 중국에 투자해서 얻은 수익을 모국의 경제로 환수해갔다. 중국의 산업화 계획에 충당될 자금을 모두 가져가버렸던 것이다.
어떠한 원인을 강조하든 간에, 중국에서 20세기 말에 경제력이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1895년 이후 25년 동안 소규모의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자강 운동을 평가할 때에도 최근에는 이 시기에 거둔 몇몇 중요한 성과들을 강조하고 있다.
-382-383

영국, 러시아와의 분쟁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와의 갈등이었다. 1862년과 1874년의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라고 알려진 베트남 남부 지역을 할양받았고, 안남의 응우옌 왕조는 청에 보호를 호소했다.
이에 청은 비정규 무장 세력 흑기군을 조직했고... 1884년 서태후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해전이 결정적이었다. 8월 23일에 한 시간을 조금 넘겨 지속된 교전에서 프랑스군은 청의 최신예 함정 11척을 복건성 연안에서 격파했고, 제국의 최고 해군 시설이었던 복주선정국을 완전히 파괴했다. 프랑스군이 상해를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감은 한구처럼 깊숙한 내륙에 있는 기업까지 파산시켰고, 신용과 부동산 시장의 붕괴를 촉진했다. 이는 청 제국의 신흥 산업 기업가 계층을 몰락시켰다.
1885년 6월 청은 결국 항복했다. 프랑스가 대만에서 철수하는 대신에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소모된 전쟁 비용은 너무나 컸다. 자강 운동은 실패했고, 산업적 발전은 비참하게 좌절되었다. 공친왕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20년 동안의 신중한 외교와 청의 군사력 양성은 종말을 고했고, 청이 '속국'이라 주장한 나라들에 대한 박탈은 가차없이 진행될 것이었다.
-391-392

 

하지만 말기의 청 제국이 내내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라는 시각. 청의 제국주의적인 면모, 서양의 술책을 흡수한 청의 조선 개입 부분은 흥미로웠음.

 

1919년 5.4 운동 이후로 중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가들은 청대 중국을 서양 국가들, 그리고 일본의 격렬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은 피해자로 묘사했다. 물론 이런 묘사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런데 정작 청이 제국주의적 수법을 어느 정도 사용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청대 중국을 더 이상 피해자로 서술하지 않고, 대략 같은 시대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생겨났던 초기 근대 제국들(무굴 제국, 로마노프 제국, 오스만 제국, 대영 제국) 중의 하나로 묘사한다. 우리는 지금 이 제국들의 차이점보다는 제국들의 야심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인 광대한 영토를 관통하는 행정적 중앙 집권화, 의도적인 다민족성과 민족 경계의 초월, 그리고 특히 공격적인 공간적 팽창주의에 많이 놀라게 된다.
청은 명을 정복한 후 150년 만에 명 제국의 2배에 이르는 크기로 영토를 확장했고, 오늘날 중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물려주었다. 청의 팽창에 기여한 수많은 무인, 정치가,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정복 활동은 유럽의 경험과 동일한 '문명화 임무'의 일환이었다. 
-132

19세기 말의 조선에서 청의 외교는 '근대화한' 일본의 팽창주의적 위협과는 대조적으로 구시대적인 중국적 세계 질서 속에서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지연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 사대부 계층 내의 청 지지 세력을 유가 보수주의자로, 이에 대항한 친일 세력을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일본 팽창주의자들의 선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청이 조선에서 완전히 근대화된 서구식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청이 한 행동들은 오랜 한중 관계의 역사 속에서도 선례가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주의적 서구 열강들이 행했던 수법과 공통점이 많았다. 또한 청 제국 중흥의 일부로서 1880년대에 시작한 신강, 대만, 만주에서의 변방 지방화 정책과 유사했다.
중국은 이홍장의 막료인 위안스카이의 감독하에 일본의 독점적 제국주의에 대한 대책으로서 조선에서 일종의 다국적 제국주의를 강력히 추진했다. 1882년에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 독일, 중국 간에 이끌어낸 조약들은 조선에서 상업적 이익을 거두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이 국가들은 서구 열강이 청에서 실시했던 것을 모델로 여러 개항장과 외국인 직원을 둔 해관을 설립했다. 청과 그 이전의 어떤 왕조도 상업적 이익을 세계로 확장하기 위해 정부 기관을 직접 이용한 적은 없었다. 또한 청은 19세기 말에 서구 팽창주의자들이 채택했던 침투 수단들을 조선에서 그대로 활용했다. 외교 대표, 정부 고문이 파견되었고, 일종의 식민지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다.
-398-399

역설적이게도 청일 전쟁은 중국이 잠재적으로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남긴 것 같다.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자원 기반을 가지고도 국가 주도의 서구화 정책을 채택한 이후에 그렇게 빨리 강력해질 수 있었는데, 중국이 일본처럼 질서를 회복하게 되면 얼마나 더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인가?
-409

 

조계의 시대.

 

산둥반도 남쪽 해안의 교주 만을 99년 동안 독일에게 임대한다는 협상이 맺어졌다. 독일 식민주의자들은 재빨리 현대적인 도시인 청도를 건설했고, 1903년에 유명한 청도 맥주공장(틀림없이 중국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가장 긍정적인 생산물일 것이다!)을 건립했다. '조차를 위한 쟁탈'이 벌어지고 있었다.
1898년 초에 러시아는 얼마 전에 일본으로부터 '구해주었던' 대련과 여순에 대해 독일과 비슷한 조차를 요구했고, 결국 받아냈다. 이 근거지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요동 반도 전체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동 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위해위 조차권을 획득했다. 이곳은 한때 북양 함대의 기지였으며, 청일 전쟁 기간에 중국이 패배한 장소이기도 했다. 영국은 신계에 대한 조차도 요구했다. 구룡 반도에 인접한 주강 하류 지역이었다. 뒤질세라 프랑스는 해남도와 마주하고 있는 뇌주 반도의 어귀인 광주만을 조차했다.
20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소규모 해안 지역을 외세에게 할양하거나 조차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비밀 외교 및 신사협정이라는 정교한 방식이 나타나면서 청 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각국의 경제적 패권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암묵적으로 만주는 러시아, 산동성과 그 주변의 일부 화북 지역은 독일, 양자강 유역은 영국, 복건성은 일본, 중국의 남동쪽 인도차이나에 근접한 지역은 프랑스에게 넘겨졌다.
-414-415

 

신해혁명을 날름 받아먹은(?) 손문. 

 

1911년의 중국 공화혁명(신해혁명)에 대한 서양, 특히 미국 역사학자들의 시각은… 중국국민당의 정통적인 설명이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이 관점이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서술은 신해혁명이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목표, 즉 서양과 만주족 왕조에 대항한다는 목표를 강조했다. 또한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뭉쳐 혁명을 공모하고 지휘했으며, 이들의 정치적 연합이 국민당의 직접적인 선구로 간주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족주의적 서술은 '국부'이자 국민당의 아버지였던 손문을 부각시켰다. 손문의 이야기는 애국적인 미국인들에게 호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성공했다. 
-463

대조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서술에서, 몇십 년 동안 1911년의 혁명은 1949년 공산혁명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택동 이후 시기가 되면 1911년의 사건들이 중국공산당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노력들이 거대하게 뿜어져나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1911년에 일어났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민족 부르주아'에 의한 봉기였던 것이다. 
두 가지 서술은 다소 '손문 중심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손문은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에 있었다. 혁명에 관한 서양의 초기 연구는 손문을 중심에 놓았지만 다음 흐름은 손문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황흥과 송교인의 공헌에 주목하여 초점을 바꾸었다. 
조사의 범위를 넓히는 과정을 통해서 서양의 역사가들은 처음보다는 중국공산당의 서술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이 장소에 따라서 일관적이지 않고, 사회적 기초에 정확하게 '부르주아'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의 서양 역사가들이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개인과 지방의 이익에서 나오는 상호 작용이 어떻게 혁명적 사건이 발생하도록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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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인 학생들과 직업적 혁명가들의 영향력은 1908년 이후 점차 사라져갔고, 두 집단 모두 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 하지는 못했다.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공공연하게 혁명적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개혁주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골의 농촌 조직들과는 거의 연계가 없었던 도시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유형은 상당한 규모의 전통적 상인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점점 눈에 띄는 존재가 된 두번째 유형은 신상이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상업에 뛰어들었지만 보통 과거 시험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고(대개는 돈을 주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유교 지식인들의 생활 양식을 능숙하게 체현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구분되었던 신사와 상인의 두 역할이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결합되었던 것(다른 말로 근대 사업가의 탄생 과정)은 신정 시기의 핵심 정책들에 힘입어 가속화되었다. 그 핵심 정책이란 과거 제도의 폐지와 지역 및 성의 상업회관 창설이었다. 이로 인해 신사가 아닌 상인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례 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도시적 개혁주의 엘리트의 세 번째 유형은 이전의 지식인 계층에서 유래한 '신식 신사'였다. 과 거 시험에 급제하여 학위를 가진 자들을 포함하여 신식 신사 집단에는 근대 학교의 교사, 은행가, 투자가, 법•의학•언론에 종사하는 사무직 전문가들, 그리고 새로운 지식 계층이 속해 있었다. 이렇게 상인들, 신상들, 그리고 신식 신사들은 낡은 정치 체계가 자신들의 활동을 제약한다는 사실을 점점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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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중반 중국은 혁명적 상황을 맞이했다. 첫번째는 극심한 재정 위기였다. 두 번째는 자연재해였다. 반복되는 홍수, 흉년은 심각한 식량 부족을 야기했다. 세번째는 세금 폭동, 식량 폭동, 철도 폭동 같은 소규모 국지적인 폭동의 확산이었다. 마침내 혁명 봉기가 일어났을 때 청 제국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역설적으로 혁명의 주체는 신정개혁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들 즉 신군, 상업회관, 자의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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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은 여전히 북아메리카를 순회하고 있었지만, 동맹의 동지들은 이 혁명을 자신들의 혁명으로 도용했고… 12월에 자치 성들의 대표들이 남경에서 만났고, 크리스마스에 중국으로 돌아온 손문에게 임시 총통의 직위를 부여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2월 12일에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청 왕조는 물론이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화제국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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