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 <지금 다시 계몽>

지금 다시 계몽
스티븐 핑커.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12/29
 

핑커의 책은 대체로 다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책도 구입.
그런데 언어학자, 인지과학자로서의 핑커를 보여주는 <빈 서판> <언어 본능>은 재미있었는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부터는 너무 ‘모든 것 평론가’로 간 느낌.
그렇다 해서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 대부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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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장밋빛 안경을 끼고 본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발견했다. 자신은 이혼, 해고, 사고, 병,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될 확률이 일반 사람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론 연구자들은 이것을 낙관주의 간극(Optimism Gap)이라고 부른다.
20여 년 동안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여론 조사원이 유럽인들에게 내년에 그들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질지 나빠질지를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응답했지만, 그들 나라의 경제적 상황에 관해 물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영국인 대다수가 이민, 10대 임신, 쓰레기, 실업, 범죄, 반달리즘, 마약이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사는 지역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환경의 질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지역 사회보다 국가 차원에서 더 나쁘고, 국가보다 세계 차원에서 더 나쁘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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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 관한 연구에서는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1930년대에 캐나다에서 내 조부모가 그랬듯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더 늦게 결혼하고, 아이를 더 적게 갖고,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세대 만에 슬럼가 바리오(스페인어 사용자들의 거주 지역. - 옮긴이), 빈민가는 반듯한 주택가가 되고, 노동자 계급은 중산계급이 되었다. 산업화의 장기적인 혜택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산업화의 잔인한 행태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현대적인 감성을 더 일찍 반영해서 아동 노동 없이 공장을 운영하고 어른들에게도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제공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역사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진보는 한 덩어리의 패키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산업 혁명이나 세계화나 통째로 좋고 나쁨을 판단해 받아들이냐 마냐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보는 사회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특징을 최대한 세분화해서 인간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고 그것을 반복, 응용하는 과정이다.
-154 
 
사회 지출은 진보의 무시무시한 면모를 입증한다. 미국은 재분배라는 공격에 맹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미국은 GDP의 19퍼센트를 사회 복지 사업에 할당하며,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총력을 다했음에도 지출액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지출이 늘어난 부분은 오바마케어다.
실제로 미국의 사회 지출은 보이는 것보다 규모가 크다. 대다수 미국인은 정부가 아니라 고용주를 통해서 건강 보험, 실업 보험, 장애 보험 등 의 보험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시행되는 사회지출을 더하면 미국은 35개 OECD 국가 중 24위에서 프랑스 바로 뒤인 2위로 올라선다. 큰 정부와 높은 세율에 반대하는 온갖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회 지출을 좋아한다. 오바마케어가 통과되자마자 공화당은 어떻게든 폐지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공화당의 이 반격은 2017년에 그들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공개 주민 회의에 참석한 성난 유권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캐나다 국민이 하키 다음으로 좋아하는 오락거리가 둘 있는데, 자기 나라의 의료보험 제도를 불평하는 것과 의료보험 제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177
 
아마존의 벌채 속도는 1995년 정점에 이른 뒤 2004년과 2013년 사이에 5분의 1로 급락했다. 환경 보호가 선진국에서 출발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이다. 대기, 물, 숲, 어장, 농장, 자연 서식지의 질 등의 지표를 조합한 환경성과지수(Environmental Performance Index)를 성적표 삼아 우리는 환경 보호 문제와 관련된 세계의 진보를 추적할 수 있다. 그 지수에 따르면 10년 이상 추적 조사해 온 180개국 가운데 두 곳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환경 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은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일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인디라 간디의 말대로 "가장 큰 오염원은 가난이다”. 
-209
 
환경 정치의 역사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일화 가운데 하나는, 탄소세를 미국 최초로 시행하기 위해 워싱턴 주에서 주민발의를 하려 했을 때, 나오미 클라인이 이를 부결시키려고 코크 형제의 편에 합류한 것이다. 그 조치가 "우파 친화적이며, "오염을 일으킨 기업에게 돈을 물려서 그들의 부도덕한 이득으로 그들이 만들어 낸 피해를 복구하게끔"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클라인은 2015년 인터뷰에서 기후변화의 정량적 분석조차도 반대했다.
-220
 
사람들은 기후 변화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하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을 때보다는 그것이 기술과 정책의 혁신을 통해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말을 들을 때 기후 변화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크다.
-221
 
기후 변화에 관해서는 흔히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불안해한다고들 하지만, 핵에너지는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덜 불안해한다. 하지만 핵발전은 비용이 많이 든다. 극심한 규제라는 허들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건설이 오래 중단된 이후에 민간 기업이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설계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핵발전 기술은 기술적 학습 곡선을 따를 수도 없었고, 최선의 설계, 제작, 건설 방식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반면 스웨덴, 프랑스, 한국은 표준화된 원자로를 10여 기씩 건설한 결과, 지금은 상당히 적은 양의 탄소를 배출하면서도 값싼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핵에너지가 탈탄소화 과정에 크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결국 현재의 2세대 경수 원자로를 뛰어넘는 기술적 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 4세대 원자로에는 여섯 가지 설계 방식이 있는데, 4세대 원자로가 실용화되면 핵발전소도 구하기 힘든 한정판이 아닌 대량 생산품이 되리 라 기대할 수 있다. 4세대 원자로의 한 유형은 제트 엔진처럼 조립 라인에서 생산할 수 있고, 크기는 화물 컨테이너에 들어갈 정도가 되어 철도로 운송할 수도 있으며, 바지선에 설치해 해안가 도시 근처에 배치할 수도 있다.
-235
 
폭력 범죄는 해결 가능한 문제이다. 2014년에 아이스너는 세계보건기구에 자문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 살인 사건 발생률의 50퍼센트를 30년 이내에 줄이자고 제안했다. 살인 통계에 관한 두 가지 사실에 따르면 이 제안은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열망이다.
첫 번째는 살인 사건의 분포가 측정 단위마다 어느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온두라스(10만 명당 연간 904건), 베네수엘라(537건), 엘살바도르(41.2건), 자메이카(39.3건), 레소토(38건), 남아공(31건) 등 가장 위험한 국가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가장 안전한 국가의 수백 배에 달한다. 인류의 10분의 1이 거주하는 단 23개국에서 세계 살인 사건의 절반이 발생하고, 브라질(25.2건), 콜롬비아(259건), 멕시코(12.9건), 베네수엘라, 단 4 개국에서 세계 살인 사건 중 4분의 1이 발생한다. (세계에서 살인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역인 라틴아메리카 북부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부는 나이지리아에서 중동을 거쳐 파키스탄으로 뻗어 있는 전쟁 지역과 구분된다.) 이 편향성은 프랙털 도형처럼 계속 내려간다. 한 나라 안에서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카라카스(10만 명당 120건), 산페드로술라(온두라스, 187건) 같은 몇몇 도시에 몰려 발 생한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몇몇 동네에 집중되어 있다. 동네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몇몇 거리에서 일어난다. 거리에서 발생하 는 살인 사건의 상당수는 몇몇 개인이 저지른다.
-270
 
기계는 낡아 가는데 기술자들이 유지 보수를 거부함에 따라 사형 장치는 점차 거추장스러운 고철 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다. 미국의 사형 제도는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조각 한 조각씩 뜯겨 나가고 있다.
첫째, 과학 수사, 특히 DNA 감정 기술의 발달로 무고한 사람들이 거의 사형당할 뻔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형 제도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아연실색했다. 둘째, 생명을 빼앗는 무시무시한 작업은 십자가형과 할복의 잔혹한 사디즘에서 출발해서 그보다는 빠르지만 여 전히 눈에 비치는 밧줄, 총알, 칼로, 그리고 가스와 전기 같은 무형의 물질로, 마지막에는 치사 약물을 주입하는 유사 의학적 절차로 진화해 왔다. 
셋째, 교도소가 탈옥과 폭동을 거의 완벽하게 방지할 수 있게 되면서 사형 제도의 유력한 대안인 종신형이 더 큰 안정성을 갖추 게 되었다. 넷째, 폭력 범죄 발생률이 곤두박질치면서 사람들은 예전만큼 가혹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다섯째, 사형을 상당히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함에 따라 이전 시대의 약식 처형이 길고 번거로운 법적 절차로 대체되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사형수의 대다수가 자연사로 죽을 만큼 기나긴 재심 및 항소 과정이 진행된다. 여섯째, 빈곤한 흑인 피고인에 대한 판결이 비대칭적으로 많은 사형 제도의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국가는 양심에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조각조각 이어붙인 누더기에 일관된 근거를 마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연방 대법원은 사형 제도를 합리화하고자 애써 왔는데, 그 과정에서 누더기의 조각들을 하나씩 뜯어냈다. 우리는 사형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광범위한 관계자 및 기관 사이에서 하나의 도덕적 원리 - 생명은 신성한 것이며, 따라서 살인은 곤란한 일이라는 원리 -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328-329
 
약간의 불안은 어쩌면 자유의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 모른다. 그런 불안은 자유가 요구하는 경계, 숙고, 자성의 다른 표현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큰 자율성을 얻게 되면서 행복감이 하락한 것도 놀랍기만 한 일은 아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젊은 여성이 경력, 가족, 결혼, 돈, 여가, 우정, 경험, 사회적 불평등의 개선, 공동체 지도하기, 사회적 기여 등을 자신의 목표로 언급한다. 걱정할 일도 많고, 불안할 일도 많은 것이다. 여성은 계획하고, 신은 웃는다.
현대인의 마음에 불안의 무게를 지우는 것이 오직 개인의 자율성이 가져다준 다양한 선택지만은 아니다. 묵직한 실존적 질문들도 한 무게 더한다.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쉽게 받아들이던 권위를 점차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낡은 종교적 진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덕에 무관심한 우주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435
 
다인종 지역은 모두 '해묵은 원한'을 품고 있고, 그 원한을 잠재우는 길은 그들을 고립된 인종/민족 문화권들로 분리하고 양쪽에서 소수 민족을 쓸어내는 것뿐일까? 이웃한 인종/민족들은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을까? 답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구)소련에 속해 있었던 인접 국가들 중에서는 95퍼센트, 아프리카의 국가들 중에 서는 99퍼센트가 싸우지 않고 잘 지낸다. 비폭력 저항 운동은 효과가 있을까? 정치 과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 1980년~)와 마리아 스테판 (Maria Stephan)은 1900년부터 2006년까지 전 세계에서 정치적 저항 운동의 데이터 집합을 모았고 비폭력 저항 운동은 4분의 3이 성공한 데 반해 폭력적인 저항운동은 고작 3분의 1만이 성공했음을 발견했다. 
-610
 
1947년에 유네스코는 세계의 지성인 수십 명(자크 마리탱, 마하트마 간디,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 해럴드 라스키, 필립 퀸시 라이트, 피에르 테이야 르 드 샤르댕, 그리고 저명한 유학자 및 무슬림 학자)에게 유엔의 보편적 선언에 어떤 권리들이 포함되어야 할지를 물었다. 돌아온 목록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회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 리탱이 자세히 이야기했다

유네스코 국가 위원회의 한 회의에서 인권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이데올로기 옹호자들이 그 권리들에 동의한 것을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좋소." 그들이 말했다. "그 권리들에 동의하겠소. 단, 누구도 우리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세계 인권 선언은 30개 조항으로 된 휴머니즘 선언으로,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작성되었다. 기초위원회 위원장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이데올로기에 휘말리지 않고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겠다고 결심한 덕분이었다. 첫 번째 초안의 작성자인 존 피터스 험프리(John Peters Humphrey, 1905~1995년)는 선언이 어떤 원리에 기초해 있느냐는 질문에 “어떤 철학도 없습니다.”라고 적절하게 대답했다.
1948년 12월에 세계 인권 선언은 반대 없이 유엔 총회를 통과했다. 인권은 서양의 편협한 신조라는 비난이 무색하게도 세계 인권 선언은 인도, 중국, 태국, 버마(미얀마), 에티오피아, 그리고 이슬람 7개국의 지지를 받은 반면에, 루스벨트는 미국과 영국의 찬성을 끌어내기 위해 두 나라 위원들의 팔을 비틀어야 했다. 미국은 흑인을 걱정했고, 영국은 식민지를 걱정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기권했다.
-631-632
 
뿌리는 나무에게 있는 것, 인간에게는 두 발이 있다. 
-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