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해 두자면, 전쟁 보도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청탁 전화를 해온 손제민 <관훈저널> 편집위원에게 먼저 이야기했다. 현재 한국 언론의 전쟁 보도들을 놓고 잘 한다 못 한다 품평하고 싶지는 않다고. 신문사를 그만둔 뒤 국제전문 저널리스트라는 타이틀로 활동하고 있으니 내 정체성은 여전히 ‘기자’다. 소속된 회사는 없지만 30년 가까이 신문사에서 일을 배웠고 일을 했다. 회사를 떠나고 난 뒤에 언론 보도들을 비판하면서 이게 나쁘네 저게 부족하네 하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더 나은 보도를 지향한다면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안에 나 스스로 더 잘 했어야 했다. 그러니 이 글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지금 쏟아져 나오는 전쟁에 관한 보도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이나 질타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당시에 잘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랜 시간 기사를 쓰면서 나는 어떤 것들이 부족했느냐를 담은 나의 반성문이다.
‘현장’에 못 가면 대안을 찾으라
가장 크게 아쉬움이 남는 것, 지금도 마음 속으로 가장 부족했다 생각하는 것은 오랫동안 전쟁에 대해 글을 써왔으나 현장에 있어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국제뉴스를 다루면서 다른 기자들에 비하면 ‘힘든 곳’을 많이 다녀온 편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보르네오의 밀림과 남태평양의 섬나라, 난민촌과 반군 지역 등등 여러 곳을 다녀봤다. 회사를 그만둔 뒤 작년과 올해에는 개인 취재 겸 여행으로 아우슈비츠와 르완다의 학살 기념관들을 둘러봤다. 아마도 그래서 내게 이 주제에 대한 글을 부탁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현장’에서 두려움과 갈등 속에 마음 졸여가며 보도해본 적은 없다. 내가 해온 취재 과정에서 무서웠던 것도 고민스러웠던 것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2003년의 이라크 전쟁 이래로 전쟁은 20여년 동안 늘 내게는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그럼에도 나는 포격이 쏟아지기 직전 전쟁터에서 도망쳐나왔다는, 씻어낼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기자로서의 자괴감이기도 하고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죄책감이기도 하다.
현장을 보지 않고 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통하기 어렵다. 한국언론들의 관행, 회사의 한계 같은 것들은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어떤 때는 현장에 가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한심하다고 여겼고, 어떤 때에는 소속 회사를 원망했고, 데스크나 독자로서는 현장에 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기자들과 나태한 미디어들을 비판했다.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와는 여건이 많이 바뀌어서 이전보다는 현장에서 전해오는 기사들이 훨씬 많아졌다. 인터넷 시대가 된 뒤로는 현장의 소식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통로도 많아졌다. 이런 점은 반갑다.
여기서 시각을 조금 바꿔서 바라보자면, 국제뉴스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건을 현장에서 전하는 언론은 원래 없다. 기자회견을 중개하고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현장 스케치로 담을 수는 있겠지만 재난이든 사건사고든 불법행위와 비리 범죄든 간에 기자가 ‘그 순간 그 곳에’ 있을 가능성은 우연이 아니고서는 거의 없다. 미디어는 본질적인 속성이 중개자다. 그렇다면 기자가 해야 할 일은 전달을 잘 하는 것이다. 누구의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자료를 보고 분석할 것인가. 재난이 일어난 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사건이 발생한 뒤 가장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보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그 과정이 바로 취재다.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의 조사내용을, 재판이 벌어지면 판결문을 인용하는 것처럼 가장 믿을만한 증언이나 문서를 인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국제뉴스 보도에는 하나의 단계가 더 끼어든다. 남의 뉴스를 보고 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미디어 자체가 중개자인데 남의 나라 언론을 보고 인용하게 되면 한 다리를 더 건너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어떤 매체를 보고 쓰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다행히 요즘엔 자료가 너무 많다. 굳이 외국 ‘언론’을 인용하지 않아도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원자료들이 많이 있다. 백악관 논평, 세계은행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도하면서 외국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면 그냥 ‘나 게으른 기자야’ 고백하는 일이 될 뿐이다. 게다가 재난이나 분쟁, 전쟁 상황에서는 현지 주민들이나 단체, 매체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시각각 상황을 세계로 발신한다. 그런 것들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인용의 인용을 거치는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을 인용해 보도할 때, 아직도 영미 언론 위주인 경우가 많다. 팔레스타인 언론, 우크라이나 미얀마 멕시코 매체 이름을 몇 개나 댈 수 있는지 국제뉴스를 다루는 이들은 스스로 되짚어봐야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는 나라들은 언론도 한계가 많다. 중동 전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매체인 이집트의 알아흐람은 2011년 ‘아랍의 봄’ 뒤 잠시 자유를 구가하며 명성을 되찾나 했는데, 3년 뒤 유사 군부 정권이 들어선 뒤 다시 정권의 나팔수가 됐다.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다. 현지 언론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외국(서방)의 시각으로 보완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다행히 요새는 어느 나라든 독립된 온라인 매체들이 많고 언어 장벽도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번역기가 너무 잘 돼 있다. 동시에 어느 나라든 정치가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태국이나 베네수엘라 상황을 다루면서 현지 언론을 인용하려면 개별 매체들의 성향과 신뢰도도 파악해야 한다. 특정 매체의 성향을 알려면 아주 작은 수고,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는 정도의 노력만 보태져도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나쁜 놈인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국제 뉴스 보도의 일반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격적인 전쟁 보도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사안이 그렇지만 전쟁 보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먼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는 전쟁의 원인이다. 누가 나쁜 놈인가. 여기서 저널리스트들의 기본적인 ‘전쟁관’이 알게모르게 스며든다. ‘맞을 짓을 한 놈’이 바보인가, 때리고 죽이는 놈이 나쁜 놈인가. 전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현실주의’로 포장한 힘의 논리를 펼치게 된다. 후자라고 생각한다면,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거나 ‘십자군’ 논리로 변질될 위험을 늘 의식해야 한다.
세번째는 시간적 요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타임라인 혹은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면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상황 전개, 2021년 미국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의 미-러 긴장 고조, 2014년 ‘마이단 혁명’과 동부 분리주의 내전 이후 벌어진 일들, 더 거슬러 올라가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의 러-우크라이나 관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와 옛소련의 관계, 혹은 멀리멀리 역사를 되짚어 키예프(키이우)루시와 모스크바 공국까지, 여러 시간적 범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역사적 배경은 이 모든 과정을 되짚어볼 때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네번째는 공간적 요인이다. 왜 우크라이나를? 왜 돈바스를? 왜 라파 국경을? 지리적 특성은 전쟁의 양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거기에 국제질서를 더하면 다섯번째 지정학적 설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주변국 요인, 역내에 미칠 파장과 세계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 인물들, 즉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개인적, 정치적 속성을 덧붙일 수 있다. 무기와 군사체계도 또 다른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경제적 측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 또한 당장의 증시 영향, 원자재값에서부터 장기적인 파장, 밀가루 값이 올라 정정불안을 겪는 나라들, 수혜자와 피해자 등등 여러 기사거리들이 파생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저널리스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이다. 그 고통에 얼마나 집중하느냐, 평화와 인권이라는 주제에서 얼마나 일관성을 가지고 접근하느냐가 좋은 저널리즘과 ‘클릭 장사’를 위한 기사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고 믿는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나쁘다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도 나쁘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희생당한 유럽인들을 애도한다면 이스라엘의 대량학살로 숨져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애도해야 한다.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기사를 쓰면서 매번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은 좋은 나라, 이스라엘은 나쁜 나라, 러시아는 나쁜 나라, 우크라이나는 좋은 나라, 이런 식으로 국가를 하나의 행위자로 보고 선악을 판단할 수는 없다. 세상에 좋은 나라, 나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한 국가를 하나의 일체화된 행위자로 보는 시각 자체가 극단적인 단순화를 부른다. 국가를 놓고 편들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행위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 무력을 쓴 나라가 어느 나라냐에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을 상대로 무력을 쓴 행위 자체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을 지키는 것만 해도 기사를 쓰는 이들의 치열한 노력이 없이는 어렵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넘어 전쟁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연적으로 보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쟁을 제한적이나마 통제가 가능한 사안으로 보고 덜 잔인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느냐, “힘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재생산하느냐. 인류는 지난 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뒤 전쟁을 덜 잔인하게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유엔이라는 기구가 있고, 제네바협약이 있고, 국제형사재판소와 로마규약이 있다. 전쟁 범죄, 반인도범죄를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체제를 만들었다. 형벌이 존재하는 이유는 범죄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전쟁범죄의 단죄는 국제사회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전 인류에 던지는 메시지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지구 상 80억 인구 가운데 전쟁을 경험한 사람,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매우 적다. 형벌이 있다 해서 범죄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법과 형벌이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전쟁 보도의 최종적인 주제는 대량학살 반인도범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가가 돼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나, 저널리스트로서의 나
국제 이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특히 전쟁처럼 수많은 이들의 생명이 달린 일에서, 혹은 전염병이나 기후변화처럼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위기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두 가지가 된다. 시민으로서의 나, 그리고 저널리스트로서의 나. 개인으로서 전쟁,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로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다뤘던 주제가 전쟁이었지만 전쟁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민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우리가 들어본, 기억에 남아 있는 ‘전쟁’이라고 하면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들만 꼽아도 여럿 된다. 베트남전, 아프간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이라크전쟁 등등. 하지만 독립전쟁과 내전들, 우리가 배우지 않은 전쟁도 많다. 대체로 우리가 들어본, 기억에 남아 있는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이나 침공들이다. 내전 가운데에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 르완다 내전, 서아프리카 내전, 아직도 상흔이 남아 있는 시리아 내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집단이 집단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해 많은 사람이 숨지게 한 사건을 우리는 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인도의 카슈미르 탄압처럼 전투기가 뜨고 탱크가 들어가도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처럼, 마치 대등한 두 주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쟁점을 놓고 충돌하는 듯이 현실을 호도하는 용어들도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에 미국 언론들은 war(전쟁)라 부르기도 했고 invasion(침공)이라 규정하기도 했다. 한국 언론들은 ‘이라크 전쟁’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의 용어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을 어떻게 명명하느냐는 그 자체로 정치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서는 ‘중동 분쟁’으로 뭉뚱그려 표현하던 서방 언론들이 2009년부터 ‘가자 침공’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2023년 10월부터 진행된 상황에 대해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미국 조 바이든 정부)이나 ‘가자 침공’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 같다.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에 대해 미디어 내부에서 토론이 이뤄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전쟁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많다. 천편일률적인 보도를 넘어서려면 다루는 주제의 시공간적 범위를 세분화하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해야 한다. 기자 개인으로 봤을 때 내게 가장 도움이 됐던 작업 몇 가지를 돌아본다면 첫째는 연표 만들기다. 삽질이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 연표를 찾아보면 인터넷에 다 나오지만 나 스스로 시공간적 범위를 여러 카테고리로 설정해서 연표를 만들어보면 예상보다 남는 게 많다. 현재 진행상황에서 최근 몇 년 사이의 동향으로, 거기서 다시 역사적 사실들로.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서 국가와 지역으로, 글로벌 지정학으로. 세분화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소재들을 찾을 수 있다. 자포리자는 어떤 도시이길래? 우크라이나에 독일이 준다는 탱크가 뭐길래? 이란이 러시아에 줬다는 드론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지명, 인물, 무기, 사건 등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슈를 조명해보면 전쟁의 새로운 단면들이 펼쳐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궁금증’이다. 그게 ‘남과 다른 기사’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궁금증은 일종의 버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것이든 외국 것이든 다른 언론을 자꾸 보게 되면 그 나물의 그 밥인 기자들의 논리 구조를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 한계를 기자 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다. 어떤 게 궁금한지조차 잊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연표를 만들고 이슈가 되는 국가의 통계지표들을 찾아보고 구체적인 수치들을 비교하고 처음 나오는 사람, 장소를 검색해보는 과정에서 궁금증이 ‘만들어진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궁금증에 시민으로서의 윤리의식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가 기자가 해야 할 고민인 듯 싶다.
아픔은 나의 몫
기자가 아니었다면 가보지 못했을 곳들을 다녀본 경험들이 내게는 소중하다. 하지만 그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떤 경험들은 내게 아픔이자 좌절로 남았음을 인정하고 털어놓는 데에 20년이 걸렸다. 아프리카에 다니느라고 말라리아 약을 다섯 번 먹었다. ‘다신 오지 않겠다’고 매번 마음 먹으며. 지난 해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전쟁 영화조차 보지 않는 나인데 왜 그런 곳들을 찾아다닐까. 지구를 구할 어벤저스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 올해 다시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다녀왔다. 여섯 번째 말라리아 약을 먹으면서. 이제 앞으로 나의 여행에 더 이상 제노사이드는 없다, 다시 굳게 다짐했다. 그러고 돌아와서 가자 지구가 초토화되는 모습을 보니 알량한 양심이 다시 나를 질타한다.
우리는 무엇에 ‘반응’할까. 트럼프가 피를 흘리는 사진이 세계 언론을 덮을 때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질타하는 글을 보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팔레스타인은 그나마 세계의 관심을 받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사헬에서 누군가가 죽어갈 때, 중미의 어느 뒷골목에서 사람들이 전쟁에 가까운 숫자로 살해당할 때 세계의 미디어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애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왜 콩고 내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느냐’고 질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프리카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이에게 ‘당신은 왜 아이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세계의 관심과 언론의 보도는 늘 편파적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될수록 연대와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 연대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일이고 전쟁 보도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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