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과 신자유주의-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The Rise And Fall of The Neoliberal Order
게리 거스틀. 홍기빈 옮김. arte
재미있었다. 트럼프 시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책이랄까.
한국어판 부제가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인데, 그보다는 '뉴딜 질서'는 어떻게 망했나+'신자유주의 질서'조차도 이젠 망했다, 이런 쪽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ㅎㅎ
나는 1970년 대와 1980년대에 형성되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지배력을 얻었던 정치 질서의 몰락을 (아니면 적어도 균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정치 구성체를 신자유주의 질서라고 부르겠다. 그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었으며, 핵심적인 촉매자의 역할을 한 것은 빌 클린턴이었다.
"정치 질서"라는 말은 2년, 4년, 6년의 여러 선거 주기를 버텨내면서 중장기적으로 미국 정치를 형성해 왔던 이데올로기, 정책, 유권자들의 배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지난 100년 동안 미국에는 두 정치 질서가 나타난 바 있다. 1930년대 와 1940년대에 일어나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정점에 달한 뒤 1970년대에 무너진 뉴딜 질서,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에 일어나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정점에 달했다가 2010년 대에 무너진 신자유주의 질서다.
이 두 가지 정치 질서의 중심에는 모두 뚜렷한 정치경제 프로그램이 있었다. 뉴딜 질서는… 자본주의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강 력한 중앙집권 정부가 경제 시스템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신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은 성장, 혁신, 자유 를 가두어 놓는 정부의 규제와 통제에서 시장의 힘을 해방시켜 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한 정치 질서를 수립하는 데에는 한두 번의 선거 승리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선 유망한 후보들에게 투자할 엄청난 자금과 정치 행동을 조직할 위원회까지 거느린 기부자들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 아이디어들을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줄 튼튼한 싱크 탱크와 정책네트워크가 있어야 하며, 선거구 다수에서 체계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바람을 일으키는 정당이 있어야 한다. 또한 대법원 판결과 같은 최고 수준 에서부터 여러 대중매체와 방송에까지 두루 정치적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과, 유권자들에게 좋은 삶의 비전이란 이런 것이라고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덕적 관점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정치 질서란 넓디넓은 전선 전체에서 일제히 전진해 나가야 하는 프로젝트다. 정치 질서의 핵심적 특징은, 그 질서의 이념적 측면에서 지 배 정당이 반대 정당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복속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10-11
모순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의 지배를 확장하는 전략으로 보는 이들과 그것을 개인의 해방으로 가는 길로 보는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모순이다.
또 다른 모순은 좋은 삶을 이루는 법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다른 두 가지 도덕적 관점이 신자유주의 질서 내부에 불편하게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내가 신빅토리아적이라고 부르는 관점으로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가족을 탄탄하게 유지하며, 노동, 성, 소비 등에 기율을 갖는 것을 찬양하는 태도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서는 정부가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이러한 규제를 내놓는 것은 정부 이외의 다른 어떤 제도가 되어야만 한다. 신빅토리아 주의는 전통적 가족이라는 제도에서 답을 찾는다.
이러한 관점은 제리 폴웰(Jerry Falwell)의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만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보했으며, 이들은 도덕 적다수(The Moral Majority)'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향력 있 는 종교 조직을 형성하여 정치적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장려했던 또 한 가지 도덕적 관점은 내 가 세계시민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개인들이 전통, 유산, 이미 결정된 사회적역할 등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아 혹은 정체성 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야말로 시장 자유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의 경우 신좌파-특히 흑인 권력(black power), 여성주의, 다문화주의, 게이 프라이드(gay pride) 등-에서 비롯된 여러 해방운동을 동력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질서의 시대에 크게 확산됐다.
-30-31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배 질서로 등극했 던 1990년대는 "문화전쟁"으로 알려진 세계시민주의자들과 신빅토리아주의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기간이기도 하다. 정치학자 다수가 이 "양분화" 를 미국 정치의 핵심 현상으로 보며, 이것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미국 사회를 형성했는지-혹은 잘못 형성했는지-설명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
나도 이러한 양분화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만 몰각되어선 안 된다. 한편에서 문화적 양분화가 벌어졌지만 동시에 정치경제의 원리들에서는 폭넓은 합의가 일어나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문화적 분열과 정치적• 경제적 합의의 공존이라는 수수께끼와 같은 사실은 1990년대에 빌 클린턴과 뉴트 깅그 리치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32-33
1952년이 되면 공화당은 백악관을 되찾아 와서 이후 8년간 정권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승리를 이끌어 낸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인지 민주당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57
린든 베인스 존슨은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 법안을 자신의 대통령직에서 중심 임무로 삼는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위대했던 정치가라고 보았으며, 자신이 미국 역사에서 루스벨트의 가장 뛰어난 후예로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 해서는 뉴딜을 완성시키고, 영웅적인 민주당 개혁자의 전당에 루스벨트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해 줄 위대한사회라는 이름의 입법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그는 여전히 뉴딜의 주변에 남겨진 집단들의 요구에 응하고자 했다. 그는 노인들을 위한 대규모 의료보험 프로그램, 가난한 이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공 동체 행동프로그램,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한 공공주택 프로그램 등을 놓고 의회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의 행정명령 11246번은 그의 정권은 물론 이후의 정권도 연방정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자금 지원을 받는 기관들이 공공과 민간을 포함하여 인 종, 종교, 성 등의 편향을 제거해야 한다는 방대한 사회공학 프로젝트를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101-103
랄프 네이더 부분 재미있었다.
카터의 연설문 작성자로 채용된 제임스 팰러스(James Fallows)를 필두로 하여 랠프의 침입자들 (Ralph's Raider)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네이더의 제자들이 한 때 카터 행정부에 다수 입각하기도 했다. 네이더가 가진 대중민주주의 비전에서 중심 을 차지하는 개념은 바로 소비자였으니, 그가 권력을 강화해 주 고자 한 대상은 노동자들이 아닌 소비자들이었다.
물론 네이더나 카터가 밀턴 프리드먼이나 앨런 그린스펀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민간 부문을 숭배했 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이 들의 결심은 곧 시장의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했다.
-124-125
고전적 자유주의 혹은 이들이 자유방임주의라고 부르는 자유주의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인들의 삶을 재조직하고자 여러 시도를 벌였지만 모두 실패하였으므로,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새롭고 더 강화된 자유주의를 설계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자유주의를 이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보통 이 운동의 창립 순간으로 여겨지는 두 집회에서 이 명칭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첫 번째는 1938년 파리에서 열린 리프먼집담회(Colloque Lippmann)였으며, 두 번째는 1947년 스위스에서 열린 몽펠르랭협회의 첫 번째 모임이었다. 하이에크, 폰 미제스 등 신자유주의 개척자들은 독특하고 새로우면서도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펼쳐 낼 수 있는 규율 잡힌 "생각 집단(thought collective)"의 창설자로 보이고 싶어 했다.
-134
신자유주의는 그 시작부터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을 감수해야만 했으니, 역사적 단계로 보면 이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의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새로운 자유주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자유주의로서, 이는 우파의 자유방임과 좌파의 집산주의 사이를 지나는 새로운 제3의 길을 제공한다고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했던 바였다) 주장했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이 최초의 새로운 자유주의에 맞서는 것으로서 자신을 규정하게 되며, 자신이 내거는 제3의 길이 진리이며 뉴딜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135
1940년대에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의 신자유주의자들 가운데 한 집단은 스스로를 질서자유주의자들(ordo-liberals)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형태 의 분석을 개척해 냈다. 이들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서독에서 사회정책과 정부 정책의 틀을 잡는 데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 다. 35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러한 사고방식은 미국으로도 확산됐고, 특히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과에서 게리 베커(Gary Becker)의 지도로 뻗어 나오던 집단에 중요한 요소들을 제공한다.
일찍이 19세기 영국의 제러미 벤담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서도 인간 생활과 사회 전체를 폭넓게 경제주의적 사유로 치환하는 태도가 나타난 바 있다. 하지만 이 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발전되지 못한 맹아적인 아이디어였다. 게리 베커처럼 아예 자아를 사업체로 삼아 자본과 그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나 깨나 투입물과 산출물의 균형을 꾀하는 기업가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생각에 비하면, 그 논리의 세련화에서 도저히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정말로 새로운 출발의 이정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167-169
용어상의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왜냐 하면 미국의 경우 자유시장의 옹호자들 중 많은 수가 결국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보면 그 보다 50년 전 루스벨트식의 뉴딜주의자들이 이 자유주의라는 명칭을 훔쳐가 버려 생긴 결과물이다. 하지만 보수적(conservative)이라는 말은 이들의 세계관 중심에 있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을 전혀 제대로 묘사해 주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요 사상가들은 자기의 세계관과 보수주의의 세계관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이가 프리드먼을 보수주의자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고 그가 활동하는 내내 자유주의자 혹은 급진파라고 여겨 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자유지상주의"라는 말을 대안으로 삼는 것도 거부한다. "억지로 만들어 낸 용어 그리고 대체제로 등장한 용어"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었다.
-194-195
신자유주의와 다른 길을 걸은 리버럴들.
자유주의 진영 내부에 서도 자유주의라는 터전을 버리지 않고 자유주의의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개혁가 L. T. 홉 하우스(L. T. Hobhouse)와 존 A. 홉슨John A. Hobson) 등이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라는 이름의 이론을 전개했고, 이는 20세기가 시작된 뒤 20년 동안 영국의 자유당 정치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새로운 자유주의가 공화당과 민주당에서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고수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점차 "진보주의자들(progressives)"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들의 지적인 지도자들 중 하나인 허버트 크롤리(Herbert Croly)는 1909년의 저작인 선언문 <미국적 삶의 약속(The Promise of American Life)>에서 미국의 새로운 자유주 의를 위한 일련의 강령을 제시하는데…
시카고 주거지역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 던 제인 애덤스(Jane Addams) 또한 이 새로운 자유주의자들 무 리 내에서 크롤리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12년에는 크롤리와 애덤스가 힘을 합쳐서 진보당을 창당하며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호민관으로 내세운다. 미국에서는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제3당이 나타난 바 있었지만 모두 단명했으며, 이 진 보당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진보당의 불길이 꺼지기 전인 19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루스벨트의 경쟁자였던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은 이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게 되며, 대통령 직을 수행하던 1914년에는 진보당이 내걸었던 여러 원칙을 거 의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그해에 크롤리와 그의 동료 들은 《뉴리퍼블릭》을 창간하게 되며, 이는 곧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 여론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잡지가 된다.
147-148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
레이건은 배우 경력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지만, 제너럴일렉트릭이 그를 〈제너럴일렉트릭극장(General Electric Theatre)〉의 사회자로 채용하면서 전기를 맞는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레이건에게 1년에 12주 동안 친선 대사가 되어 미국 전역에 있는 125개 이상인 자회사 시설들을 순회하면서 직원 대부분인 25만 명을 만나 대화하는 일을 맡겼다.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처음 일할 당시만 해도 레이건은 여전히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소련의 공세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여러 공장을 오가는 긴 기차 여행에서 하이에크와 해즐릿의 글을 읽은 데다가 제너럴일렉트릭의 다종다양한 중간관리자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점점 더 자유지상주의의 우파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1964년, 골드워터와 레이건은 미국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173
카터와 달리 레이건은 루스벨트야말로 자신이 보았던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그는 뉴딜을 혐오했던 것만큼 그 힘, 호소력, 지속성에 맞설 수 있는 정치 질서를 간절히 창출하고 싶었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기간은 미국의 운명과 조우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으며, 이제 레이건은 자신이 그 두 번째 운명이 될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214
국제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때에는 옛날 세상에 대한 향수에 젖어 백악관 건물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처럼 꾸미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가 생각하는 앙투아네트 궁정의 모습은 어디서 본 것일까?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 를 타고(Singing in che Rain)〉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아주 진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진짜로 소련을 무너트리고 싶었고, 또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215
신자유주의의 '총궐기'
신자유주의 총궐기의 효시는 1971년, 버지니아주에서 기업 변호사로 성공적인 이력을 쌓은 루이스 파월(Lewis Powell)이 미국 상공회의소의 수장에게 사적으로 보낸 제안서였다.
무엇보다도 파월의 분통을 터뜨린 것은, 미국에서 경제적 자유를 당연히 용호해야 하는 이들이, 특히 재계 공동체마저도 여기에 맞서 싸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신좌파들은 우선 대학생들, 그 다음에는 대학교수들의 상상력을 장악했고 또 그 다음에는 전국의 매체들까지 장악했던 데에 반해, 재계 지도자들은 대개 입을 다물고 나몰라라식으로 뒤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허울 좋은 자기만족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파월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애초에 파월의 제안서는 재계 공동체의 선별된 인사들 사이에서만 사적으로 회람됐다. 하지만 1971년 닉슨이 그를 대법원판사로 지명하게 되자 파월도 이 제안서를 공개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가 파월의 제안서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파월의 글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운동에는 큰 선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유기업과 자유시장 의 가치를 미국 사회의 중심에 다시 돌려놓고자 했던 재계 인사, 지식인, 정치권 지망자들이 한데 뭉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99-200
뉴딜 질서에 적대적 태도와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옹호하는 맹렬한 신념에서 케이토연구소를 능가할 싱크 탱크는 없었다. 1977년에는 또 다른 싱크탱크인 맨해튼연구소(Manhattan Institute)가 설립되어 조지 길더(George Gilder) 의 저작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자유시장 자유주의를 찬양하는 길더의 『부와 빈곤(Wealth and Poverty)』은 1981년 출간되자마자 레이건 정부에서도, 또 당시 출현하고 있던 신자유주의 질서에서도 성경책과 같은 위상을 얻게 된다.
자유주의자와 좌파들은 이러한 반격 공세가 얼마나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지를 빨리 인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반격 공세가 모습을 갖추게 된 곳이 그들이 생활하고 일하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와 좌파가 주로 깃들어 있는 공간은 대학 (그리고 대학 주변의 마을과 소도시들), 워싱턴의 고급주택지역 살롱들(Georgetown Salons), 노동조합, 브루킹스연구소나 포드재단, 카네기 재단 등과 같은 단체들, 《뉴욕타임스》와 전국 방송매체를 지배했던 ABC, CBS, NBC의 텔레비전네트워크 등이었다. 파월 제안서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정책 매체 구성체들이 뉴딜 케인스주의와 신좌파식 "해방" 사상으로 오염되었으니, 자유시장 시스템 의 지지자들은 이런 것들을 우회해야 한다는 훈령을 내리고 있 었다.
-202
총궐기에 재계를 동원하는 두 번째 새로운 형태는 대기업들의 정치활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s, PACs)였다. 캘리포니아 남부에 기반한 전국적인 약국 체인인 다트(Dart Industries)의 소유주 저스틴 다트(Justin Dart)는 대기업의 정치활동위원회들이 행사할 자금의 파괴력이 얼마나 클지를 이해했다. 그는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의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거의 정치활동위원회 750개를 일구어 내는 운동을 벌여서 그 수를 거의 열 배로 증가시켰다. 대기업의 돈줄을 풀어 공화당에 정치활동위원회의 자금이 넘쳐 나게 만들었던 다트의 능력은 레이건이 백악관으로 가는 대장정을 지탱해 준 결정적인 요소였다.
-204-205
뉴딜 지우기
이들은 어째서 레이건이 옹호하는 좀 더 급진적인 경로를 기꺼이 고려하게 된 것일까? 첫째, 1970년대에는 대부분 미국 경제의 실적이 나빴고, 세계적 우위의 명성에는 흠집이 났으며, 케인스주의 정책도구들은 녹이 슬어 작동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 시장으로 외국 제품들의 침략 이 급격히 거세지면서 기업가들은 조직 노동의 힘을 용납할 생각이 점차 사라졌다.
세 번째 이유는 정부의 각종 규제가 소리 없이 꾸준하게 늘고 있는 데에 품은 불만 이었다. 197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인 닉슨조차 직업보건안전법(Occupational Health and Satery Acr)에 서명하여 연방정부가 사업장들을 감시하는 전례 없는 권력을 갖게 된다. 같은 해에 닉슨은 환경보호법(Environmental Protection Act)에 서명했는데…
정부 규제를 확장하려는 시도 중에서도 가장 힘이 실린 것은 인종문제였다. 존슨 시절에 나온 대통령령 11246호는 고용주들이 "고용의 결정에서••••••• 인종, 피부색, 종교, 성, 출신국 등에 기초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207-208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놓고 파업을 벌였던 항공 관제사 1만여 명을 레이건은 해고해 버린다. 이 조치는 모든 공공 및 영리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1920년대 이후 그 어느 정권보다도 노조에 엄혹한 입장을 취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1937년 자동차 노동자들이 제너럴모터스의 공장들을 점거했을 때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주방위군이나 연방군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민주당원인 미시간 주지사와 루스벨트 대통령이 거부했던 사건 만큼 큰 의미를 갖는 행동이었다. 이는 대통령과 여당이 이제 노동자들의 힘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의사를 담은 통첩이었다.
-224
1981년, 미국 의회는 레이건이 추동했던 경제회복조세법(Economic Recovery Tax Act)을 통과시킨다. 이는 연방 소득세를 평균 23퍼센트 내리고 최고 한계세율을 7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내린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 중에 통과된 두 번째 세금 법안은 다시 이 최고 한계세율을 28퍼센트로 줄인다. 레이건과 그의 의회 동맹군은 미국의 최고 소득 구간에 있는 이들의 조세부담을 무려 60퍼센트나 줄인 것이다.
-225
레이건 공화당과 복음주의 기독교의 결합
레이건은 기존 공화당 지지층에 두 가지 요소를 덧붙여서 당의 정치 산술을 바꾸어 놓았다. 남부의 백인들(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북부의 백인 민족 집단들이었다. 민주당이 1940년대 말 트루먼 정권 때부터 민권을 강조하는 쪽으로 전환하여 1960년대 존슨 때에 그 절정으로 치닫게 되자, 많은 남부 백인은 민주당을 향한 충성심을 버리게 됐다. 일부는 1948년에 스트롬 서먼드의 딕시크랫(Dixiecrat)으로 돌아섰고… 닉슨은 이들을 공화당으로 끌어오기 위한 정치운동을 짜냈다. 그는 공화당을 법과 질서에 강경한 (따라서 많은 미국 도시를 찢어 놓고 있던 인종 소요 사태를 진압할 수 있는) 정당으로, 또 각 주의 독자성과 지역 자치를 추진하는 정당으로 새로운 틀을 짰다.
-216-217
엥글 대 비탈레(Engel v. Vitale)(1962)의 판결을 맡았던 워런 대법원(Warren Court, 1953년에서 1969년까지 얼 워런이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진보적인 대법원)…. 이 재판의 원고는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가톨릭과 유태교 단체였다. 대법원은 공공기관에서 종교를 완전히 제거하고 사적 영역으로 돌려 각자의 종교를 자유롭게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은 이 판결에 큰 충격을 받았다. 종국적으로는 이렇게 계속 스스로를 비대화해 나가는 연방정부에 대한 분노가 타올랐다. 엥글 사건 판결로 불타오른 분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스멀거리면서 퍼져 가고 있었지만, 당시의 미국은 인종 간 분열의 문제에 골몰해 있어서 이 점에 주목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레이건은 대통령선거 운동을 조직하면서 이러한 분 노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힘을 한껏 활용한다.
레이건이 이룬 최고의 정치적 성과는 바로 백인우월주의와 종교적 경건주의에 초점을 둔 정치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뉴딜 국가를 적대하는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시장 지향성과 화해시켜 냈다는 데에 있다. 그가 이를 성공한 방법은 남부 백인들에게 그들이 혐오하는 미국적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도 큰 정부의 민주당이었고, 백인들의 미국에서 소중히 여겨 온 각종 자유를 질식시키는 것도 큰 정부의 민주당이었다는 서사를 지어 낸 것이었다.
-219-220
똑같이 코카인을 썼는데도 백인과 흑인을 다르게 처벌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른바 흑인 빈민들이 사회정책과 시장 기율을 무시하고 멋대로 떠도는 자들이라는 당대의 통속적인 담론 덕분이었다.
이러한 담론의 핵심어는 바로 "언더클래스", 즉 계급 분류조차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말이었다. 1977년에 《타임》은 표제로 이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 새로운 용어야말로 이른바 미국의 신종 빈민들을 묘사하는 데에 꼭 필요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에 울타리를 쳐서 엄격한 기율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 입장하도록 만들려고 했던 점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바였다.
-241
신자유주의자가 된 클린턴의 민주당
1980년대 중반이 되면 민주당은 이미 레이건의 새로운 정치 질서 앞에서 뜻을 굽히고 있었는데… "아타리 민주당원(Atari Democrats)"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정보기술 산업이야말로 미래라고 보았으며, 미국이 이 결정적인 경제 부문에서 유리한 위치를 일본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248
다른 젊은 민주당원들도 이 하이테크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유혹적인 외침에 호응했다. 그중에는 콜로라도주와 뉴저지주 상원의원 게리 하트(Gary Hart)와 빌 브래들리(Bill Bradley), 매사추세츠주와 아칸소주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Michael Dukakis)와 빌 클린턴,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Al Gore Jc) 등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레스터 서로(Lester Thurow)와 또 다른 사회과학자들을 통하여 학계에도 발판을 마련했다.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월터 먼데일은 전통적인 뉴딜 진보주의자로서(뉴딜의 기수였던 휴버트 험프리의 제자였다) 레이건과 맞붙었다가 큰 차이로 패배했다. 여기에 좌절감을 느낀 민주당의 큰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타리 민주당원들과 힘 을 합쳐 민주당지도자협의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DLC)를 세운다. 1990년 민주당지도자 협의회가 내놓은 뉴올리언스선언(New Orleans Declaration)의 내용이다.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정치적 아이디어와 열망으 로는 1990년대의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없다.""민주당의 근본적 인 임무"는 "정부의 확장이 아니라 기회의 확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252
1994년 8월에 의료보험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고, 동시에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루빈의 재정적자 축소 계획이 사후적으로 큰 박수를 받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세율이 올라간 덕에 연방정부의 세수는 꾸준히 늘어나서 연방 재정이 흑자가 되었으니, 1960년대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클린턴 팀 내의 신자유주의 군단은 정권에서 지배적 위치로 올라섰고... 클린턴은 1995년에 루빈을 재무장관에 임명했으며, 신자유주의자 공화당원 그린스펀을 1996년에 세 번째 임기의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다시 임명했다. 또한 1994년에는 한때 공화당원으로서 오래도록 균형재정 강경론을 취해 온 리언 패네타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클린턴 정권 내에도 로버트 라이시와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같이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든 이들도 있었지만, 이 정권의 고위직 삼인방이 경제정책에 휘두르는 영향력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루빈의 동료 중 한 사람이던 로런스 서머스는 클린턴 정권 기간 민주당의 경제학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걸었던 행보를 이렇게 묘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들이었다. ··· 이제 정직한 민주당원이라면 우리 모두 프리드먼주의자라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대변화에서 클린턴은 총지휘자이기도 했지만 또 그 만큼 도구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289-290
정보기술 혁명과 신자유주의
이러한 놀라운 디지털플랫폼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 1996년 원거리통신법을 추동한 원동력이었다. 2월에 서명된 이 법은 그동안 오래도록 기업들이 이 산업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규칙들을 싹 쓸어버렸다. 전화 회사, 케이블IV 회사, 위성 TV 회사, TV 네트워크, 영화 스튜디오, 데이터 제공자 등이 이제 모두 서로서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306
하지만 대기업 권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는 법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장 자체가 그러한 제한을 가할 능력이 있다는 눈먼 맹신뿐이었다. 원거리통신법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이제 원거리통신 네트워크를 통제하는 대기업들은 독립적 사용자나 광고주가 만든 도메인들에 흘러 다니는 콘텐츠를 감시해야 할 의무에서 풀려나게 된 것이었다. 그 콘텐츠가 설령 혐오, 오류, 불온한 선동을 담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제공자들은 그러한 콘텐츠가 개인, 집단, 제도 및 기관에 입힐 손상에 대해 고소당하지 않을 폭넓은 특권을 얻게 된 것이다.
-310
(IT 혁명으로) 고도로 훈련된 금융 전문가들은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는 주장이 횡행했다. 컴퓨터들이 순식간에 완전한 정보를 제공했으므로 완벽한 시장이라는 것도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게 됐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금융공학이라는 새로운 학과가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가장 뛰어 난 학생 다수를 끌어가기도 했다. 1990년대가 되면 이 학생들이 월스트리트에 넘쳐 나면서 한편으로는 복잡한 금융 도구들을 설계하는 도전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액의 연봉을 받는 기 회로 신나는 나날을 보냈다.
-320
훗날 '대침체'를 부르게 될 금융 규제 완화
1933년의 글래스•스티걸법의 핵심은 상업은행업과 투자은행업을 분 리하는 것이었다. 투자은행들은 사업을 확장하려는 대기업들의 채권인수, 신주발행, 증권 거래, 인수합병 진행 등의 업무를 맡 아보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매은행업무 혹은 상업은행 업무, 즉 일반인들이 당좌예금과 저축예금 계좌를 만들고 주택담보 대출을 받는 업무는 하지 못했다.
또한 투자은행들은 상업은행들의 경영권을 갖는 것도 명시 적으로 금지됐으며, 대기업 투자와 채권인수 등을 위해 상업은 행의 대출을 받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는 상업 은행업을 규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세워져 상업은행 고객들의 예금을 보장해 주었다. 상업은행들은 특정한 주정부에서 허가장을 얻어야 했고, 다른 주에서는 영업이 금지됐으며, 이 규제로 인해 상업은행업 부문에서 기업 병합과 독점체 출현은 생겨날 수가 없었다.
1930년대에 글래스•스티걸법은 미국 은행업에 신뢰를 가져다주었고,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이 법안들은 뉴딜 질서가 존속했던 전 기간에 걸쳐 금융 체제의 구조를 마련했다. 이 시대에는 경제를 추동하는 주도권을 제조업 대기업들이 맡았고 은행은 그 뒷자리를 지켰 을 뿐이었다.
-316-317
금융 탈규제 개혁이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연금업에서였다. 사실 연금업 자체가 뉴딜 질서의 부산물이었으니, 노조가 고용주들로 하여금 직원들이 퇴직한 이후에 나누어 줄 돈을 따로 비축하도록 강제한 결과로 생겨난 산업이었다. 그 결과 투자가 가능한 거대한 자금이 조성됐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가리지 않고 갈수록 더 많은 은행이 이 거대한 자금에 손을 대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금융 탈규제를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졌다. 1970년대에 또 한 가지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니, 고용주들이 의회에 압력을 넣어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을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으로 대체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318
로버트 라이시는 참 대단한 인물이다.
1997년, 클린턴 정권의 노동부 장관 자리를 막 사임한 로버 트 라이시는 이러한 금융의 득세가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지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1995년 말 클린턴의 백악 관에서 열렸던 멕시코의 세디요대통령 환영 오찬을 상세하게 묘사한 뒤, 본래 국가 정상의 환영 오찬에 초대되는 손님들이 "외교관, 예술가, 노벨상 수상자 들"이었던 옛날과 비교했다. 이제는 그 자리를 "월 스트리트 은행가와 세계적인 대기업경영자들"이 차지해 버렸다는 것이다. 국가 정상들은 이제 큰돈을 가진 이들이면 아무한테나 달라붙어서 자기 나라를 팔지 못해 안달이 난 "떠돌이 세일즈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당시를 회상하며 쓴 비망록 『캐비닛에 갇혀서(Locked in the Cabinet)』를 읽어 보면, 이 재능 있고 혁신적이면서도 원칙 을 고수하는 전통적 민주당원인 라이시가 경제문제들에서 루빈, 벤슨, 패네타, 그리고 절대 권위의 재상 그린스펀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밀려나는 쓰라린 경험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324-325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면서 나라 팔아먹고 다니는 어떤 자가 떠올라 기분이 나빠짐.
프리드먼의 하이테크 "단일 세계주의(one-worldism)"에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 기초가 되어 있다. 프리드먼의 핵심어는 다원주의로서…그가 볼 때 이는 경제적 혁신과 성장의 열쇠이기도 하다. 제약 없는 상업 사회란 다양성이 꽃피는 사회라는 게 그의 관점이다. 이런 생각은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에 표출했던 바와 대단히 비슷하다.
부시도 프리드먼과 클린턴의 다원주의 신념을 공유했으며, 이는 세계시민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시의 세계시민주의는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프리드먼 및 클린턴과는 달랐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 신에게 이르는 길은 많으 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부시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존중하였으므로 미국의 민족적 다양성도 높이 존중했다.
부시는 9• 11 테러 이후 아랍 및 무슬림 이민자들을 다루었던 데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조장하려고 기를 썼던 혐오에 기반한 인종민족주의 포퓰리즘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부시에 대한 평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부시 정권이 무슬림 및 아랍 공동체와 이민자들에 고강도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감시를 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슬람 세력의 주변부 급진파들과 주류 이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일본계 미국인들을 집단 수용소로 집어넣은 바 있지만, 부시는 무슬림 미국인들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9•11 이후에도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계속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라틴계 미국인들은 부시를 자 기들의 벗이라고 여겼으며 2004년 선거에서 그에게 투표의 40 퍼센트를 던짐으로써 그의 호의에 답했다.
-380-381
부시에 대한 좀 다른 평가. 트럼프의 혐오선동과 비교해보니 부시마저 괜찮아 보이는....
하지만 그럼에도 잊어선 안 될 것이, 트럼프는 최소한 전쟁을 벌여 수십만 명을 죽인 적은 없는 반면 부시는 남의 나라를 침공해 아수라장을 만든 전쟁범죄자라는 사실이다.
부시가 꿈꾼 '소유자 사회'의 이상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내집 마련 꿈'을 도와준다는 좋은 의도가 이미 고삐 풀린 금융시장과 만나면서 참사로 이어진...
부시가 대통령으로서 국내에 가졌던 야심은 미국을 "소유자 사회"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자가 소유는 부시의 비전에서 중심이었다. 정책입안자들 사이에서는 이 잠재적 주택 소유자들의 다수가 소수자들, 특히 흑인 및 라틴계라는 점을 점점 인식하게 됐다. 이미 수십 년간 주택담보대출 관행에서 차별을 겪어 온 이들이었다. 자가 소유권을 소수자집단에 확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특히 호소력을 갖는 정책이었다. 이들은 기존 연방정부 직업 프로그램, 최저임금 인상, 공공주택 건설, 임금인상을 이룰 수 있도록 단체 협상에서의 노조 강화 등의 정책을 경멸했고, 이런 것들을 밀어내면서도 인종 간의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주택담보대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385
실망스러웠던 오바마의 금융위기 뒤처리.
오바마 정권이 감옥으로 보낸 은행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청산 명령을 받은 금융기관도 하나도 없었다. 오바마는 실제로 벌금을 매긴다거나 기소한다거나, 혹은 대중 여론의 비난으로 은행 경영진이 의회 청문회에 끌려 나가 망신을 당하게 한다든가 하는 그 어떤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바마가 기성 금융기관들에 가능한 한 충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 빨리 접어 버리려고 애를 썼던 이유는 바로 의료보험 개혁에 힘을 쏟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속히 끝내 버리려고 했던 것이 전략적인 실수였을 것이다. 사회복지 확장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미국 국민에게 경제의 공정함과 평등을 보여주기 위해 싸우는 쪽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412-413
금투세 포기해버린 한심한 한국 민주당이 떠오른다. 이런저런 구실을 갖다 붙이겠지만, 정치공학적 계산이라는 등신같은 짓거리이거나 지들 스스로가 금융 '투자'로 돈 버는 집단들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둘 다 이거나.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이며, 그것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거라는 생각은 1도 없는.
무너져 버린 금융시장이 스스로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시장이란 결국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판명되고 말았던 것이다. 좌파 쪽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뉴딜 질서에 있었던 강한 규제 기구들을 정부가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우파 쪽에서도 곧 "전문가(pundit)"라는 이들이 나와 대중의 민주적 통제 너머에 있는 "깊이 숨은 국가(deep state)"라는 게 암약하면서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모든 결과를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415
2008년과 2009년 사이의 대침체 기간과 그 이후에 출현한 비정규직 노동시장은 좌파들이 오랫동안 "무산계급(prolerariat)"이라고 부르던 이들과 달랐다. 이 집단에는 영구적인 빈민들만 포함되는 게 아니었다. 대학 졸업자들도 많았고, 중산층 심지어 중상류층도 상당수 있었다. 경제위기 이후 정규직 일자리를 잡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이 임시 계약 경제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확신하여 아예 구직을 포기한 경우들도 있었다. 또한 이 집단은 인종적으로도 다양하여… 풍요한 가정의 젊은이들이 이 프레카리아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이는 정치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434
이렇게 트럼프 시대의 발판이 마련되고...
트럼프는 사람과 제품들이 여러 나라를 쉽게 오가는 국경 없는 세계라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을 결코 신봉한 적이 없었다. 산업 관계에서나 국제관계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똑똑한 협상가들이 각자의 이익에 입각하여 직접 만나서 맺는 양자 간의 합의뿐이라는 것이었다.
-444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미국 대선, 트럼프 당선. 그래서 뒷부분은 좀 아귀가 안 맞게 돼버림.
트럼프와 샌더스를 양 축으로 '신자유주의 질서의 붕괴'를 얘기하는데, 샌더스와 좌파 포퓰리스트가 과대평가되는 결과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 요즘의 나를 보는 것 같음 ㅠㅠ
야구 경기나 다른 스포츠 경기에서도 선수들의 실적을 투입 대비 산출로서 어느 때보다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평가하려 드는 "애널리틱스" 행태에서도 나타난다. 또 일상에서 몇 보를 걸었는지 몇 마일을 뛰었는지 몇 칼로리를 섭취했는지 에너지를 얼마나 썼는지를 하루 종일 계측하려는 무수한 개인의 집착에서도 나타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서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되는지(혹은 안 되는지)를 보려고 끝없이 계산을 해대고, 이와 같은 행동에 몰두하는 사람들 수천만 명에게도 나타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관찰에 집착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끝도 없는 숫자 세기와 측량은 신자유주의 질서의 또 한 가지 핵심적 특징인 IT 혁명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이든 측량해야 한다는 지상명령뿐이다. (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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