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군 B29 폭격기 340여대가 2400톤이 넘는 소이탄을 일본 도쿄에 떨어뜨렸습니다. 몇개월 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이어지는 미국의 일본 패퇴작전의 서막인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그 몇년 전부터 태평양전쟁을 벌여 아시아 거의 대부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었지만 정작 일본 ‘본토’의 국민들은 전쟁 분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주요 전선에서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군국주의 정부의 선전이 사실이 아님을, 미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있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 바로 이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이미 도쿄는 1923년의 간토 대지진으로 한차례 초토화된 뒤였습니다. 20여년 동안 도쿄를 재건하면서 일본 당국은 시가지 곳곳 민간인 주거지역 사이에 군사시설을 섞어놓았습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일본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군수품 생산 등 군사적 기능까지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6시간 가까이 도쿄 상공에 백만발이 넘는 네이팜탄(소이탄의 일종)을 떨어뜨렸습니다.
일본 공식 집계에 따르면 약 8만4000명이 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고 100만명이 이재민이 됐습니다. 도쿄는 잿더미가 됐습니다. 당시 도쿄의 가옥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네이팜탄으로 거의 전소됐다 합니다. 훗날 생존자들은 “네이팜탄의 화력으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화상을 입었고 불붙은 기름이 강과 바다에서도 불길을 일으켰다”고 전했습니다. 물로 뛰어든 사람들이 불붙은 기름 때문과 연기에 질식해 숨지면서 도쿄의 강들이 시신으로 덮였다는 목격담도 있습니다.
몇 해 전 일본 할머니들에게서 '전쟁 직후엔 참 가난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의 할머니들이 한국전쟁 뒤의 가난을 이야기하는 데에야 익숙해 있지만, 사실 도쿄 대공습에 대해 설명한 글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식민통치국이었던 일본이 왜 전쟁 후에 그렇게 폐허가 됐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도쿄가 대공습으로 얼마나 초토화됐는지를 알고 나서야 어렴풋이 일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더군요.
▶사진을 첨부하고 싶지만 시각적 충격을 싫어하므로... 굳이 보고싶으시면
http://www.japanfocus.org/-Mark-Selden/2724 참고.
공습을 주도한 것은 미 공군이 분리되기 이전의 육군항공대였는데, 이 부대를 이끈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 1906-1990) 소장은 “일본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르메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며칠 전 어느 책에서 우연히 다시 접했습니다. 일본의 반핵 평화운동가 히로세 다카시가 쓴 책에 이 인물이 등장하지 뭡니까.
르메이는 저고도 전략폭격 작전으로 일본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저고도작전으로 미군 사망이 늘자 조종사들이 르메이에게 무리한 작전이라며 항의를 했는데, 르메이는 “최소한 10만명을 죽였으니 작전은 대성공”이라며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더글러스 맥아더가 르메이에 대해 "he was extraordinarily belligerent, many thought brutal"라고 평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네요.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다. 일주일 안에 일본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르메이는 냉전 시대에는 베를린봉쇄 뒤 서베를린 공수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소련과 쿠바에 대한 핵공격을 포함한 전면전을 주장하기도 한 강경파였습니다. 실제로 2차 대전 시의 일본 공습 때에는 단 엿새만에 일본의 대도시들이 거의 불탔습니다. 르메이는 남태평양 보급기지에 비축해둔 폭탄을 모두 쓴 뒤에야 일본 폭격을 중단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나오는 냉혹한 전쟁광이 르메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여담입니다만 영화의 주인공 '닥터 스트레인지' 역은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던 미국의 전쟁광 과학자 에드워드 텔러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타계한 미국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은 일본 공습과 핵투하를 비판하면서 “민간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은 일을 전투행위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서구가 내세워온 ‘양심’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실제 도쿄대공습에 참가한 미군 조종사들 중에서도 민간인들을 대량살상한데 대한 죄의식과 갈등을 느낀 이들이 상당수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도쿄 대공습을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냉전기 이래로 계속돼온 미국의 '초토화 작전'의 모델이 됐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책임에서는 일본도 자유로울 수 없지만,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한 도쿄대공세의 ‘전략적 교훈’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걸프전 등 이후 미국의 전쟁수행 때 그대로 되풀이됐습니다.
1968년 나오키문학상을 수상한 노사카 아키유키의 단편소설 <반딧불이의 무덤>은 대공습 이후 일본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훗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공습에서 살아남았지만 끝내 배고픔에 숨을 거둔 두 어린 남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일본인들이 스스로의 군국주의로 인해 어떤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도쿄대공습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훗날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됐습니다. 일본 우파들은 이 사건과 원폭 투하를 가리켜 “미군에 의한 대학살”이라며 일본을 희생자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살 장본인인 르메이는 61~65년 미 공군 참모총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아이러니하지만 전후 일본 자위대 창설·훈련에 기여한 공로로 64년 일본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사실 <반딧불이의 무덤> 애니를 보면서도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물론 도에이의 노조위원장을 지낸, 60년대 '좌파 지식인' 계열인 타카하타 감독은 일본을 피해자로 '왜곡'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작품은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입장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워드 진이 말한 것처럼 보편적 양심에 기반해 전쟁 범죄와 민간인 학살에 단호한 거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핵 우산 아래에서 숨쉬는 일본이 도쿄대공습을 거론하며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듯, 한국도 '원산폭격'에 대해 아무 말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범죄는 적이 저지른 것이든 아군이 저지른 것이든 모두 범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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