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런스 대로(Clarence Darrow. 1857-1938)는 미국의 변호사입니다. 다윈주의를 학교에서 가르친 남부의 교사 존 스콥스(John T. Scopes)와 엽기적 살인범 ‘레오폴드와 로엡’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존 스콥스는 테네시 주의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1925년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기소됐습니다. 당시 테네시 주는 ‘버틀러 법(Butler Act)’라는 법령을 통해 진화론 교육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테네시 주 대 스콥스 사건, 이른바 ‘스콥스 원숭이 사건(Scopes Monkey Trial)’은 미국에서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진화론 교육 논쟁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재판이 됐습니다. 기소 사실이 알려진 뒤 스콥스가 살고 있던 테네시 주 데이튼의 작은 마을은 일약 전국적인 미디어의 초점이 됐고, 유명 변호사들이 각기 검찰과 스콥스 편에서 변론을 펼쳤습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3번이나 나섰던 유명 정치인 겸 법률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검찰 편에서 스콥스의 유죄를 주장한 반면, 명망 있는 변호사였던 대로는 스콥스를 옹호했습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진화론과 종교가 양립할 수 있다는 모더니스트들의 일대 격전이었던 셈입니다. 재판은 신학과 현대과학의 경연장이 됐고, 창조론과 진화론이 정면대결을 벌였습니다.
스콥스 사건의 두 법률가, 클래런스 대로(왼쪽)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오른쪽). 사진/위키피디아
주 법원은 ‘현행법을 어긴 스콥스에게 죄가 있다’면서도 기소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배심원 평결에 따라 무죄 석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진화론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다시금 주 법을 이용해 판결을 뒤집고 진화론 교육을 막으려 애썼지만 과학적 사실을 가르치는 게 맞다는 여론에 밀려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레오폴드와 로엡’ 사건은 법률가로서 대로가 가진 가치관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네이선 레오폴드 주니어(Nathan Leopold, Jr. 1904-1971)와 리처드 앨버트 로엡 (Richard Albert Loeb. 1905-1936)은 각각 미시건 주립대학과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부유층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924년 14세 소년 로버트 프랭크스(일명 ‘바비’)를 살해,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두 청년의 살해 동기는 단지 ‘완전범죄를 저질러보겠다’라는 것이어서 세상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두 사람의 변호사로 나선 사람이 대로였습니다. 사형제도와 보복성 징벌을 비판한 그의 최종변론은 미국 형법제도는 물론이고 서구식 근대 형벌 체계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레오폴드와 로엡 사건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이 극본을 쓴 연극 <줄(Rope)>(1929년)과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동명 영화(1948년) 등 여러 편의 대중문화 작품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대로는 흑인들의 법적 평등을 위해 싸우면서 남들이 맡기를 꺼려하는 흑인 관련 재판에서 종종 변호인으로 나섰습니다. 1925년 대로가 맡았던 사건이 이른바 ‘스위트 살인사건’(Sweet Murder Trial)이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내과 의사 오션 스위트. 사진/위키피디아
오션 스위트(Ossian Sweet. 1895-1960)는 디트로이트의 내과 의사였습니다. 흑인 고등교육의 본산 격인 워싱턴의 하워드 대학을 나와, 드물게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디트로이트에 최초의 흑인 병원인 던바 병원(Dunbar Hospital)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백인들이 거주하는 갈란드(Garland)에 집을 사면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지금은 ‘갈란드 하우스(Garland House)’ 또는 ‘오션 스위트 하우스(Ossian Sweet House)’ 등으로 불리며 유적처럼 남아 있는 이 집은 백인 이웃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백인 주민들은 흑인 가구가 이사 오는 것에 반대하면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스위트는 자구책으로 친구들과 형제들을 불러들여 집을 지켰습니다. 이사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백인 주민들이 갈란드 하우스를 공격했고, 2층에 있던 스위트의 친구들은 총기로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언 브레이너(Leon Breiner)라는 백인 주민 1명이 숨졌습니다. 스위트의 가족과 친구들 11명이 모두 살인죄로 기소됐습니다.
스위트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미시건 주 법원에서 가장 리버럴한 인물로 분류되던 프랭크 머피(Frank Murphy)였습니다. 하지만 진보적인 머피도 들끓는 백인 여론 때문에 공소를 기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배심원단은 전원 백인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스위트 등이 구속 수감돼 있는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도 문제였습니다.
NAACP는 이 사건을 흑백 평등을 위한 법정 투쟁의 계기로 부각시키기로 결정하고 지원에 나섰습니다. 재판 초반 스위트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NAACP는 스콥스 사건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던 대로에게 변호를 의뢰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내 의뢰인들이 유죄라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곧 생각이 바뀌실 테니까요.”
대로가 당시 법정에서 배심원단을 향해 한 말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은 바꾸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여러분 어머니의 젖에서 흘러나와 피부색처럼 몸 속에 들어갑니다. 만일 이 피고인들이 백인들이고, 그들이 유색인종 폭도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이었다면 아마 체포되지도, 기소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 의뢰인들은 살인죄로 기소됐지만 사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기소된 겁니다.”
대로의 변론 뒤 이 사건에 대한 배심원단의 의견이 갈려 불일치 배심(hung jury)이 돼버렸습니다. 미국 관습법상 형사소송의 경우는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로 평결을 내려야 유죄가 됩니다. 배심원단 내에서 의견이 엇갈려 평결할 수 없는 상태를 hung jury 라 합니다.
판사는 피고인들을 분리해서 재판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곡절 끝에 재판은 이듬해까지 이어졌지만 마침내 스위트와 가족, 친구들은 모두 공소 기각되거나 무죄 석방됐습니다.
갈란드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오션 스위트의 집. 사진/위키피디아
브레이너를 숨지게 만든 총격 주범으로 기소된 스위트의 동생 헨리 스위트의 재판은 1926년 5월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재판에서 대로는 무려 7시간에 걸쳐 최종변론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 여기 있는 피고인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 오게 된 겁니다. 이 사람들 조상은 아프리카의 밀림과 평원에서 생포됐습니다. 마치 여러분이 야생동물을 사냥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집을 잃고 혈육과 떨어져, 상자에 담긴 정어리처럼 노예선에 실렸습니다. 그들 중 절반은 대양을 건너는 도중에 숨졌고, 일부는 노예로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선택을 강요당하자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붙잡혀 여기로 끌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온 겁니다. 노예로 팔려와 월급도 없이 일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 것이 이들의 역사입니다. 이 사람들은 노예의 자손들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인종이 어떤 사람이든 권력이든, 빚을 지고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들 흑인들입니다. 우리 인종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이 흑인들에게 결코 다 갚지 못할 빚과 의무를 안고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내가 속한 인종이 그들에게 진 빚을 일부라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변론은 미국 흑인운동 역사에 남는 명연설로 기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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