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 그러니까 '마지막 차르 일가의 비극'이라든가... 뭐 이렇게 극적인 요소를 한껏 강조한 이야기나 미스테리나 그런 따위를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로마노프 가의 비극' 같은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 생각합니다만...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러시아인들 혹은 유럽인들에게 마지막 황실 따위가 무엇이었기에'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정서' 상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보리스 옐친의 사과연설이라는 지점에 이르자 결국 이 모든 것이 '정치적인 문제'였음이 확실해졌다고 할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죠. 다 아시다시피, 1917년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차르(Tzar)’를 정점으로 철저한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던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당시 파국으로 치닫던 러시아 제국을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로마노프(Romanov) 황실의 14번째 군주인 황제 니콜라이2세(Nikolay II, Nikolay Alexandrovich Romanov. 1868-1918)였습니다.
니콜라이2세는 성격이 유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혁의지도, 혁명세력에 저항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1894년 11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먼 친척뻘인 영국 출신의 앨릭스(Alix of Hesse. 1872-1918)와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 니콜라이2세가 즉위했기 때문에 앨릭스는 결혼과 함께 알렉산드라 황후(Alexandra Feodorovna Romanova)로 봉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올가(Olga Nikolaevna), 타티아나(Tatiana Nikolaevna), 마리아(Maria Nikolaevna), 아나스타샤(Anastasia Nikolaevna) 네 딸과 아들 알렉세이(Alexei Nikolaevich) 등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니콜라이2세 재위 시절의 러시아 제국은 말 그대로 ‘무너져가는 거함’이었습니다. 극동에서는 신흥 강국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가 패배했고, 1차 대전에 끼어들었다가 330만 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패전의 여파로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2세는 폐위돼 고원 도시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 있는 알렉산드르(Alexander) 궁에 가족과 함께 유폐됐습니다. 알렉산드르 궁은 원래는 러시아 황제들이 좋아하는 별장이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2세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돼 있으면서 영국으로의 망명을 물밑 추진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엔 은신처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자국 내의 반발을 의식해 입장을 바꿨습니다.
1917년 8월, 온건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er Fyodorovich Kerensky. 1881-1970)가 이끄는 혁명정부는 로마노프 일가를 우랄산맥에 위치한 도시 토볼스크(Tobolsk)로 옮겼습니다. 차르의 폭정에 착취당해온 민중들과 볼셰비키의 분노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옛 황실 일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옛 황실에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케렌스키의 과도정부는 무너지고, 볼셰비키가 곧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듬해인 1918년 4월 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르, 그리고 딸 마리아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돌아간 곳은 황실 별장이던 알렉산드르 궁이 아닌 ‘이파티예프 저택(Ipatiev House)’이었습니다. 로마노프 일가는 예카테린부르크의 ‘붉은 군대’에 억류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볼셰비키 반대 세력인 백군(白軍)이 도시를 포위해왔습니다.
볼셰비키는 착취자 차르를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 했지만, 정세가 급변하고 내전이 격화되자 결국은 황실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쪽으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백군이 로마노프 일가의 신병을 확보하면 다시 차르를 옹립해 구심점으로 삼고 반(反)혁명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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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2세는 물론이고, 로마노프 일가를 모두 제거해야 했습니다. 자칫 자녀들이 살아남으면 백군의 추앙을 받거나 볼셰비키 혁명을 방해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지원 속에 다시 차르 행세를 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서유럽 국가로 황실 일원이 탈출을 하면, 내정 간섭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고 합니다.
1918년 7월 16일, 볼셰비키 군 내에서도 체코계로 구성된 부대가 예카테린부르크를 봉쇄했습니다. 도시 안에 로마노프 일가가 있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당시 체코계 부대가 도시를 봉쇄한 이유가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백군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모스크바 소비에트최고위원회로부터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하라는 전보가 도착했고, 군인들은 이튿날인 7월 17일 새벽 잠든 일가를 깨워 서둘러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반 지하방에 감금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니콜라이2세는 자신들을 지키는 부대의 지휘관이던 야코프 유로프스키(Yakov Yurovsky)에게 의자 2개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물었고, 의자를 갖다 주자 그 위에 앉고는 어린 딸을 무릎에 앉혔다. 나머지 의자에는 알렉산드라가 앉았다'고 합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소총수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로프스키는 공산당 우랄집행위원회 명의로 된 사형집행 명령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의 친척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계속 공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랄 집행위원회는 당신의 처형을 결정했다….”
처형은 참혹했습니다. 니콜라이2세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으나 이미 소총수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렉산드라와 큰딸 올가는 스스로를 감싸며 총탄을 피하려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유로프스키는 총을 들어 니콜라이2세를 쏘았고, 차르는 즉사했습니다.
올가와 마리아, 아나스타샤도 숨졌습니다. 마지막 남은 딸 타티아나와 아들 알렉세이는 유로프스키가 직접 처형했습니다. 황후의 시녀였던 안나 데미도바는 도망을 치려다가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페테르 에르마코프(Peter Ermakov)라는 장교는 술에 취한 채 숨진 차르와 황후의 시신을 칼로 찔렀으며, 현장은 피로 가득 찼습니다.
차르 일가의 비극을 둘러싼 진실은 수십 년 동안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제의 딸 아나스타샤가 비밀리에 살아남았다는 이른바 ‘마지막 황녀의 미스터리’가 퍼지기도 했고, 서방에서 대중문화를 통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황실 일가를 재판 없이 잔혹하게 살해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군대의 전신인 ‘붉은 군대’의 황실 가족 학살을 러시아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은 199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2007) 대통령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성당에서 차르 일가의 비극적인 죽음을 인정하는 연설을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러시아의 역사적인 날입니다. 마지막 러시아 황제와 그 가족이 살해된지 8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이 잔혹한 범죄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해왔습니다.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학살은 우리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페이지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무고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묻음으로써 우리는 선대의 원죄를 갚고자 합니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수십 년 동안 정당화해온 사람들, 즉 우리 모두가 유죄입니다.”
옐친은 차르 일가가 ‘붉은 군대’에 처형됐다는 부끄러운 비밀을 전 세계 앞에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습니다. 옐친의 연설은 TV로 중계됐고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옐친은 냉전 붕괴 뒤 러시아의 첫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죠. 1991년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공산당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항거하며 탱크를 막아서 쿠데타 세력을 철수시켰고, 이를 통해 ‘소련 민주화의 영웅’이 됐습니다.
옐친이 역사적인 연설을 한 예카테린부르크는 차르의 비극이 깃든 곳이자, 옐친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옐친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961년 그곳에서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에 옮겨간 뒤로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고 소련 공산당의 최고 정책결정 기관인 정치국(Politburo) 국원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급진개혁을 요구하며 점진적 개혁노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뒤에 정치국에서 축출됐습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개혁에는 고통이 따른다”며 혼란과 소련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점진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옐친은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국민들은 옐친을 택했고, 그는 러시아의 초대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옐친은 1991년부터 8년 동안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집권 기간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옐친은 태도가 투박하고 변덕스러운데다 술을 좋아했습니다. 국내외에서 러시아 민주화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동시에 건강문제와 알코올 중독 등으로 늘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습니다. 집권 말기에는 사실상 옐친은 명목 상의 대통령일 뿐이었고, 예브게니 프리마코프(Yevgeny Primakov) 총리가 행정을 도맡았습니다. 하지만 노회한 옐친은 프리마코프와의 권력다툼에서 끝내 물러서길 거부했으며 자신의 적이었던 공산당에게 내각을 넘기고 1999년 프리마코프를 해임했습니다.
그 해 12월 국가두마(러시아의 하원) 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옐친의 지지를 등에 업고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전격 부상하며 총리에 올랐습니다. 푸틴은 옐친 대신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2000년 1월 1일 크렘린을 물려받았습니다.
옐친은 2007년 4월 심장질환으로 숨졌고, 푸틴 정부는 국가애도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그리도 냉대하면서 옐친은 '정치적 아버지'로 모셨던, 푸틴의 행보가 인상적이었는데... 벌써 옐친이 숨진 지도 5년이 되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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