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7월 2일, 무루로아 Mururoa 환초는 산산조각이 났다.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폭발과 함께. 몇 초 만에 열대의 파란 하늘은 밝은 오렌지빛 섬광으로 물들었고 방사성 버섯구름이 대기로 치솟았다. 평화롭던 석호는 격렬하게 들끓었고 백사장의 코코넛 나무들은 폭발의 위력으로 구부러졌다.”
1966년의 그 날, 프랑스는 무루로아 환초에서 대기 중 핵실험을 했다. 위에 옮겨놓은 것은 뉴질랜드의 환경단체 아오테아로아 평화운동 Peace Movement Aotearoa이 2020년 그날의 풍경을 재구성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 실험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샤를 드 골 Charles de Gaulle은 “아름답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루로아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환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아오푸니 Aopuni라고도 부르는 이 산호섬은 타히티 섬에서 1250킬로미터 떨어진 남태평양의 투아모투 Tuamotu 군도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가 환초와 주변 섬들을 자기네 땅으로 만든 뒤 첫 핵실험을 한 것이 그 날이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비판이 쏟아졌지만 프랑스는 이 섬에서 1996년까지 핵실험을 했다. 무루로아와 그 옆 팡가타우파 Fangataufa 환초 등에서 실시한 핵폭발의 횟수가 193회에 이른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물론이고 타히티 등 태평양 섬 사람들은 이런 핵실험의 후유증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는 그 피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3월 9일 프랑스 학자들과 독립언론인 디스클로즈 Disclose, 미국 프린스턴대학, 영국의 환경 관련 연구기업 인터프리트 Interprt 등은 프랑스군이 기밀해제한 문서 2000여건과 현지 주민들의 증언, 학자들의 추산 등을 종합하는 2년여의 작업을 통해 피해 상황을 파악한 ‘무루로아 파일’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무려 11만 명이 방사능에 노출돼 건강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폭발 당시에는 그 일대에 거주하던 이들 ‘거의 모두가’ 피해를 모면할 수 없었다. 그동안 프랑스 군과 정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한 적이 있지만 태평양 핵실험의 규모와 파괴력,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을 포괄적으로 조사한 독립된 연구보고서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조사가 이뤄지는 데에도 50년 넘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특히 1966년부터 1974년 사이에 실험이 많았고 피해도 컸다. 조사팀은 1966년의 알데바란 Aldébaran 실험, 1971년의 엔셀라드 Encelade 실험, 1974년의 센토르 Centaure 실험 등 세 차례의 핵실험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1974년 7월 17일 벌어진 프랑스군의 41번째 핵실험 센토르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타히티 섬의 주요 도시인 파피티 Papeete에 당시 거주하던 8만 명을 비롯해 당시 폴리네시아에 살았던 주민 11만 명이 모두 고스란히 방사능에 노출됐다. 프랑스 원자력위원회 CEA가 2006년 발표한 보고서의 피해 상황보다 실제로는 2~10배 심각했던 것으로 이 조사에서 드러났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핵실험이 실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7월 16일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Manhattan Project를 통해 핵폭탄 개발에 거의 성공한 미국은 ‘트리니티 Trinity’라는 암호명으로 뉴멕시코의 앨러모고도 Alamogordo 부근 사막에서 폭발 실험을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강타한 핵폭탄, 그리고 2차 대전의 종전이었다. 소련이 1949년 8월 29일 첫 핵폭탄 RDS-1을 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6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하며 냉전의 핵 경쟁에서 초반부터 앞서 나갔다. 미국의 핵실험은 주로 서부의 남서부의 사막과 태평양의 미국령 섬인 마셜군도 등에서 이뤄졌다.
소련의 주요 핵실험 무대는 노바야젬랴 Novaya Zemlya 일대였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출신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돕스 Michael Dobbs는 저서 <1962>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 메인 주 크기의 맹장 모양의 군도인 노바야젬랴는 대기권 내 핵실험을 하기에는 완벽한 장소였다. 1955년 이후 에스키모 원주민 536명을 본토에 재정착시켜 그 자리를 군인, 과학자, 건설노동자들이 차지했다.” 핵무기 체제는 지구 곳곳에서 소수민족의 땅과 삶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며, 그 뒤에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있었다. 무루로아의 비극은 그런 역사와 동떨어져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은 주로 주민이 적거나 거의 없는 지역에서 핵실험을 했던 것에 비해 프랑스는 무루로아 주변에서 주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파괴시켜가며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냉전의 장벽이 굳어지고 핵무기 경쟁이 격화되면서 핵실험 또한 계속됐다.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소련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Andrei Sakharov는 대기권 핵실험을 ‘인류에 대한 범죄’라 불렀고, 미국에서도 ‘맨해튼 프로젝트의 아버지’ 격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 같은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반핵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1950년대와 60년대 내내 미국과 소련은 핵 경쟁을 계속했다. 특히 미국이 태평양의 비키니 Bikini 환초에서 벌인 1954년 3월 1일의 ‘캐슬 브라보 Castle Bravo’ 핵실험, 소련이 1961년 실시한 ‘차르 봄바 Tsar Bomba’ 핵실험 등은 규모와 대기오염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소련의 차르 봄바에 미국은 1962년 잠수함에서 핵탄두가 장착된 미사일을 발사하는 ‘도미닉 작전 Operation Dominic’으로 응수했다. 인류를 절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두 나라의 경쟁에 세계의 비판과 압력이 작용하면서 1963년 부분적인 핵실험 금지 조약이 만들어졌으나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엘 등이 가세하면서 핵 경쟁과 그로 인한 피해는 줄지 않았다. 마침내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Comprehensive Test Ban Treaty이 만들어진 것은 냉전이 끝난 뒤인 1996년에 이르러서였다.
핵실험은 곳곳에서 방사능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 그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가 마셜군도의 환초인 비키니다. 2차 대전 뒤 미 해군은 핵무기를 실험할 곳을 세계에서 물색했는데, 한때는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섬까지 후보지로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연구로 너무 유명한 섬이라 결국 제외했고 비키니를 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비키니를 고른 미 해군은 1946년 이 섬 주민들을 이웃한 롱게리크 섬 Rongerik Atoll으로 강제이주시켰다.
핵물질 1메가톤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50배에 이르는 위력을 갖는다. 그런데 1945년에서 1992년 사이에 각국이 실험실이 아닌 대기 중이나 수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쓰인 핵폭탄의 파괴력은 545메가톤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340메가톤 분량의 핵실험이 1961년과 1962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이뤄졌다. 소련이 미국의 턱밑에 있는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함으로써 양국이 핵전쟁 직전으로 치달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1962년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 언론들의 통계를 보면 미국은 1050여회의 핵실험을 했는데 그 중 900차례 이상이 네바다주의 실험장에서 실시됐다. 100여건은 태평양 섬과 환초에서 이뤄졌다. 소련의 핵실험은 700여회에 이르며 주로 노바야젬랴와 카자흐스탄에 있는 세미팔라틴스크 Semipalatinsk, Semey에서 벌어졌다. 영국은 호주 몬테벨로 Montebello 제도와 마라링가 Maralinga, 태평양의 크리스마스 섬 Christmas Island 등에서 40여 차례 핵실험을 했다.
가장 큰 비난을 부른 것은 프랑스의 핵실험이었다. 프랑스는 대기 중에서 50회, 지하에서 160회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리네시아에 앞서서 핵실험장으로 쓰인 곳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이다.
1960년부터 4차례 대기 중 핵실험을 한 프랑스는 방사능 낙진으로 군인들과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비판이 일자 사하라 사막의 지하 핵실험으로 방향을 바꿨다. 1960년 2월 13일 오늘날의 말리와 인접한 곳에서 프랑스가 최초로 지하 핵실험을 했을 때의 작전명은 제르부아 블뢰 Gerboise Bleue였다. 제르부아는 땅굴에서 사는 들쥐를 가리킨다.
핵실험으로 군인들은 물론이고, 주민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방사능이 누출돼 알제리와 폴리네시아 주민들과 군인 15만 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잡지 르파리지앵은 사하라 사막 핵실험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입수, 프랑스 군이 자국 군인들까지도 핵폭발 피해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도구로 썼다는 사실을 폭로한 적 있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핵폭발 현장에 병사들을 도보로, 혹은 장갑차량으로 근접하게 해 피해 정도를 측정했다는 것이다.
유전질환을 앓는 피폭자 2세들과 낙진 피해자, 핵실험으로 인한 부상자들은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지만 파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2003년 타히티를 방문한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은 “핵실험이 주민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핵실험이 옛 식민지와 남태평양에 미친 영향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고 반인도적 범죄라는 비난이 빗발치자 결국 프랑스 정부도 손을 들고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2009년 의회가 통과시킨 핵실험 피해자 보상법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처음으로 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액수가 형편없이 적었고, 알제리에서 피해를 인정해준 사람도 500명뿐이었다. 미국은 피해 주민들의 계속되는 요구 속에 1990년 방사능누출보상법을 만들었고 2009년까지 약 14억 달러를 지급했는데 그것과 비교해도 프랑스의 보상은 형편없이 적었다. 영국에서는 호주령 크리스마스 섬의 핵실험장에서 근무했던 전역군인 1000명 가까이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정부의 공식 보상은 아직 없다.
2021년 무루로아 파일이 공개되면서 프랑스의 과거 핵실험과 피해자를 방치한 행위에 대해 다시 비판이 일었다. 프랑스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카테린 세르다 Catherine Serda라는 여성은 어릴 적 핵폭발을 겪었고, 가족 가운데 8명이 암에 걸렸다고 증언했다. 폴리네시아 출신으로 프랑스 정부의 피해를 보상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겨우 63명에 그쳤다.
그나마 독립적인 언론과 연구기관이 조사보고서라도 내놓을 수 있는 프랑스의 경우는 어쩌면 나은 것일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핵실험이 식민지로 점령한 땅에서 주로 이뤄졌듯이, 중국의 핵실험 역시 내부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장위구르에서 주로 이뤄졌다.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 있는 롭누르 Lop Nur는 4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유서 깊은 호숫가 마을이었지만 관개농업으로 1920년대에 호수의 물이 완전히 말라버리고 농토였던 곳에 관개수의 염분이 올라와 소금땅이 됐다.
1964년 중국이 첫 핵실험을 한 곳이 여기였다. 그 이래로 중국은 이곳에서 수십 회에 걸쳐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중국 정부는 롭누르의 말란 Malan 핵기지에서 이뤄진 과거의 핵실험으로 인한 오염을 정화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1980년대 이후로는 핵실험을 한 적이 없다며 부인하고 있으나 미국은 1996년 7월까지도 롭누르에서 중국군이 핵실험을 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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