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서 멈춰버렸다. 에버기븐(Ever Given)이라는 컨테이너선이 23일 오전(현지시간)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했다. 2018년 건조됐으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선박이다. 소유주는 쇼에이키센이라는 일본 회사이고 배를 실제로 운항하는 용선사는 대만 에버그린이라는 업체이며, 선적은 파나마로 돼 있다.
배는 중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는 중이었다. 폭 59m, 길이 400m, 무게 22만4000톤. 무려 컨테이너 2만개를 싣고 다니는 거대한 배다. 미국 언론들은 이 배를 세로로 세우면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높이라고 보도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선체가 항로를 이탈했고 바닥에 충돌한 것으로 선사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뱃머리 한쪽은 제방에 박혔고 한쪽은 반대쪽 제방에 걸쳐진 상태로 운하를 가로막고 있다. 다행히 선원들은 무사하고 해양 기름유출 같은 일은 없었다.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은 중장비를 동원해서 좌초한 뱃머리 쪽을 굴착하고 있다. 배가 운하를 가로로 막고 있으니, 일단 운하와 평행이 되도록 세로 방향으로 돌려서 물에 띄운 뒤에 이동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배가 워낙 크다 보니 부양을 하려는 시도를 한 차례 했다가 실패했다. 25일에는 일본 측 선주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전문 구난업체를 선정해 현장에 투입했다고 밝혔다. 배가 2만여 개의 컨테이너로 꽉 차 있는데 우선 무게를 줄이는 게 관건이다. 실려 있는 컨테이너를 빼내는 것은 절차도 복잡하고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평형수를 빼내서 부양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사고 처리에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길이가 약 190km, 세계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운하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이어지는 길목이며 글로벌 교역의 핵심 통로다. 지난해 이 길목을 통과한 배가 약 1만9000척이라고 한다. 하루 평균 50척 넘는 배들이 지나갔다. 세계 교역량의 12%가 이곳을 거치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수출품들이 배로 운반될 때 모두 여기로 이동한다고 보면 된다.
사고 때문에 대기 중인 배만 150여척.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하루 90억 달러(약 10조2천억원) 어치 화물의 발이 묶이는 것이라는 계산도 있다. 운하의 북쪽은 지중해, 남동쪽은 홍해로 연결되는데 홍해쪽 수에즈 항구와 운하 사이에 그레이트비터 호수가 있다. 일단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배만 해도 30여척이라고 한다. 2004년에 트로픽 브릴리언스라는 유조선이 좌초돼 사흘 간 운하가 막힌 적이 있다. 2017년 10월 일본 배가 가로막아서 몇 시간 운항이 지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처럼 큰 사고는 없었다.
운하가 막히면 돌아가는 방법이 있지만, 멀리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가야 한다.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을 둘러서 가려면 운항 거리가 무려 9600km가 길어진다. 대륙을 빙 돌지 않아도 되게 하려고 애당초 이 운하를 뚫은 건데...
노선이 저렇게 늘어나면 대형 유조선 같은 큰 선박들은 연료비만 30만달러(약 3억4000만원)가 늘어난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길게는 운항 기간이 40일 넘게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으니 글로벌 선사들 중에는 사고 수습이 늦어질 것에 대비해서 희망봉을 경유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곳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의 노선이 길어지면 기름값이 더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화물 수송이 지체돼 입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선박 운항이 지연되면 선주들은 하루에만 6만달러(약 7000만원)씩 손해를 본다고 한다. 만일 일주일 넘게 걸린다면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얘기다.
북유럽과 동아시아 간에는 이론적으로는 북해 항로로 우회하는 것도 가능하다. 러시아는 슬그머니 북해항로를 홍보하면서 선사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유럽에서 러시아 동부 시베리아 해안까지 잇는 항로를 열어보려고 애써왔다. 수에즈 운하에서 사고가 나자 러시아 핵에너지국인 로사톰(Rosatom)은 25일 "북해 항로를 수에즈의 대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2009년에 벨루가그룹이라는 독일 해운회사가 쇄빙선 없이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한국 울산 사이 7400킬로미터에 걸쳐 배를 운항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북해항로가 열리는 것은 여름철 6~8주에 불과하다.
결국 수에즈 사고로 세계 교역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벌써 1년 넘게 세계 물류가 휘청거렸다. 각국이 경제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수에즈 운하까지 막힌 꼴이다. 작년에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팬데믹을 겪으며 상당 기간 제조업 생산이 줄었다. 다행히 중국 경제는 회복되고 있지만 내수가 늘어나면서 중국이 유럽 등지로 보내는 수출물량이 줄었다고. 그러던 판국에 수에즈 사고가 나자 외국 언론들은 “유럽은 커피도 모자라게 되는 것 아니냐”고 보도하고 있다.
좀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인스턴트 커피를 만드는 로부스타 원두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거기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유럽으로 수입해 가서 네스카페 커피믹스를 만들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수입하는 쪽도 문제지만 수출하는 쪽에도 큰일이다. 물류가 막히면 재고 물품을 쌓아둬야 하는데 기업들 입장에선 모두 손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 수습이 늦어지면 한국도 유럽으로의 수출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이집트에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해 한국 기업들의 공장이 있다. 여기서 생산된 물건들은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통해 지중해로 나가 유럽으로 향하거나, 수에즈 운하를 거쳐 중동과 동아프리카 일대로 수출된다. 일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홍해 쪽, 즉 이집트 동부 해안과 내륙 육로를 거쳐서 상품이나 부품을 운반하는 방안도 있기는 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진다. 또 소말리아계 극단세력 공격 같은 지정학적 불안요인도 있다.
에너지값에 미칠 영향도 관심거리다. 국제유가가 계속 낮은 상태이긴 하지만 이 사고 때문에 잠시 올라갔다. 중동에서 유럽으로 가는 유조선과 액화천연가스 수송선들은 수에즈 운하를 거친다. 마켓워치 보도를 보니 2017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뱃길로 수송되는 원유의 9%, 액화천연가스(LNG) 8%가 수에즈 운하를 지났다.
Concerns over the Suez Canal accident tilt toward natural gas
특히 유럽은 LNG 걱정을 하고 있다. 세계 최대 LNG 생산국인 카타르에서 유럽으로 보내는 양이 많기 때문이다. 작년에만 대형 LNG 선박 260척이 카타르에서 수에즈 거쳐 유럽으로 갔다. 미국 에너지시장 전문업체 리스타드는 "수에즈 운하가 2주 동안 막히면 유럽행 LNG 100만톤이 못 가게 된다"고 분석했다. 장기적인 영향은 적을 것으로 보이고 아직 천연가스 가격변동도 심하지 않지만, 수에즈 운하가 정상화되기까지 오래 걸릴 것에 대비해 미국 LNG 업체들은 유럽으로 수출을 늘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마켓워치는 전했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 간 교역로의 길이를 단축시켰을뿐 아니라 동아프리카와 인도양 경제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운하 덕에 아시아-유럽 간 선박이 내뿜는 이산화탄소 양이 44% 줄어든다는 분석도 있다.
수에즈 운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무려 4000년 전에 나일강 하류와 홍해를 잇는 고대 운하를 만들었던 흔적이 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뱃길을 뚫는 구상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나폴레옹 시기에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관심을 보였고, 1830년대부터 운하를 뚫는 구상을 했다. 설계와 건설에 몇 십 년이 걸려서 1869년 11월 오늘날의 수에즈 운하가 완공됐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바다의 지름길이 마침내 생겨난 것이다.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수에즈 운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후 20세기에 이집트가 독립해서 현대 공화국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이 운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 자산의 하나로 취급됐고 갈등도 많았다. 1936년 영국군이 철수했지만 수에즈운하지구(Suez Canal Zone)를 만들어서 계속 관리를 맡았다. 이집트는 1956년 운하 통제권을 회수해 관리를 국영화하고 수에즈운하관리청을 만들었다. 폭이 좁아서 일방통행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배들이 시간을 정해 한쪽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2015년에는 양방향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확장공사도 했다.
아랍뉴스의 2월 보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이집트가 운하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56억달러, 6조3000억원에 이른다. 이집트는 2014년부터 군 출신인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데 수에즈운하관리청의 청장인 오사마 라비도 해군 장성 출신이다.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국가 자산인 동시에 정치적 무기이기도 하다. 워낙 중요한 교역로여서 이미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정으로 "전쟁기간에도 모든 배들이 이 운하는 통과하게 하자"는 약속이 정해졌으나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을 상대하는 무기로 이 운하를 활용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6년 10월~1957년 4월의 운하 봉쇄였다. 이 때의 중동 분쟁은 '수에즈 위기'라고도 불리는데, 이집트가 운하의 일부를 막았으며 이스라엘 선박들이 지나다니게 못하게 했다. 이를 빌미로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군이 침공해 운하를 점령했다. 냉전 시절이 격화되는 시기에 이집트가 '미국의 동맹들'과 갈라서는 상황을 걱정한 미국이 나서서 세 나라가 군대를 철수시키게 만들었고 이후 유엔군이 주둔했다.
1967년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며 3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집트는 다시 수에즈 운하를 봉쇄했다. 최근 인사이더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60년대에 핵폭탄까지 동원해서 이스라엘에 운하를 뚫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로런스 리버모어 연구소 기밀문서에서 나온 내용이라는데, 이집트가 자꾸 수에즈 운하를 정치적 무기로 삼자 지중해에서 이스라엘을 거쳐 홍해로 나가는 운하를 하나 더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늘 이 문제에 민감한 이스라엘은 2012년에도 지중해에서 홍해까지 남부 네게브 사막을 거쳐가는 육상 수송로를 만들려고 철도를 계획했지만 수익성이 없어 2019년 결국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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