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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의 관을 열다

딸기21 2010. 7. 1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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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한지 180년이 지나 때 아닌 뉴스거리로 등장했다. 볼리바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현대판 볼리바리즘(볼리바르주의)’을 내걸고 나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끝내 볼리바르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 조사에 들어갔다.


차베스는 16일 새벽 인터넷 단문블로그 사이트 트위터 계정(@chavezcandanga)에 글을 올려 “오늘 새벽부터 우리는 해방운동가 볼리바르의 영웅적인 유해를 검사하는 과학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유의 과장된 말투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싯구를 빌어 “오늘 사람들이 깨어날 때엔 100년만에 깨어나시는 아버지, 대지와 물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일간 엘우니베르살은 인터넷 영문판 뉴스에서 “차베스는 자기가 영웅처럼 숭배하는 볼리바르가 암살됐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드러내왔다”면서 “이미 전에도 볼리바르의 사망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혀보겠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고 전했다.

차베스의 트위터 발표 뒤 베네수엘라 국영TV는 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예복을 갖춰입은 과학자들이 카라카스의 판테온(국립묘지)에서 볼리바르의 유골을 수습하는 모습을 내보냈다. 과학자들 옆에서는 차베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국가를 따라부르는 모습이 비쳐졌다.
차베스는 트위터에 “거룩한 유골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면서 “볼리바르는 숨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당국은 새로 출범한 법의학연구소 연구팀 등 전문가들이 참여해 볼리바르의 유골을 조사, 암살 여부를 알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Venezuelan president Hugo Chavez speaks during a meeting at Miraflores Palace in Caracas July 16, 2010. /로이터





베네수엘라는 앞서 이달 초에는 에콰도르에서 사망한 볼리바르의 연인 마누엘라 사엔스 무덤의 흙을 가져와 볼리바르 묘 옆에 묻었다. 사엔스는 디프테리아로 숨져 화장됐기 때문에 유해도 없는데, 같은 좌파인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까지 가세해 숨진 볼리바르 커플을 다시 만나게 하는 상징적인 행사를 열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볼리바르는 1783년 현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스페인계 귀족 대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1799년 스페인으로 가 유럽생활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정신에 심취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며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의 사상을 접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라틴아메리카로 돌아간 그는 스페인계 혼혈인 끄리오요 귀족들을 규합해 독립투쟁을 벌였다. 1819년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킨 것을 시작으로 콜롬비아, 키토(현 에콰도르), 페루 등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세워 초대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다른 신생 독립국가들을 통합시키는 데에 실패한데다가 공화국 내 반란세력들의 암살음모가 끊이지 않자 1830년 결국 권력을 내놓고 스스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 해 볼리바르는 46세의 나이로 결국 숨을 거뒀다. 볼리바르 사후 그가 세웠던 라틴아메리카는 ‘그란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로 갈라졌다. 볼리바르가 외쳤던 통합의 정신은 1889년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서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도 남미에서는 ‘엘 리베라토르(해방자)’라 불리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폐결핵으로 숨졌다는 견해가 많지만 확실히 입증된 것은 없으며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2007년 차베스는 볼리바르가 콜롬비아 군인들에 암살됐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이웃한 친미우파 국가 콜롬비아와 껄끄러운 관계였고, 이듬해에는 국경분쟁이 일어나 무력사용 직전까지 갔었다. 지난 4월 미국 과학자가 “볼리바르가 오염된 식수 등을 통해 비소에 중독돼 숨졌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비소 중독이 곧 암살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무된 차베스는 암살설을 밀어붙이고 급기야 유골을 꺼냈다. 콜롬비아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베네수엘라가 볼리바르의 적자임을 보여주는 것, 볼리바르의 남미통합 이상에 대한 관심과 붐을 일으키는 것 등 여러가지 목적을 띤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볼리바르 관을 연 뒤 차베스가 한 행동은 콜롬비아를 비난하는 것이었다”면서 유골 조사가 두 나라 간 또다른 악재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가 좌익 게릴라를 계속 밀어주고 있다며 17일 미주기구(OAS)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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