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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딸기21 2003. 1. 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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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은 노엄 촘스키와 프랑스 학자들의 대담/인터뷰를 엮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刊). 정작 촘스키의 언어학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숙명의 트라이앵글>이라든가 <불량국가>, 몇해전 읽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등의 책들과 몇편의 단문들로 해서 낯선 저자는 아니다.
사실 촘스키는 글 자체는 비비 꼬여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명확, 명쾌해서 오히려 책읽는 재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저자 중의 한 명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새로운 사실(fact)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촘스키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 오히려 외신이나 사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행간읽기 연습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촘스키의 펜에서 나오는 신랄함, 그것이 주는 원초적인 배설감을 얻기 위해서 읽는다면 또 몰라도. 레바논 내전에 대한 백서 형태로 구성된 <숙명의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사실 촘스키를 읽으면서 나는 별다른 충격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진보적, 실천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하워드 진의 글을 접하면서 세상을 오래 지켜본 老학자에게서 전해오는 강인한 시대의식에 감동 또 감동했었던 것과는 달리.
그런 면에서 보면 <누가 무엇으로...>는 오히려 괜찮았다. "드니 로베로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인터뷰하고 레미 알랭그레가 삽화를 그리고 강주헌이 옮기다"라고 책 표지에 써있는데, 삽화는 맘에 안 들었지만 프랑스 학자 2명의 인터뷰 방식은 꽤 괜찮았고 번역도 좋았다. 아무래도 인터뷰 글들이다보니 에세이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촘스키의 예의 그 <비꼬기>가 아닌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책 중에서>

○ 선생님은 '지식인'을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십니까?
마음가짐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식인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을 무엇이라 정의하십니까?
이 책은 지금 의자 위에 있습니다. 이 책은 의자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된 말은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때 우리 모두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 (투기성 금융자본이 판치는) 자본주의 모델을 대체할 경제모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본주의요?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민간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현재의 경제체제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연대 국가자본주의 Alliance State Capitalism' 혹은 '기업 중상주의 Corporate Mercantilis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애덤 스미스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었던 학자들이 요즘의 자본주의를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 세계화에 대해
세계화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점을 지향해서 정치적으로 고안된 현상입니다.
세계화 자체는 상당히 좋은 것입니다. 세계화 덕분에 당신과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격히 말하면 민주주의의 세계화 덕분입니다. 여하튼 외국 기업의 투자도 때로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계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화는 민간기업과 국가가 쌍둥이처럼 밀착해서 주도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 똑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 가장 덜 나쁜 체제로 찾아낸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체제가 아니라 가장 좋은 체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썩 괜찮은 문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문명을 창조하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서구문명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찬란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 마르크스주의가 요즘 세상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이론이라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무조건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드주의처럼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학설은 일종의 종교로 미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학설이 그 인물을 신격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한 개인을 신격화한다면, 그것은 조직화된 종교에 입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사회를 흥미롭게 분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밖에도 보편성을 지닌 많은 교훈적 분석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유효한 생각들은 기꺼이 수용해야겠지만, 필요하다면 부연설명을 하거나 수정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확하고 적용할 수 없는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 무정부주의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는 지배구조는 부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관계를 전복시킬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대중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지식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체제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이 있다고 합시다. 법치국가인 우리 사회에서 목숨까지야 잃지 않겠지만 적잖은 고통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중상모략과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합니다.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이론>이라는 말에 대해
솔직히 나는 '이론'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평범한 생각, 어찌 보면 상식에 불과한 생각에 이론이란 이름까지 붙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연과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이론이란 수식어를 붙일만한 사상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사고의 틀, 즉 상식에 대한 모델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 언론의 동시성 경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보가 곧바로 전달되어도 나쁠 것은 없지만 하루 늦게 전달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속도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효과에 100 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맡기게 만듭니다. 현재의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 존경하는 인물이나 위인이 있습니까?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있습니다. 러셀은 내가 지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대중적 인물로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러셀과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두 사람은 무척이나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핵무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우상이 된 반면에 러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줄 아십니까? 아인슈타인은 탄원서에 서명한 후에 연구실로 돌아가 물리학에 전념했지만 러셀은 탄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길거리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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