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딸기21 2003. 7. 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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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생 텍쥐페리 (지은이) | 유혜자 (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0-04-01



생텍쥐페리는 명상가이고 시인이다. 야간비행, 사막, 바람과 모래와 별들. 그리고 실종. 영화처럼, 소설처럼, 그림처럼 낭만적인 말들로 이뤄진 그의 생애. <어린 왕자>의 문구들은 언제 읽어도 가슴에 저며온다. 


네 개의 벽과 기둥이 지붕을 덩그러니 받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붕을 올리고, 벽돌을 쌓아올렸다고 모두 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공간에 대한 추억과 애착만이 그것을 진짜 집으로 만들어주며 그곳에 담긴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 곁에 있는 것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감정의 풍요로움을 제공해줄 수 있는 집이 진짜 집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속마다 고향과 같은 따스함, 샘물과 같은 신선함을 불어넣어 주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집인 것이다.


저 글을 보는 순간, 내가 은근히 꿈꾸어왔던 것은 바로 저런 집을 갖는 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추억과 애착이 있는 곳,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주는 곳. 생텍쥐페리의 글 중에서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말들을 몇마디 모아본다.

그래도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어떻게 생기는가?
조용히 이루어지는 진정한 기적이여! 본질적인 사건들은 얼마나 간단하고 명쾌한 것인지.
전쟁 전 투르뉘 지방의 솔 강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강물 위로 목조 베란다가 나 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우리가 있던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내 둘이 카누에 있던 짐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자 문득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순순히 위로 올라와 우리와 합석했다. 우리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들을 그렇게 식사에 초대했다. 아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 속에 파티를 벌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햇빛이 좋았다. 먼 수평선까지 이어진 건너편 강둑의 포플러 나무들은 부드러운 달콤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분위기는 점점 유쾌해졌고, 아무도 그 이유를 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화창한 햇살,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꺼이 와준 사내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라도 벌어진 듯 행복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준 식당의 아가씨. 
우리는 이를테면 완벽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모두 다 충족되었다. 더 이상 털어놓을 비밀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순수하고, 솔직하고, 분명하고, 너그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매혹시킨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진실'과 '언어'의 문제, 죽음과 헤어짐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되새겨보고 기억하면서 무언가를 향해간다. 말은 다만 표현하는 것 뿐이라고,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눈과 귀와 마음을 모두 열어두어야 한다고. "관습과 인습을 넘어 삶의 비극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비극적인 존재감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가 전하는 '작은 행복'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걸까.

캄캄한 어둠 속을 비행하며 우리는 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빛, 어둠을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들. 몇몇은 외로운 집에서 나오는 빛이리라.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등잔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농부는 자기의 소망을 누군가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기의 소망이 빛을 품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등잔이 자기 집의 초라한 식탁만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지만 절망하듯 비틀거리며 타오르는 그 불빛의 소리를 누군가는 먼 곳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밑의 글은 델마님의 홈에 올렸던 것이다. 책에 실린 많은 문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내가 접해본 어떤 사랑이야기보다도 정겹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준비에브, 말해 줘.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을까?"
너는 책을 읽다 말고 입을 꼭 다문 채 곰곰이 깊은 생각에 빠졌어. 넌 고사리와 귀뚜라미와 벌을 생각하며 적당히 대답할 말을 찾았던 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
"음, 벌들도 사랑 때문에 죽거든."
아, 우리는 그제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준비에브, 애인이 뭐야?"
우리는 네 얼굴이 빨개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어. 우리가 그 질문을 하자마자 넌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물에 비치는 달빛 같은 사람이라야 너의 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준비에브, 애인 있어?"
이번에는 네 얼굴이 정말 빨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넌 깔깔대고 웃으며 고개만 내저었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한 계절은 꽃을 피우고, 한 계절은 열매를 맺고, 다시 어떤 계절은 사랑을 가져다주었지.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별로 오래 살지 않은 생텍쥐페리의 글이지만, 적당히 나이든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한 때를 생각하는 듯한 그런 느낌.

"네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한 계절은 꽃을 피우고, 한 계절은 열매를 맺고, 다시 어떤 계절은 사랑을 가져다주었지.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우습게도 나는 "벌들도 사랑 때문에 죽거든"이라는 준비에브의 말을, '별들도'라고 생각했다. 별들이 사랑 때문에 죽는다-- 엄청난 에너지로 세상에 태어나 빛을 발하다가 사라져가는 별들, 별들의 죽음이 사랑 때문이라면. 나는 상상속의 그런 이미지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냥 저 문장을 별들의 이야기로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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