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건트 유니버스
The Elegant Universe: Superstrings, Hidden Dimensions and the Quest for the Ultimate Theory
브라이언 그린 (지은이) | 박병철 (옮긴이) | 승산 | 2002-03-11
과학책들 중에 아끼는 것들이 많았는데, 일본에 오면서 그 중 이 책 한권만 들고왔다. 역시나 학문의 왕은 물리학이다! 物理라니, 이보다 더 심오한 것이 어디 있으리요.
공부삼아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문턱'을 깨닫게 된다. 한가지 주제나 상황에 대해 쓰여진 책을 3권 읽으면 감이 잡히고, 10권 정도 읽으면 좀 알겠다 싶은 걸 보니 '10권'이 내게는 문턱인 셈이다. 그런데 이젠 문턱을 넘었을 때가 되었는데도 도통 내 머리로 '상상' 내지는 '재연'을 해내기 힘든 종목이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과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내가 감히 깜이 오네 안 오네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는 자못 심각하다.
뭐, 자괴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세상엔 여러가지 사람이 있고 여러가지 관심사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물리학자'라는 직업도 따로 존재하고, 더불어 물리학 책을 쓰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걸 읽는 독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나는, 물리학자들이 우주만물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아낸 것이 대체 뭔지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일반인을 위한 과학'류의 책들을 읽어주는 독자다.
나같은 독자에게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는 어떤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다 주느냐-- 과학의 성과가 갖고온 사회적 영향력, 이런 것들은 내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이중 슬릿의 그림 따위는 너무나 많이 봤지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고!),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호환이 되는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며(아인슈타인이 불세출의 천재이자 시대의 영웅이라는 것은 백번 인정한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왔다갔다 하고 공간이 휘어지고 하는 것은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다. 그러니, 10차원 11차원에 공간을 휘어감고 찢었다붙이는 초끈이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물리학 관련 책들을 읽다 보면 한번씩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수퍼스트링. 내겐 돌부리나 목에 걸린 가시같은 존재였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하필이면! 저 초끈이론에 대한 책이다.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갈팡질팡하는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까만별 10개를 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초끈이론을 완전히 이해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읽었던 통일장 이론을 다룬 교양과학서 중에서는 가히 최고였다.
책은 뉴턴 물리학을 뒤집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적어도 내가 보아왔던 책들 중에선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선생보다도 멋지게, 기가막히게 웃기는(코믹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설정이 재미있다) 비유를 들어 상대성원리를 설명해낸다. 예시한 사례와 그림을 보다 보면 어쩐지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책 전반부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탄생과정, 기본개념들을 설명하는데, 본론 못잖게 재미있었다.
이 책은 이론물리학의 첨단 조류를 다루고 있다. 별 관측하고 플라스크 들여다보는 과학자들의 얘기가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적절한 수학적 방법을 찾는 이론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과정을 포함해서, 초끈이론의 탄생과 그동안의 발전을 생생하게 소개해준다. 대체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걸 알게 됐을까,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과학 문외한들이 궁금해하기 마련인, 물리학자들의 연구 방식(생각을 전개해가는 방식)에 대해 알려준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이다. 덕택에 구체적인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끈이론 학자들의 논리를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따라갈 수가 있다.
더불어 막강하고 훌륭한 번역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읽는 재미 중에 무시 못할 부분이, 괄호 안에 들어있는 옮긴이의 설명을 읽는 거였다. 끈이론을 공부할 당시의 경험을 예시해가면서, 위트를 섞어가며 저자의 말을 풀이해 들려주는데 이게 또 쏠쏠히 재밌었다.
기본적으로 난해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읽는동안 내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 이런 책이 좀더 나와준다면, 어쩌면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뭐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과학적 상상력이란 결국 과학 그 자체의 실증적 특성을 뛰어넘는 것에서 오는게 아닐가 하는. 즉 과학 자체는 실증적 학문이겠지만, 과학적 상상력은 실증성을 뛰어넘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가 하는... <엑스파일> 초반에 보면 스컬리는 '그것은 증명불가능해요'라고 늘 말하잖아. 하지만 이 시리즈는,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 진정으로 과학적인 태도라는 것을 이야기하잖아. 그런 점에서 세계의 원리를 추상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결국 과학적 창의력과 철학적 창의력은 한 곳에서 만나는 것 같아. 난 수학을 진저리치게 싫어했는데, 대학원에서 와서 철학책을 읽다보니, 내가 수학을 싫어한 게 아니라 산수를 싫어했다는 걸 느꼈거든. 같은 이야기라도 글로 풀어놓으니 이해가 가더라는 거지. -_- 아래에서 헤겔 이야기 했지만, 헤겔이나 칸트는 한편으로는 뛰어난 수학자이기도 했단 말이지. 그러나 산수를 잘해서는 그런건 아니었단 말이지.(물론 산수도 잘했으리라 믿지만. 이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thinking machine이야 진정..)
엘리건트 유니버스 재밌죠ㅠㅠ
음.. 제 생각에 문턱 중 하나는 수학인 거 같아요. 아무리 멋진 비유라도 결국 비유일 뿐이자나요. 대충이라도 핵심적인 수학 공식은 알아야 문턱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역시 교양과학서 좋아하는 저에게 떠오르네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가 완역돼 나왔던데 길게 잡고 한 번 읽어볼까요? 그런 거 읽으면 머리도 좋아지지 않을까.. 물론 십 몇차원의 이야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수학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요. 그리고 이중슬릿 실험(이거 정말 중요하고 재밌던데)에 대해선 (읽으셨겠지만) 역시 <파인만의 일반인을 위한 QED강의>의 설명이 전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제인님 리플을 보니 떠오르는 생각인데, 수학이 참 신기하긴 해요. 근대 물리학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피사 사탑의 '실험'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식의 수학적 방법론을 중시한 피렌체 학풍을 갈릴레오가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뉴튼도 그렇고 아인쉬타인도 그렇고 먼저 수학적(추상적) 상상이 있은 이후에 증명이 이뤄졌으니, 실증주의는 적어도 물리학에서 맞지 않는 맡지 않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파인만의 일반인을 위한 QED강의 재밌니? 그거 읽어볼까 하고 생각중인데.
초끈이론..이름도 생소하고 무지 어려워 보이지만, 함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는 책이 포스트 수많큼이 될거야..ㅋㅋ 그래도 실천한것 하나 있다. 조너선 스펜서의 <칸의 제국>도서관에서 빌려서 약 1시간 동안 속독으로 목차 및 주요 문장만 훓어봤다. 꼼꼼히 다시 봐야지 하면서 그냥 가지고 있음) 어쨋건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처럼 과학이 철학적 함축을 띠게되면 철학사 속으로 합류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패러다임을 전환할 만함 과학이론은 '지성'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는 필독서일 듯. 난..왜이렇게 읽어야 할게 많은건가 ㅜ.ㅜ (어쨋거나 라이버러리는 맹해지는 머리에 전기쇼크를 계속 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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