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도청하면 들킨다

딸기21 2011. 7. 12. 19:07
728x90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거느린 영국 신문 뉴스오브더월드의 휴대전화 도청 사건 파장이 일파만파로군요.
발단은 머독이 소유한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뉴스오브더월드’가 휴대전화 음성메시지들을 불법 도청한 사실이 폭로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 신문사에 대해서는 몇년 전부터 도청 등 취재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경찰이 한 차례 수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몇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취재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셈이네요.
머독이 문제의 신문을 폐간시키면서 ‘꼬리자르기’에 나섰지만 영국 정부는 머독의 미디어 그룹 전체에 대해 칼날을 뽑을 분위기입니다.

사태의 도화선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영국군 병사 유족들, 그리고 납치된 뒤 피살된 한 13세 소녀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도청했다는 점입니다(말이 좋아 도청이지... 딸이 납치돼 살해당했는데 그 전화 내용을 '취재'랍시고 기자가 도청했다는 걸 알면 '이중의 피해'를 당하게 된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하지만 이 뿐이 아니라 고위층, 왕실까지 도청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BBC방송 등은 11일 뉴스오브더월드가 일부 경찰들에게 돈을 주고 고위층 인사들의 정보를 빼냈으며, 휴대전화 음성메시지를 도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이 경찰에게서 빼돌린 정보 중에는 국가기밀로 분류되는 왕실 인사들의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와 여왕 부부의 일정 등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국 경찰은 뉴스오브더월드의 왕실담당 기자가 왕실 경호경찰에게 돈을 주고 여왕과 고위층의 정보를 빼냈다고 보도했습니다.
찰스 왕세자 부부의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이미 경찰이 이와 관련된 증거를 확보하고 왕실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도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벤 예란 에릭손 전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감독(아, 한때 축빠였던 시절 노상 듣던 이름... 어쩐지 정겨운 이 느낌은 뭥미;;)은 스웨덴 일간지와의 회견에서 “뉴스오브더월드는 항상 내가 어디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면서 자신도 도청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Former Prime Minister Gordon Brown. Photo credit: Downing Street 

타블로이드 신문 인 뉴스오브더월드 뿐 아니라, 선데이타임스도 불법 취재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데이타임스가 재작년 물러난 노동당 소속 고든 브라운 전총리의 정보를 빼냈다는 겁니다.
선데이타임스는 일간지 더타임스의 일요판 성격의 자매지입니다. 더타임스는 무려 1785년에 설립된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이(었)죠. 더타임스와 선데이타임스는 한때 영국의 유력 신문이었지만 1981년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 산하에 들어간 뒤부터는 묵직한 기사는 사라지고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뉴스오브더월드는 소규모 타블로이드신문사이지만 이제 선데이타임스까지 나왔으니, 
뉴스코프 전체가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뉴스코프의 상업주의 때문에 저널리즘 본래의 역할과 사명감은 사라지고 불법 취재가 조직 곳곳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번 도청 문제는 뉴스코퍼레이션 고위층의 지시 혹은 묵인에서 비롯된 제도적,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머독 측이 정치공작을 하려고 불법적인 수단으로 브라운 전총리에 대한 정보들을 빼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선데이타임스는 브라운이 재무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그에 관한 재산정보, 금융정보를 빼냈으며 장애인인 아들의 의료기록까지 불법적으로 입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브라운의 아들은 서구인들에게 흔한 '낭포섬 섬유증'이라는 유전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도한 것은 뉴스코프 계열 신문인 더선(The Sun)이었습니다. 보도가 나온 것은 2006년, 당시 브라운의 아들의 나이는 4살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질병 문제를 '불법적으로' 빼내 '악질적으로' 실은 케이스가 되겠군요. 더군다나 브라운은 어린 딸을 여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2006년 브라운 아들의 유전질환을 보도한 더선 웹 화면.


그 시절 더선의 편집장은 뉴스오브더월드의 편집장을 지낸 레베카 브룩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은 뉴스코프의 신문 부문인 뉴스인터내셔널(NI)의 최고경영자로 올라갔고요. 머독의 측근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머독은 브룩스를 싸고 돌고 있고요. 브룩스는 브라운 아들의 병을 보도하면서 브라운 측에 "의료기록을 입수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브라운 부인인 새라는 11일 트위터에 “우리 가족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일... 사실이라면 매우 슬픈일”이라는 멘션을 올렸습니다).


 
머독은 브라운 전총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브라운이 총리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애썼고, 토니 블레어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뒤에도 그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낙마시키려 했죠. 브라운은 총리가 되기 전 10년간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유로존 가입 절대 불가' 등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머독 측과 낯 붉히고 싸우다시피 했고요.

Brown tells Murdoch: No deal over euro : 1998년 BBC의 기사입니다. 
Gordon Brown attacks Murdoch paywalls for online content : 요렇게 싸운 적도 있었고... 

(그런가 하면 블레어는 머독 편을 들어서, 브라운에게 머독과의 싸움을 중단하고 도청 사건 덮어두라 일렀다네요. 점입가경입니다 -_- )

브라운에 대한 사적인 정보를 불법을 빼내간 것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였다면 정말 큰 문제겠죠. 머독 측이 브라운에 대한 비난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룹 산하 매체들을 동원했다면, 민주국가임을 자부하는 영국에선 그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 될 텐데요.
브라운 전 총리는 11일 “충격적”이라는 논평을 냈습니다. 하지만 실은 브라운 해킹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영국 경찰이 2005년 당시 장관이던 브라운의 해킹 피해 여부를 수사하기도 했었다네요. 이번에 이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 드러난 일이지만, 그 때 브라운 해킹피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6명도 머독 계열 언론사 측에 도청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수록 태산... 


Rupert Murdoch
Rupert Murdoch. http://www.thefirstpost.co.uk 


그동안 부실수사를 해온 경찰로도 불똥이 튀고 있습니다.
뉴스오브더월드가 해킹한 유명인사는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 휴 그랜트와 기네스 팰트로, 가수 조지 마이클 등 스타들을 비롯해 주요 정치인 등이 망라돼 있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비밀에 부쳐졌을 수가 없지요. 2005년 도청 혐의가 불거졌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수사를 흐지부지했습니다. 2007년 뉴스오브더월드의 왕실 담당기자가 불법 취재 문제로 수감되기까지 했는데 그 때도 수사가 축소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2009년 다시 불법취재 문제가 제기됐는데, 이 때도 경찰은 수사를 재개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의회는 런던 경찰청을 상대로 도청 취재 수사를 재개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할 계획이라고 BBC방송이 보도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덮기로 한 간부들을 의회에 불러다가 배경을 물을 방침입니다.
뉴스오브더월드 기자가 매수된 경찰에 돈을 주기 위해 회사에 보낸 비용처리 서류 이메일까지 발각됐다니, 경찰 내부적으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상황일테고... 폴 스티븐슨 런던경찰청장이 공개 사과를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영국 정부는 머독을 상대로 칼을 빼들었습니다. 
머독은 영국 위성방송 스카이(BSkyB) 인수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이 인수 건에 대해 반독점 여부를 따지겠다며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제레미 헌트 문화장관은 “머독의 스카이 인수 시도를 전면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뉴스코프는 이미 스카이 지분 39%를 갖고 있는데, 아예 100% 확보해 새로운 매체로 출범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반독점 여부 조사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도청 사건에 대한 비난 여론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연립정권의 한 축인 자민당의 닉 클레그 부총리는 도청 피해자인 납치·피살 소녀 유가족과 만난 뒤 뉴스코퍼레이션 측에 스카이 인수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머독 측도 일단 위성방송 인수 절차를 보류하면서 여론을 지켜보려는 것 같다. 도청사건 여파가 워낙 커서 영국에서는 광고주들마저 머독 계열 언론사 광고를 중단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번 사건으로 ‘미디어 황제’라 불리던 머독은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습니다.

BBC방송이 ‘도청사건 핵심 플레이어’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제일 첫번째에 머독을 올려놨습니다. 그 옆이 레베카 브룩스입니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머독의 제국은 쇠락기에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많았습니다. 지난달 말 뉴스코프는 페이스북과 경쟁시키려고 인수했던 SNS 회사인 마이스페이스를 매각한다고 발표했지요. SNS 부문에 손을 뎄다가 호된 맛을 보고 결국 실패를 인정했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었습니다. 뉴스코프가 전반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져 가고 있는데, 머독은 언제까지나 미디어 황제로 군림하려고만 한다는 비아냥이 많습니다.

뉴스오브더월드는 영국 신문이지만 머독의 뉴스코프는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입니다. 뉴스코프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미국에서도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미 당국이 뉴스코프의 비자금 조성 여부를 조사할지 모른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이래저래 머독이 궁지에 몰린 셈이네요.


(쫌 전에 CBS 시사자키에서 이 소식 소개해드렸는데... 진행자이신 정관용 선생님의 멘트. "도청을 하면 결국 들통이 나죠." 이렇게 못을 박으시네요. ㅎㅎ 이 멘트가 어쩜 이렇게 와닿는지. 국내 어느 방송사도 요즘 도청 때문에 난리죠? '김비서'라 불리는 그 방송사는 자기네들 수신료 많이 받아내려고 도청을 한 의혹을 받고 있으니, 머독네 신문사보다도 한참 아랫급이네요. 쩝.)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