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전쟁의 풍경 속에, 역사의 잔인한 순환 속에

딸기21 2005. 9. 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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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풍경 Paisajes de Guerra (1996) 

후안 고이티솔로 (지은이) | 고인경 (옮긴이) | 실천문학사 | 2004-11-04




“알제리라고 하는 이 광활한 묘지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닫혀 있던 무덤에서 열어젖혀진 무덤으로 걸어가 먼저 사상과 꿈과 말을 묻고, 그 다음 가진 것 없이 살다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죽은 남자, 여자, 어린이들의 처형당한 시체를 묻고 있다.”


“그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들 순교를 한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이 있고, 동물처럼 이 게토에 영원히 갇혀 있습니다. 조금씩 죽어가는 생명을 느끼며 마음은 폭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 언젠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살 테러 공격에 아무 무기나 들고 뛰어들 겁니다. 죽는 것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참혹하고 슬픈 증언들. 책은 스페인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90년대 중반 사라예보, 팔레스타인, 알제리, 체첸을 돌며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한다. 다큐멘터리라고 보기엔 문학적이고, 기행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슬프고, 국제정치 개설서라고 보기엔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말 그대로 ‘전쟁의 풍경’이다.


“무엇보다 가장 황량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옛 동양연구재단’ 즉 그 유명한 사라예보 도서관이었다. 1992년 8월 26일 일요일, 세르비아 극우민족주의자들은 도서관에 화염 로켓을 홍수처럼 퍼부었고, 풍부한 문화유산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런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문화에 가해진 가장 야만적인 폭력행위’이다...
이 범죄는 말 그대로 ‘기억살해’라고 밖에 단정할 수 없다. 모든 이슬람의 흔적을 위대한 세르비아 영토에서 뿌리 뽑아야 했기 때문에, 보스니아 내 이슬람 민족의 집단기억, 즉 도서관을 복수에 찬 정화의 화염으로 우선적으로 없애야 했던 것이다.


사라예보와 보스니아의 이야기는, 인간의 잔혹함을 텍스트들 중에서 가장 접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조 사코의 <안전지대 고라즈데>에 이어, 고이티솔로는 이 책에서 또다시 내 마음을 할퀸다. 어떤 종류의 잔인함은 상상력이라는 걸 통해서 마음에 파고들곤 한다. 숨겨진 가학성을 은근히 자극하면서, 잔혹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몇 번이고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라예보에서 여러 순례자(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들이 전해주는 잔혹함은, 내면의 가학성을 은밀히 자극하는 수준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야만적이다. 그 야만 속에서 고이티솔로는 인간의 본성을 묻는다.


“전쟁, 혹은 평상시에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를 겪는 사람들의 도덕적 성향과 비밀스런 정체성이 현상 필름처럼 드러나게 된다. 겁쟁이인지 용감한지, 올곧은지 양심불량인지, 희생적인지 이기적인지 말이다. 사라예보는 일상의 작은 행위나 행동들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작은 소우주다.”


저자는 이렇게 사라예보와 가자, 알제, 그로즈니를 돌면서 전쟁의 드러난 풍경과 드러나지 않은 풍경을 묘사한다. 가장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아마 저자의 의도도 그것이겠지만, ‘잔잔한 풍경’이다.


“비겁한 무력감에서 도망치며,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다니며 오후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이었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놀거나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저격수들이 총을 쏘지 않는 사라예보는 마치 꿈결처럼 평화에 젖어든 듯했다. 나는 짧고도 긴 체류 동안 쌓은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욕심껏 급히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의식이 끝나면 신자들은 다시 원형으로 쪼그려 앉아 각자, 그리고 조금 후엔 합창으로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암송한다. 내가 들어온지 약 2시간 정도가 흘렀지만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동안 하늘이 개어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체첸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감히 말하지만 그때 나는 대양의 고요함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 순간은, 감정이 고양되어서도 아니고, 덧없이 사라지는 듯한 허망함 때문도 아닌, 순간의 아름다움과 완벽함 때문이었다. 밤의 정적 속에 울려퍼지던 성가가 그동안 내게 쌓인 야만을 단 몇 초 만에 보상해주었던 것일까?

새가 노래를 그치자 다시 세상의 질서 안으로 돌아왔다. 바로 전쟁의 풍경 속에, 역사의 때묻은 잔인한 순환 속에 사는 것이다.


저자는 별로 친절하지가 못하다. 다시 말하면 책에는 보스니아 사태와 알제리 내전, 팔레스타인 분쟁과 체첸 사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다. 분쟁의 내막을 잘 아는 저자는 분쟁의 ‘현장’에서 눈에 보인 것들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철철 느껴지게 묘사할 뿐이다. (책은 맘에 들지만, 이 책이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됐다는 것에는, 그런 연유로 해서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족을 달자면, 번역자는 후기에서 스스로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고 밝혔는데, 정말로 국제문제에 무지했던 것 같다. 고유명사나 이슬람 용어 표기가 엉망이다. 우마이야는 ‘오메야’로, 케피야는 ‘카피에’로, 무자히딘은 ‘순교자’로 옮겨놨다. 이츠하크 라빈을 ‘이삭 라빈’이라고 쓴 것도 눈에 거슬린다. 


그러면서 몇몇 단어들에는 친절하게 괄호를 치고 스페인어를 적었다. 아랍어 ‘파트와’를 ‘페투아’라 적으면서 스페인어 철자를 써놓는 것은 넌센스다. 국내 신문에도 종종 등장하는 일본인 이름이라면 일본식으로 써놓아야 할텐데 영어식으로 성을 뒤에 넣었고, 동유럽 이름들도 곳곳에서 틀리게 적은 혐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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