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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거의 모든' 것

딸기21 2011. 10. 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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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컴퓨터 웹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오늘은 아예 하얀 모니터에 잡스의 사진과 이름, 잡스의 생몰연도인 1955-2011이라는 숫자만 쓰여있다. 추모 화면도 너무나 잡스답고 애플스러운 디자인이다. IT업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큰 별이 진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CNN의 유명앵커 앤더슨 쿠퍼는 "슬픈 소식입니다"라며 트윗으로 잡스의 사망을 알렸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있는 잡스 집앞과 팔로알토의 애플 회사 앞에는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스티브 잡스(Steven Paul "Steve" Jobs)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 출신 유학생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부모는 정식 결혼하지 않은 처지였고, 아이를 양육할 형편이 되지 않아 잡스는 폴 잡스·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압둘파타흐 존 잔달리는 홈스대학을 졸업하고 뒤에 그 대학 교수가 됐고, 생물학적 어머니 조앤 심슨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으나 이혼했다. (잡스의 생물학적 누이 모나 심슨은 지금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잡스는 양부모 가정이 있는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 팔로 알토의 휼렛패커드 사에서 열리는 강연을 종종 듣곤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잡스는 여름방학이면 파트타임으로 휼렛패커드 등 컴퓨터 회사에서 일했고, 훗날 애플컴퓨터의 공동창업자가 된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도 이 시절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1971년. 16세였던 잡스에게 둘 모두의 친구인 빌 페르난데스가 21세의 워즈니악을 소개해줬고, 그 후 그들의 오랜 우정이 이어진다.

일은 덜해도 돈은 워즈니악과 똑같이

1972년 쿠퍼티노의 홈스테드고등학교를 졸업한 잡스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컬리지로 진학하지만 한 학기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리드 대학에서 회계학 강좌를 듣거나 서예수업 청강은 계속했지만 돈이 없어 콜라병 수집을 하는가 하면 친구들 집에서 바닥잠을 자거나 힌두사원인 헤어 크리슈나 템플에서 끼니를 얻어먹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잡스는 훗날 “그 때 대학에서 한 학기 만에 나오지 않았다면 맥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서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가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워즈니악과 함께 홈브루 컴퓨터클럽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비디오게임 제작사인 아타리(Atari)에 기술자로 들어갔고, 거기서 번 돈을 모아 인도로 ‘영적인 여행’을 떠났다. 잡스에게 인도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리드 대학시절의 친구이자 훗날 애플의 ‘첫 직원’이 된 님 카롤리 바바(Neem Karoli Baba)는 인도 출신이었다. 잡스는 인도에 돌아가 카인치 아슈람(생활공동체)에서 생활하던 님 카롤리 바바를 찾아갔고, 그 여행 뒤에는 불교신자가 되어 돌아왔다. 머리를 깎고 인도 전통옷을 입고 다녔다. 잡스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어가지 것들을 경험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
 
잡스는 다시 아타리로 돌아와 게임 ‘브레이크아웃’용 회로판 만드는 일을 했다. 아타리 설립자 놀란 버슈넬에 따르면 아타리 측은 회로판의 칩 하나를 줄일 때마다 100달러씩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잡스는 회로판을 최소화하는 디자인 작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워즈니악이 실적을 올려 보너스를 받으면 그 절반을 얻어썼다. 

한때 워즈니악은 회로판의 칩 수를 50개나 줄였지만 회사측으로부터 5000달러 대신 700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뒤 350달러를 제 몫으로 가져갔다. 



애플에서 밀려나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들다

1976년 잡스와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Ronald Wayne)은 인텔 마케팅매니저와 엔지니어로 일하다 퇴직한 A.C. 마쿨라 주니어("Mike" Markkula Jr.)로부터 돈을 지원받아 애플을 차렸다. 이전부터 워즈니악은 해커로 활동하고 있었다. 잡스는 경영·관리를 했고 워즈니악이 컴퓨터를 조립해 판매했다. 그러나 애플이라는 회사가 커지자 전문적으로 사업확장을 맡아 할 경험 있는 경영자가 필요해졌다.

1978년 애플은 내셔널 세미컨덕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마이크 스코트(Mike Scott)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하지만 그 후 몇년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1983년 잡스는 펩시콜라에서 일하던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부른다. 

스컬리에게 “당신의 남은 인생 동안 계속 설탕물이나 팔고 싶습니까, 아니면 내 쪽으로 와서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했다는 잡스의 말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 이듬해인 1984년 애플은 수퍼볼(미국프로풋볼 챔피언 결정전) 경기 때 프라임타임 시간에 맞춰 ‘1984’라는 제목의 TV광고를 내보냈다. 그 해 1월 24일 애플의 연례 주주총회에서 잡스는 매틴토시 컴퓨터를 들고 나와 열정적인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당시 애플에서 일했던 컴퓨터과학자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는 그 순간 회의장엔 “난리가 났다(pandemonium)고 회고했다. 매킨토시, 애칭 ‘맥’은 그래픽 유저인터페이스를 갖춘 소형컴퓨터로서는 시장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이 됐다. 맥 개발을 시작한 것은 애플의 제프 래스킨(Jef Raskin)이었지만 총괄 작업은 잡스가 맡아 했다.
 
초창기 애플에서 잡스가 보여준 능력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카리스마 넘치고 열정적인 관리자였다는 시각도 있지만, 실수도 잦고 성질 급한 매니저였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실적이 하락하자 잡스와 스컬리 사이엔 곧 균열이 생겼고, 1985년 5월 스컬리는 잡스에게서 매킨토시 사업부문 총책임자 역할을 빼앗아버렸다. 나중에 잡스는 애플에서 그 때 해고된 것이 결과적으론 좋았다고 말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해고를 통해) 나는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들어서게 됐다.”

“앞으로는 인터퍼스널 시대”

잡스는 넥스트(NeXT) 컴퓨터라는 또 다른 컴퓨터 회사를 차렸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넥스트도 기술적으로 앞서 나갔다. 그래서 매니아들을 거느렸지만 가격이 높아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넥스트의 목적지향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시스템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넥스트의 제품들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새 기술들을 도입한 탓에 일반 사용자들보다는 과학·학술분야의 사용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이 회사에서 내놓은 넥스트큐브(NeXTcube)를 가리켜 잡스는 “퍼스널컴퓨터(PC) 이후의 인터퍼스널 컴퓨터(interpersonal computer)”라 불렀다 한다. PC 이후의 차세대 컴퓨터는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협업을 쉽게 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봤다는 얘기다.

전자우편이 보편화되던 시기였다. 잡스는 넥스트의 이메일시스템인 넥스트메일(NeXTMail)이야말로 ‘인터퍼스널’ 철학의 실례라 보고 몹시 애착을 가졌다. 이 메일은 그래픽과 오디오 기능이 첨부된 당시로선 첨단에 가까운 시스템이었다. 잡스는 그 기능을 넥스트 제품에 반드시 넣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고집이 하드웨어 사업부문 쪽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어버렸다.


'D5: All Things Digital' conference in Silicon Valley in 2007



1986년 잡스는 픽사(Pixar)의 전신인 그래픽스그룹(The Graphics Group)을 루카스필름 쪽으로부터 1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캘리포니아주 산 라파엘에 있던 그래픽스그룹은 회사를 같은 주의 에머리빌로 옮겼다. 

잡스가 이 회사를 사들인 건 하이엔드 그래픽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픽사 이미지컴퓨터를 파는 사업은 몇년이 지나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 회사는 디즈니와 계약해 컴퓨터 애니메이션 필름을 만드는 쪽으로 선회했다.
 
1995년 디즈니와의 제휴아래 선보인 첫 작품 <토이스토리>는 픽사 스튜디오에 일약 명성을 안겨줬다. 그후 15년 동안 픽사는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지휘 아래 <벅스라이프>(1998), <토이스토리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 <인크레더블>(2004), <카> (2006), <라따뚜이>(2007), <월E>(2008), <업(Up)>(2009), <토이스토리3>(2010) 등등의 히트작을 줄줄이 선보였다. 2003~2004년 픽사와 디즈니 사이의 불화로 계약이 끝난 뒤에도 픽사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애플, “왕의 귀환”

잡스의 애니메이션 사업이 잘 나가는 사이, 애플은 그렇게 잘 나가지는 못했다. 1996년 애플은 잡스의 넥스트를 4억2900만달러에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잡스는 애플로 돌아왔다. CEO 길 아멜리오가 그 해 7월 사실상 쫓겨났고, 잡스가 실질적인 CEO가 됐다. 공식적으로 ‘임시CEO’에 취임한 것은 1997년 9월이다. 

1998년 3월 애플의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잡스는 뉴튼 프로젝트, 사이버독, 오픈독 등의 일부 사업을 폐기처분했다.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그 몇달 동안 애플 직원들은 잡스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한다. 잡스가 ‘잘라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잡스는 한줌의 희생양만으로 회사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2000년 10월 Salon.com 보도)

잡스는 넥스트가 갖고 있던 넥스트스텝(NeXTSTEP) 등의 기술을 애플 제품에 집어넣어 맥 OS X.를 진화시켰다. iMac을 비롯한 신제품들을 내놓으면서 애플의 매출은 크게 늘었다. 특히 소비자들에게 소구력을 가졌던 것은 애플의 디자인과 브랜딩이었다. 2000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잡스는 ‘임시’ 타이틀을 떼고 애플의 정식 CEO가 됐다. 잡스식으로 표현하면 ‘iCEO’였다.
 
애플은 전성기를 맞았다. 음악플레이어 아이팟(iPod)과 그 시장 격인 아이튠즈(iTunes Store)를 통해 애플은 디지털 시대의 총아로 거듭났다. 2007년 애플은 모바일폰 시장에 진입했다. 멀티터치 디스플레이 기능을 가진 아이폰(iPhone)은 독자적인 모바일 브라우저를 가진 혁명적인 제품이었다. 

혁신을 가속화하기 위해 잡스는 모든 직원들에게 “진정한 예술가정신(real artists ship)”을 가지라고 요구했다. 잡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매력적인 디자인, 혁신, 그리고 필요한 제품을 ‘제 때에’ 시장에 내놓는 것이었다.

델 컴퓨터 CEO 마이클 델이 1997년 10월 가트너 심포지엄에서 당시만 해도 곤경에 빠져 있던 애플을 인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 때 델은 “나라면 문을 닫아버리고 돈은 주주들에게 돌려주겠다”라고 말했다. 2006년 잡스는 애플의 전 직원에게 “애플의 시가총액이 델을 추월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잡스의 작품들이 모두 성공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애플II 후속작이으로 1981년 내놓은 애플 III와 2000년 출시된 소형 데스크톱 큐브 등은 디자인은 훌륭했는지 몰라도, 상업적으론 실패작이었다. 
 
2011년 8월 잡스는 애플 CEO에서 공식 사임했지만 회사 이사회장 자리는 계속 유지했다. 잡스 사임 뒤 애플 주가는 삽시간에 5% 내려갔다. ‘잡스의 애플’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애플에서 잡스가 갖는 의미는 잡스의 건강에 따라 근 몇년 동안 주가가 널뛰기를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잡스는 애플 CEO로 재직하는 동안 1년에 단 1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애플 주식 542만주와 디즈니에 픽사를 넘기고 받은 주식 1억3800만주를 갖고 있었다. 포브스는 2010년 현재 잡스의 재산이 8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 부자 순위 42위에 해당하는 액수다. 

잡스가 단독 혹은 공동으로 소지한 미국 내 특허권만 해도 338건에 이른다. 종류는 컴퓨터 기술과 포터블 기기에서부터 유저 인터페이스, 키보드, 전원어댑터, 컴퓨터 케이스까지 다양하다. 

카리스마와 독특한 개성

잡스는 공격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경제전문지 포춘은 그를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인 에고매니아(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사람) 중 한 명”이라 꼽기도 했다. 

잡스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전기 중 하나인 마이크 모리츠(Mike Moritz)의 <작은 왕국(The Little Kingdom)>에도 잡스의 그런 성격이 묘사돼 있다. (잡스에 대한 책들은 앨런 도이츠만(Alan Deutschman)이 쓴 <잡스의 두번째 귀환(The Second Coming of Steve Jobs)>, 제프리 영과 윌리엄 사이먼(Jeffrey S. Young & William L. Simon)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iCon: Steve Jobs)> 등 여러 권이 있다. 그 중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잡스 스스로가 거부해 2005년 아이튠즈 전자북 코너에서 없애버리기도 했다.) 

1993년에는 포춘이 “미국에서 가장 터프한 보스” 명단에 넥스트의 잡스를 올려놓기도 했다. 잡스의 친구이자 매킨토시를 함께 만들었던 제프 래스킨은 “프랑스 왕이었다면 훌륭한 왕이 됐을 사람”이라 평한 적 있다. 
 
그런 성마른 잡스를 정보산업의 최전선에 선 혁신가로 만들어준 것은 트렌드를 읽고 내다보는 능력이었다. 특히 혁신과 스타일이 잡스를 특징짓는 두 가지였다. 

잡스는 2007년 1월 열린 맥월드 컨퍼런스와 맥월드 엑스포에서 유명한 연설을 하면서 아이스하키의 전설 웨인 그레츠키를 인용했다. “내가 좋아하는 웨인 그레츠키가 오래전에 한 말이 있다. ‘나는 퍽(puck)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아니라, 퍽이 가야할 곳으로 이동한다.’ 애플도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잡스는 뛰어난 화술과 상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숭배하는 이들도 많았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애플이 환경친화적이지 못하고 리사이클링에 소홀해 전자쓰레기를 많이 내놓는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러자 2005년 잡스는 전자기기 ‘되받기(테이크백)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미흡하다는 평이 많았다. 이듬해 잡스는 새 맥을 사는 소비자에게서 헌 맥을 돌려받는 것으로 리사이클링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하지만 잡스와 애플의 ‘사회공헌’에 대한 평가는 각박하다. 2008년 블룸버그가 실수로 잡스의 부고 기사를 낸 바 있다. 그 뒤 비즈니스위크는 잡스를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서 “잡스가 사망한다면 박애주의자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썼다. 잡스는 1997년 애플을 다시 장악한 뒤 모든 사회공헌·기부 프로그램을 싹 없애버리기도 했다.

존 바에즈와의 염문설, 번호판 없는 자동차

잡스는 로린 파월과 1991년 3월 결혼했다. 결혼식은 선 불교 양식을 따랐고, 승려가 주례를 했다. 잡스 커플은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다. 잡스에겐 화가 크리산 브레넌과의 사이에 1978년 낳은 리사 브레넌-잡스라는 딸이 하나 더 있다. 잡스가 이 딸이 자기 자식임을 부정하자 브레넌은 “그럼 잡스는 불임남이냐”고 공격했고, 나중에야 잡스는 친딸임을 인정했다. 

비공인 전기인 <잡스의 두번째 귀환>에는 잡스가 가수 존 바에즈의 연인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한술 더 떠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잡스가 바에즈와 결혼까지 했었다고 되어있으나 역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1982년 잡스는 뉴욕 산 레모에 아파트를 하나 샀다. 데미 무어,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브 마틴, 야스민 아가 칸 공주 등 명사들이 사는 아파트였다. 잡스는 2층으로 된 자기 아파트를 열심히 리노베이션했지만 한번도 그 집에 이사해서 살아보지는 못했고, 20년 지나 U2의 싱어 보노에게 팔았다. 
잡스는 1984년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에 있는 스페인 식민시대 풍 맨션을 하나 샀다. 조지 워싱턴 스미스가 설계한, 침실 14개에 1600평방미터에 이르는 저택이었다. 그 집에서 잡스는 10년 넘게 살았는데 끝까지 가구조차 거의 들여놓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실엔 BMW 모터사이클을 들여다놓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96년 8월 실리콘밸리의 CEO 14명을 만나 만찬을 한 적 있다. 클린턴은 민주당에 거액을 헌금해온 잡스를 좋아했고, 백악관에 초청해 링컨 베드룸에 재워주기도 했다. 1998년 클린턴이 잡스의 집을 방문하자 잡스는 거실에 두었던 모터사이클을 타보게 해줬다고 한다. 잡스 본인은 2006년식 메르세데스 SL 55 AMG를 탔는데, 번호판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잡스는 패션에 대한 고집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상징이 되다시피 한 긴 소매의 검은 터틀넥 셔츠는 생크루아(St. Croix) 제이고, 청바지는 리바이스 501 블루진, 신발은 뉴밸런스 991 스니커즈를 신었다. 생선은 먹지만 육류는 먹지 않는 페스코(pescetarian)였다. 


(잡스가 사망한 날, 애플사 홈페이지 화면 캡쳐. 딱 '잡스가 좋아했을 법한' 디자인이다.)



췌장암 투병, 마침내 진 별

잡스가 췌장암 투병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린 것은 2004년 중반이었다. 잡스는 기존 치료법을 거부하고 특별한 식이요법에 돌입했다. 그 해 7월 종양이 거의 사라지면서 잡스식 치료법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잡스가 자신을 대신하게끔 업무를 맡겼던 사람이 지금의 후임 CEO인 티머시 쿡(Timothy D. Cook)이다.

2006년 8월 애플 연례 세계개발자회의(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WWDC)에 나타난 잡스는 초췌하고 바짝 마른 모습이어서 업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특유의 숨쉴틈 없는 열정적인 연설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보통 때라면 반드시 잡스가 했을 핵심 프리젠테이션은 다른 발제자들에게 넘어갔다. 2년 뒤 다시 열린 WWDC에서 다시 잡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애플 측은 잡스가 ‘평범한 종양’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다고만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잡스의 투병 사실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된 뒤였다. 블룸버그가 ‘실수로’ 2500단어 분량의 방대한 ‘잡스 부고 기사’를 낸 사고를 친 것도 그 해 8월이었다.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언론사에서는 흔히들 유명인의 부고 기사를 미리 준비해놓는다. 만일 사망하면 바로 내보내기 위해서다. 블룸버그는 사망 날짜와 향년이 없는 잡스의 부음을 미리 만들어놨을 뿐인데, 그것이 실수로 공개가 돼버렸다)

다음달인 2008년 9월 열린 애플 Let‘s Rock 행사에서 잡스는 마크 트웨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었다는 보도는 너무 과장됐다.” 잡스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잡스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고, 그 해 12월 맥월드 컨퍼런스와 이듬해 맥월드 엑스포에서는 잡스가 아닌 마케팅 담당 부사장 필 쉴러(Phil Schiller)가 주제 연설을 맡았다. 2009년 1월 애플 측은 “평범한 종양일 뿐이었다”고 발표했지만 잡스는 몇달 뒤 “호르몬 불균형을 몇달째 겪고 있다”고 인정했다. 애플 내부에 보낸 메모에서 잡스는 “내 건강과 관련된 이슈가 당초 내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전했다.

그 해 4월 잡스는 테네시 주 멤피스의 감리교대학병원 이식연구소에서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경과는 양호했지만 2011년 1월 건강상의 이유로 잡스는 다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팀 쿡이 이번에도 대행을 맡았다. 이 때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애플 뿐 아니라 잡스가 한때 관리자로 일했던 월트디즈니사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잡스의 병가로 인해 월트디즈니 주가까지 1.5% 내려갔다. 

3월 아이패드2 론칭과 6월 WWDC에서의 아이클라우드(iCloud) 발표는 계속 잡스가 했으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8월 24일 잡스는 CEO 자리를 완전히 쿡에게 넘겼고 10월 5일 세상을 떠났다.


Steve Jobs, Apple’s Visionary, Dies at 56 /뉴욕타임스

Mr. Jobs was neither a hardware engineer nor a software programmer, nor did he think of himself as a manager. He considered himself a technology leader, choosing the best people possible, encouraging and prodding them, and making the final call on product design.
It was an executive style that had evolved. In his early years at Apple, his meddling in tiny details maddened colleagues, and his criticism could be caustic and even humiliating. But he grew to elicit extraordinary loyalty.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잡스는 애플은 물론 IT 업계 전체의 심벌이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1982년 애플 컴퓨터를 ‘올해의 기계’로 선정하면서 잡스를 “마이크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the most famous maestro of the micro)”이라 부른 바 있다. 어떤 이들은 공업의 시대를 연 토머스 에디슨, 대량생산 시대를 연 헨리 포드에 이어 잡스를 새로운 산업의 3대 거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잡스에 보내는 유명인들의 추모사



애플사 홈페이지에 걸린 공식 추도사



Statements reacting to Jobs' death were released by notable people in the US, including U.S. President Barack Obama, Microsoft founder Bill Gates, and The Walt Disney Company‘s Bob Iger. Wired collected reactions and posted them in tribute on their homepage.
 
Excerpts from President Barack Obama’s statement
"Steve was among the greatest of American innovators ? brave enough to think differently, bold enough to believe he could change the world, and talented enough to do it. By building one of the planet’s most successful companies from his garage, he exemplified the spirit of American ingenuity. By making computers personal and putting the internet in our pockets, he made the information revolution not only accessible, but intuitive and fun. And by turning his talents to storytelling, he has brought joy to millions of children and grownups alike. Steve was fond of saying that he lived every day like it was his last. Because he did, he transformed our lives, redefined entire industries, and achieved one of the rarest feats in human history: he changed the way each of us sees the world."
 
Bill Gates released a statement
"I'm truly saddened to learn of Steve Jobs’ death. Melinda and I extend our sincere condolences to his family and friends, and to everyone Steve has touched through his work. Steve and I first met nearly 30 years ago, and have been colleagues, competitors and friends over the course of more than half our lives. The world rarely sees someone who has had the profound impact Steve has had, the effects of which will be felt for many generations to come. For those of us lucky enough to get to work with him, it‘s been an insanely great honor. I will miss Steve immensely."
 
The Walt Disney Company’s CEO Bob Iger
"Steve Jobs was a great friend as well as a trusted advisor. His legacy will extend far beyond the products he created or the businesses he built. It will be the millions of people he inspired, the lives he changed, and the culture he defined. Steve was such an "original," with a thoroughly creative, imaginative mind that defined an era. Despite all he accomplished, it feels like he was just getting started. With his passing the world has lost a rare original, Disney has lost a member of our family, and I have lost a great friend. Our thoughts and prayers are with his wife Laurene and his children during this difficult time."

Excerpts from Indian Prime Minister Manmohan Singh‘s statement
I am deeply saddened to learn of the demise of Steve Jobs. He was truly an innovative man and taught us new ways to connect and communicate.

Excerpts from Australian Prime Minister Julia Gillard’s statement
Here we are at a Future Jobs Forum and the jobs of the future are going to be shaped by innovation and we hear the news of the loss of an incredible global innovator. It‘s not too much to say he literally changed our world. All of us would be touched every day by products that he was the creative genius behind, so this is very sad news and my condolences go to his family and friends.

New York Mayor Michael Bloomberg
"Tonight, America lost a genius who will be remembered with Edison and Einstein, and whose ideas will shape the world for generations to come."

News Corporation founder Rupert Murdoch
"Steve Jobs was simply the greatest CEO of his generation."
 
The Nokia Corporation, CEO, Stephen Elop
"Steve‘s passion for simplicity and elegance leaves a legacy that will endure." He said the thoughts of all at the Finland-based cellphone maker are with Job’s friends and family.
 
American director Steven Spielberg
"Steve Jobs was the greatest inventor since Thomas Edison. He put the world at our fingertips."
 
Microsoft co-founder Paul Allen
"We‘ve lost a unique tech pioneer and auteur who knew how to make amazingly great products. Steve fought a long battle against tough odds in a very brave way. He kept doing amazing things in the face of all that adversity. As someone who has had his own medical challenges, I couldn’t help but be encouraged by how he persevered."

Apple Co-founder Steve Wozniak
"People sometimes have goals in life. Steve Jobs exceeded every goal he set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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