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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의 기억- <핀치의 부리>에 이은 또 하나의 감동

딸기21 2007. 11. 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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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의 기억
Time, Love, Memory : A Great Biologist His Quest for the Origins of Behavior
조너던 와이너. 조경희 옮김. 최재천 감수. 이끌리오




<핀치의 부리>를 쓴 조너던 와이너의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샀다. 좀 허풍 섞어 말하자면 지금껏 태어나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핀치>다. 그러니까 조너던 와이너의 이름은 나에겐 ‘교주’의 이름과 같은 것이니, 신도는 교주를 따를 수밖에. 


이 책 역시 훌륭하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핀치>보다는 좀 모자란다 싶지만, 별 다섯 개 짜리인 것은 분명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면서 묵직해지는 느낌. 조너던 와이너 특유의 글쓰기 비법은 대체 뭐길래, 과학책이 이렇게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까. <초파리의 기억>이라는 한글판 타이틀은, <시간, 사랑, 기억>이라는 원제의 감수성을 영 못 쫓아간다. 

책은 미국의 생물학자 시모어 벤저라는 사람과 그의 선학들, 후학들이 인간의 행동이라는 비밀의 문을 유전자라는 열쇠로 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핀치>가 갈라파고스의 과학자 부부와 찰스 다윈, 그리고 핀치라는 새들을 3중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진화생물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펼쳐보이고 있다면, 이 책 <초파리>는 벤저와 동료 과학자들, 그리고 초파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핀치>의 장구한 세월은 이 책에선 좀 짧은, 20세기로 줄어들었다. 갈라파고스라는 천혜의 배경은 칼텍과 MIT 등 미국 유수 대학들의 구석진 실험실로 바뀌었다. 전작의 주제는 진화의 유구한 역사와 ‘지금 이 시각에도 진행되는 진화’라는 두 가지 축이었다. <초파리>에서 주제는 좀더 세분화해, ‘행동과 유전자의 관계’로 좁아진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라는 것을 세상에 꺼내 보인 뒤 유전자는 ‘인간의 설계도’라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하지만 사실 유전자의 이런 ‘결정력’이 인정받기까지는 마치 전쟁과도 같은, 과학자들 간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우생학과 나치즘 논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논쟁은 아마도 ‘본성이냐 양육이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어디까지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인간이란 존재의 ‘설계자’는 과연 누구인가. 


벤저는 이 논쟁에서 ‘본성파(派)’의 손에 실탄을 안겨 준 공헌자다. 시간 감각 없이 게으른 초파리, 남들 다 빛을 따라 가는데 홀로 못 쫓아가는 굼뜬 초파리, 유독 머리가 좋아 학습을 잘 하는 초파리, 짝꿍을 만나도 구애를 할줄 모르는 멍청한 초파리... 이 작은 곤충의 돌연변이들을 연구하면서 벤저는 초파리의 행동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행동은 유전된다! 행동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아빠 옆에 누워 똑같은 포즈로 다리 꼬고 누운 내 딸, 아버지와 똑 닮은 모습으로 걷는 우리 오빠. 행동의 어떤 패턴이 유전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약간의 관찰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행동은 유전된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서양 과학사에선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과학사에서 뿐이랴. 행동과 유전, 재능과 유전, 지능과 유전. 


이렇게 확장해서 나가면 결국 우리는 ‘현대사의 원죄’ 격인 우생학과 홀로코스트,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서양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그런 고통의 역사에서 좀 다른 길로 비껴왔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유전자와 행동, 즉 ‘본성’의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다. 


시모어 벤저를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벤저를 중심으로 그 앞뒤에 위치한 여러 학자들이다. 초파리의 아버지 허버트 모건과 사회주의 우생학에 경도됐던 허먼 멀러, 유전자 지도의 창시자 앨프레드 스터티번트, 대륙을 건너뛰며 원자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향한 막스 델브뤼크, ‘사회생물학’으로 ‘본성-양육 논쟁’의 포문을 열었던 이슈메이커 에드워드 윌슨, 그에 반대하며 ‘좌파적 진화론’을 펼친 리처드 르원틴,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머리는 좋았지만 성격이 지랄 같고 돈독 오른 제임스 왓슨 등등 현대 생물학의 쟁쟁한 거장들이 이 책에 모두 등장한다. 리처드 파인만, 폴 디랙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들도 조연으로 간간이 얼굴을 내비친다. 업적을 줄줄이 나열하는 식의 소개가 아니라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생생한 일화들이다 보니 저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앞머리에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가 들어있다. 이 책에 최교수의 추천사가 없으면 안 되지. 최교수는 <핀치>에도 추천사를 썼지만, 특히 이 책의 내용을 읽은 뒤엔 추천사를 안 읽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도킨스와 굴드, 윌슨과 르원틴을 편갈라 놓고 보자면 이 책의 도킨스 편, 윌슨 편이다. 르원틴 식의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이론은 선험적 좌파론에 불과할 뿐, 과학적 진실과는 맞지 않는다. 본성은 있다! 유전자는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행동은 유전된다! 


본성-양육 논쟁 외에 이 책의 또다른 숨겨진 주제 중 하나는 분자생물학과 동물행동학의 갈등이 될 것이다. 밖에 나가 주구장창 개미나 들여다보는 과학자들과, 실험실에서 DNA를 연구하는 ‘첨단’ 분자생물학자들. 윌슨은 전자이고 왓슨은 후자다. 오만방자한 왓슨이 하버드 교수 재임용 탈락한 뒤 노골적으로 윌슨을 거론하며 화풀이를 해댔단 얘기를 최교수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리하여 개미들의 아버지인 윌슨은 본성-양육 논쟁에선 르원틴의 맞수였고 동물행동학과 분자생물학의 싸움 아닌 싸움에선 동물행동학의 대변자였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윌슨이 아닌 시모어 벤저이지만, 벤저는 ‘본성파’이고 또한 분자생물학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물행동학으로 향해간 사람이다. 그러니 윌슨의 제자인 최교수가 이 책에 써놓은 앞글은 학계 전문가의 의례적인 칭찬이 아닌 구구절절 마음이 담긴 추천사가 됐을 수밖에. 

책이 주는 재미는 이렇게 여러 가지다. 유전자와 행동의 관계,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첫 번째 재미. 두 번째는 스타 과학자들의 캐릭터가 그대로 드러나는 일화들을 읽는 재미. 세 번째는, 최교수가 추천서에 쓴 대로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재미’, 즉 진화학과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에 대해 나도 모르게 배우는 재미. 인류에게 화두를 던져놓고 초연히 자신의 길을 가는 노과학자 벤저의 모습은, 네 번째 재미이자 감동으로 남는다. 


사족을 붙이자면,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
라는 책도 국내에 번역돼 있는데, 유전학-진화생물학 책들을 통해 앞서 주워섬긴 과학자들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은 독자라면 그 책을 먼저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와이너의 <초파리>보다 덜 문학적이지만 버금가게 재미있고, 더 박진감 넘친다는 장점이 있다.


양자물리학자인 파인먼은 벤저의 실험실에 찾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초파리의 뇌를 보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벤저는 아이를 현미경 앞에 앉히고 “이 뇌 속에는 트랜지스터가 10만개나 숨어 있단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로 그 아버지에게 고갯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물리학자 대 물리학자로서 말이다.

그러나 파인먼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지. 똑바로 말해주게. 저건 트랜지스터가 아니라 신경세포야.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말게.” 벤저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파인먼이 옳았다. 신경세포는 실제로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고 유전자에서 신경세포로, 그리고 신경세포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전자에서 라디오나 컴퓨터로 이어지는 길보다 길고 비밀스럽다.


슈뢰딩거는 ‘델브뤼크의 모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주제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다. 사실 델브뤼크의 연구는 그때까지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에 존재하던 벽과 전쟁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상태였고, 슈뢰딩거 역시 델브뤼크의 파지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유전자 문제를 ‘풀 수 있는 문제’로 각인시킴으로써 당대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에 광산으로 피신해 있었던 젊은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은 영국 해군 본부의 요새로 알려진 창문 없는 방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시카고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제임스 듀이 왓슨도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는 조류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순간부터 유전자의 비밀을 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훗날 이야기했다. ... 에드워드 윌슨은 앨라배마대학교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왓슨이나 크릭, 벤저와 똑같은 감동을 받았다. 윌슨과 왓슨 두 사람은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행동원자의 탐구라는 믿음에 남은 생애를 바치게 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아직 어렸던 왓슨은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윌슨은 회상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유전자는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조상이 갖고 있는 기억이다. 우리는 세 가지 정보 없이는 손가락 하나도 들어올릴 수 없다. 


세 가지 정보란 현재 우리의 감각이 보내주는 정보, 과거에 우리의 감각이 보내주었던 정보, 그리고 지구에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이 습득한 정보, 즉 유전자로 대표되는 정보를 말한다. 진화는 학습이다. 개체가 뇌에 학습을 저장하고 사회가 책에 학습을 저장하는 것처럼 종(種)은 염색체에 학습을 저장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습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곧 기억이다. 그것은 생명이 시작된 순간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시간 감각만큼이나 오래되고 번식 본능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발견의 기억이다.... 


시간, 사랑, 기억은 경험의 세 가지 토대이며 행동의 금자탑을 지지하는 세 가지 초석이다. 벤저와 그의 연구원들은 초파리실에서 연구하던 초기에 벌써 이 세 가지를 모두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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