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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대국 아메리카에 대한 신랄한 르포

딸기21 2009. 4. 2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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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ルポ 貧困大國アメリカ 
츠츠미 미카 저
 |  고정아 역 | 문학수첩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제목이 그럴싸하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기대 이상이다. 신문 서평에서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책’이라는 평가를 이미 보았던 탓에 기대치가 적당히 높아져 있었는데, 분량에 비해 아주 제대로 된 르포였다. 

말 그대로, ‘빈곤대국 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강하면서 가장 취약한 나라, 가장 부자면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출발점은 지난해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 아니 그 전 해에 이미 터져 나왔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미국의 주택 분양이 침체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업자들이 새로이 주목한 대상은 국내에 증가하기 시작한 불법 이민자와 저소득층이었다. 파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주택 융자를 받을 수 있다고 떠들어 대면서 고객을 확보했던 것이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단순히 금융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격한 시장원리가 경제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빈곤 비즈니스’의 하나였다.”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고 9·11을 거쳐 미디어들이 존재의 근원부터 훼손당하는 것을 본 저자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미국 사회의 현실을 일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 테면 앞서 인용한 서브프라임 문제라든가 이라크전 참전군인 모집난 등을 ‘빈곤사회’의 구조와 연결짓는다. 그의 눈에 비친, ‘가려진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목숨줄이라도 내다팔아야 할 처지로 몰아붙이는 ‘신자유주의-민영화-폭주하는 자본주의’가 이 모든 사태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2005년8월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천재(天災) 아닌 인재(人災)’라는 이야기는 많이 나왔다. 저자는 연방재난보호청(FEMA) 전직관리들의 말을 통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얼마나 계획적, 구조적으로 재난구호를 ‘민영화’했는지를 추적한다. 
많이 알려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루이지애나 남부의 ‘흑인 빈민층’을 정부가 완벽하게 무시해 떼죽음으로 몰아붙였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부시는 재난이 났을 때 ‘의료사업 민영화’를 홍보하러 다니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재난을 맞아 삶의 터전을 잃은 아프리카계 빈민들을 정부가 또다시 저버렸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가 포착한 루이지애나의 현실 중 가장 처참한 것은, 재난을 맞은 그 땅이 이제는 부자들의 투기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후일담이었다.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 시에서 선출된 리처드 베이커 하원 의원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개답했다. ‘마침내 뉴올리언스의 빈곤자용 주택이 정리되었다. 우리가 못 한 일을 신이 대신하여 해 주신 것이다.’ 인적이 사라지고 깨진 벽돌만 널려 있는 거주 지역에서는 저소득자용 공공 단지가 헐리고, 고급 콘도미니엄군과 쇼핑몰이 건설되었다. ‘저지대 제9구’와 같이 해발 밑에 있는 빈곤 지구의 일부를 부 유층 지구를 지키기 위한 저수지로 개조하려는 계획도 이미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대한 고발들은 점입가경이다. 망가졌다 망가졌다 하지만, 이 책에 드러난 구체적인 실태를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행여라도 미국에 거주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 부시가 내세운 이른바 ‘교육개혁’이 어떻게 ‘이라크 파병’으로 이어졌는지는 더 충격적이다. 
 

“낙오학생방지법은 표면상으로는 교육개혁이지만 그 안에 이런 항목이 있어요. ‘미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학생의 개인 정보를 군 모병관에게 제출하라. 만일 이를 거부할 시에는 후원금을 중단하겠다’고 말이에요.” 
 

현직 교사가 들려준 말이란다. 책의 중반부터는 ‘파병’-‘모병’과 가난이 미국 사회 안에서 어떤 사슬로 묶여있는지를 파헤친다. 가난한 미국인들, 혹은 미국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불법이주자들은 미군에 등록하고 이라크에 간다. 가서, 죽거나 다치거나 정신질환자가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주겠다며 외국인 병사들을 미군으로 불러 모았는데 합격한 사람들 중 절반이 한국어 사용자, 즉 한국인이었다는 보도였다. 아메리칸이 되기 위해 기를 쓰는 한국인들이 어디 한둘이랴마는. 

츠츠미 미카는 미군 병사가 되어 전장으로 가는 미국인들, 불법이주자들, 미국의 ‘전쟁산업 민영화’에 맞춰 파견직으로 이라크에 보내지는 가난한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제3국의 가난한 이들의 사연들을 모아 들려준다. 네팔 등지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알선료까지 내고 ‘속아서’ 혹은 ‘알면서도’ 이라크에 가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국 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인들을 충원할 수 없게 된 미 국방부가 하는 짓이 저런 것이다. 이라크에서 어처구니없게 희생된 김선일씨가 일했던 회사가 ‘켈로그 브라운 앤드 루트(KB&R)’의 하청업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전쟁산업 파견근로자들도 바로 그 회사, 딕 체니가 경영했던 핼리버튼의 자회사인 KB&R과 연결돼 있다. 

 
저자가 인터뷰한 이라크 파견자 중에는 ‘제3세계 빈민’ 뿐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돼 있다. 우익들의 평화헌법 수정운동이 한창인 나라 일본,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 나라 일본 사람이 이라크로? 2005년에 실제로 일본인이 이라크에서 숨진 적 있었다. 파병도 안 했는데 왜? 신문 사진에서 본 그 일본인은 깍두기 헤어스타일에 다부진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아마 용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빈민들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이라크 전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라크로 가는 군인과 민간인들 모두에게 남는 것은 병들거나 다친 육체,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 가난뿐이다. 


미국 정부가 교육재정을 줄이고 장학금을 삭감하면서, 등록금 때문에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들이 넘쳐난다. 이런 가난한 대학생, 가난한 고등학생들은 군인 사냥꾼들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참 대단한 모병제의 나라다. 여기서 얼마 전 미국 언론에 실린 또 하나의 기사가 겹쳐진다. 군 모병관들이 ‘군인 모집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는 거였다. 


아니, 신병 모집이 얼마나 힘들기에 죽기까지 해? 그 답이 이 책에 나와 있다. 가난한 이들이 군인이 되어, 자기 나라에 붙어 있으려고 모병관의 길을 택한다. 모병 실적이 좋지 않으면 이라크에 끌려간다!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군의 실태라니 허망하다 해야 하나.


책 표지에는 기나긴 설명이 붙어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극단적인 민영화의 폐해와 실상, 국민의 생존권과 관계된 분야까지 시장원리를 끌어들인 미국의 현실태가 전하는 경고!”
 

더 말해 무엇 하랴. 한국 정부는 미국 부시행정부가 했던 한물간 신자유주의 돈 놀음을 더 신이 나서 따라하려고 지랄을 떨고 있다. ‘빈곤대국 아메리카’가 ‘빈곤대국 대한민국’으로 재연되는 모양을 지켜보려니 기가 차다. 


(번역에는 문제가 좀 있다. 일본어를 그대로 옮겨서 국방부를 ‘국방총성’이라 반복해 표기한 것은 매우 눈에 거슬린다. 이 책 뿐 아니라 아직도 상당수 책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이 ‘국방성’, ‘외무성’, ‘수상’ 같은 말을 쓴다. ‘국방부’, ‘외무부’, ‘총리’다. 런던 ‘경시청’이 아니고 ‘경찰청’이다. 이 책에는 ‘유유아’라는 말도 나온다. 乳幼兒를 그냥 발음대로 읽은 것 같은데 우리 식으로 하면 ‘영유아’다. 우라늄을 일본식으로 ‘우란’이라 거푸 쓴 것도 짜증난다. 그 정도는 알고 번역해줘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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