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138]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저/이현경 역 | 민음사 | 원서 : Le citta invisibili / Invisible Cities
책 하나를 끼고 몇 년 씩 뒹구는 것은 내게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칼비노의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서는 하도 오래전부터 집착 수준의 애정을 갖고 있던 터여서,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지인들도 있겠다.
너무도 오래 전, 조너선 스펜스의 <칸의 제국>을 읽을 때에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로 인용돼 있는 것을 옮겨 적어 놨었다. 그 때만 해도 이 책이 제대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을 때였던지라, 인터넷에서 용케도 번역물이 돌아다니는 것을 찾아내 프린트를 해서 뒤적거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묶여 국내에 제대로 출간된 것은 2007년이다. 참 늦게도 나왔다. 너무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 이 책이 말 그대로 ‘버려져 굴러다니는’ 것을 후배 녀석이 집어 들었고, 나는 눈빛 번득이며 그것을 다시 가로채어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나와 운명으로 얽혀있으니까!
너무 아까워서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 나는 이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제대로 된 책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은 출간된 그 해 6월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때였다.
나는 그 여행에 이 책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타슈켄트의 기차역, 사마르칸드, 부하라, 히바.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 듯한 그 몽환의 도시들, 사막의 오아시스들에서 나는 칼비노의 책을 읽었다.
“이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 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황제에게 보여주는 도시들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든 있는 곳들이다. 어쩌면 그것들은 고향, 자아, 혹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각 도시마다 정확하게 말로 표현되는 기본적인 정보들에 뒤이어,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거나 손등 혹은 옆면을 보이기도 하고 곧게 혹은 사선으로, 격렬하게 혹은 천천히 움직여 소려 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대화 형태가 자리 잡았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칸의 하얀 손이 베네치아 상인의 민첩하고 활기 찬 손에 품위 있게 대답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자라나면서 손의 움직임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손을 바꾸거나 움직임을 되풀이할 때 그 각각은 영혼의 움직임과 모두 일치했다. 사물에 관한 어휘가 상품의 새로운 견본에 따라 새로워지는 반면, 소리 없이 몸짓으로 이루어진 설명 목록은 제한되고 고정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의지하는 기쁨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차츰 줄어들었다. 그들 대화의 대부분은 소리 없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자네가 말하지 않은 도시가 하나 남아 있네.”
마르코 폴로가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린 게 베네치아가 아니라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자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본 적이 없네.”
“도시들을 묘사할 때마다 저는 베네치아의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다른 도시들에 대해 자네에게 물어볼 때는 그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지. 그러니 베네치아에 대해 물어볼 때는 베네치아 이야기를 해야 해.”
“다른 도시들이 지닌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잠재하는 최초의 도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게 그 도시는 베네치아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베네치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도시에 대해 자네가 기억하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묘사해야 했을 걸세.”
호수의 수면 위에 잔물결이 일었다. 송나라 때 지은 오래된 구릿빛 왕궁의 그림자가 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기억 속의 이미지들은 한번 말로 고정되고 나면 지워지고 맙니다. 저는 어쩌면, 베네치아에 대해 말을 함으로써 영원히 그 도시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도시들을 말하면서 이미 조금씩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저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상상을 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담뱃대에서 천천히 위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한줄기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기도 하고 공중에 그대로 걸려 있기도 했다. 대답은 그 연기 속에 있었다. 연기를 실어 가는 바람을 맞으며 마르코는 드넓은 바다와 산맥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생각했다. 안개가 걷히면서 공기가 메마르고 투명해지고 그와 함께 멀리 있는 도시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의 시선이 가 닿고 싶은 곳은 그런 변덕스러운 안개와 구름의 막 그 너머에 있었다. 사물들의 형태는 멀리 있을 때 더 잘 구별되었다.
혹은 연기가 입에서 나가자마자 자욱하게 모이면서 천천히 멈춰버렸고 다른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광경은 대도시의 지붕 위에 고여 있는 증기들, 흩어지지 않는 불투명한 연기, 아스팔트 거리 위로 무거운 유독가스를 내뿜는 굴뚝같은 것이었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쿠빌라이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거지들이 하는 대화인지도 모르네. 두 사람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녹슨 잡동사니, 천 조각, 폐지들을 모아 쌓지. 싸구려 포도주 몇 모금에 취한 두 사람이 동방의 보석들로 주위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폴로가 말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쓰레기로 뒤덮인 황량한 땅과 칸 왕궁의 공중 정원만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나누어놓는 것은 우리의 눈꺼풀이지만 어떤 게 안이고 어떤 게 밖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쿠빌라이가 마르코에게 물었다.
“서양으로 돌아가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에게 해줄 건가?"
“이야기하고 또 할 겁니다.”
마르코가 말했다.
“하지만 제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기대했던 말만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폐하께서 귀 기울이시는 세계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고 제가 돌아가는 날 저희 집 거리를 오갈 짐꾼이나 곤돌라 뱃사공들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제가 만약 제노바 해적들에게 잡혀 모험 소설을 쓰는 작가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경우, 말년에 작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
“가끔 내가 화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현재에 포로가 되어 있을 때, 그럴 때면 자네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오곤 하지. 그 현재에서는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가 그 순환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해 있는데,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목소리를 통해 도시들이 살아가는. 그리고 어쩌면 죽은 뒤에도 다시 살아나게 될 보이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네.”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제노비아,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알아봐 달라고 애원하는 아델마, 서로 떼어질 수도 서로를 바라볼 수도 없는 앞면과 뒷면의 평면 만으로 이루어진 도시 모리아나,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스스로의 과거를 파괴하는 클라리체, 산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근심걱정을 지하의 쌍둥이 복사판에 묻어버린 에우사피아, 완벽함을 쌓아가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데 골몰하는 베르셰바, 풍요를 느끼기 위해 매일매일 쓰레기를 쌓는 레오니아, 멸균의 도시를 꿈꿨으나 결국은 오래된 책들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에 점령당해버린 테오도라, 정직과 부정직이 뒤섞여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베레니케.
그렇게 오래도록 끌어왔는데도, 칼비노와의 여행을 끝내고 나니 허전하고 아쉽다.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곤대국 아메리카에 대한 신랄한 르포 (0) | 2009.04.21 |
---|---|
평등해야 건강하다 (0) | 2009.04.20 |
'정의로운 전쟁'이 있을까 - 모가미 도시키 '인도적 개입' (0) | 2009.04.17 |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0) | 2009.04.16 |
에콜로지카- 생태학적 사회주의 (0) | 2009.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