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여행을 떠나다

철학의 길과 청명한 산길, 어느 쪽이 좋을까?

딸기21 2012. 5. 3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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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철학자가 될 것만 같은, 고즈넉한 언덕배기 산책로. 청량한 공기에 고사목과 맑은 물, 호수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산길.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5월에 두 곳을 여행했습니다. 아쉽게도 4월의 태국 여행조차 여행기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터라... 사진으로라도 뭉텅이씩 올려서 함께 감상하면 좋은데, 사실 여행기라는 게... 남의 여행기를 여간해서는 읽게 되지 않잖아요. :)


그래도 며칠 전 보고 온 산길 풍경이 너무 생생해서, 생각난 김에 5월의 여행지 두 곳의 사진을 한장씩 뽑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친구들께서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도 달아주셨더라고요.


먼저, 이 곳입니다.



이 곳은 교토 히가시야마의 '철학의 길(哲学の道)'입니다. 


교토는 가로세로 십자로들이 크로스하는 계획도시입니다. 옛날 중국의 장안을 모델로 지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길 찾기가 아주아주 쉽습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니조, 산조, 시조, 고조, 로쿠조, 시치조, 나나조, 큐조... 이렇게 2~9조까지의 길로 되어있습니다. 왜 이치조는 없냐고요? 옛날 황궁(지금은 도쿄에 있지만)이 있는 줄이거든요. 거기를 기준으로 니조, 산조, 시조 등등을 매겨나간 겁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거리도 이름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가로세로 거리의 이름을 나란히 붙이면 교차로의 위치가 되는 거지요. 이름만 들으면 대략 거기가 어디쯤이로구나, 알 수 있습니다. 동쪽에는 히가시야마(東山)가 있고, 서쪽에는 아라시야마(嵐山)가 있습니다. 이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가 교토입니다.


그 중 히가시야마에 긴카쿠지(은각사)가 있습니다. 아라시야마에 가까운 북서쪽 고지대의 킨카쿠지(금각사)에는 금각이 있지만 긴카쿠지에는 은칠한 전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킨카쿠지보다 더 아름답고 소담한 정원과 모래마당이 있어서 저는 여기가 교토의 사찰들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긴카쿠지 옆에는 '철학의 길'이 있습니다!!! 


히가시야마 기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교토대학이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철학의 길' 표지판이 붙어있습니다. 잘 정돈된 작은 개울을 따라 올라오다 보면 긴카쿠지 가는 길이 나오죠. 그리로 올라가 절 구경 하고, 다시 철학의 길을 만나는 지점까지 내려옵니다. 아까 올라온 길 말고, 쭉 이어진 반대방향(남쪽)으로 걸어갑니다. 


전체 길이가 1.5km 정도이니, 아주 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와 요니는 이 길에서 빠져나오는데 몇시간이 걸렸습니다! 중간에 어느 카페에서 잠시 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니야 여기 너무너무 좋다 그치, 하면서 두어 걸음. 엄마 여기 정말 좋네요, 최고예요, 전 교토에서 여기가 가장 좋아요, 그러다가 냇물에 떠가는 새빨간 나뭇잎, 꽃잎일까 나뭇잎일까, 이 나뭇잎일까, 아냐 저건 좀 갈색인데. 서너걸음 걷다가 풀 들여다보다가, 으악 저기 엄청 큰 벌 있네, 요니는 민들레 따서 홀씨 날리다가. 걸음 멈추고서 한숨 내쉬며 아, 여기 너무 좋잖아,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걸었거든요.



이 길을 걸으면 저절로 철학을 하게 되는 건 아니고요, 유명한 철학자인 니시다 키타로가 저 근처에 살면서 산보했다고 해서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의 관광상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토의 다른 곳들에 비하면 사람 적고 엄청 좋아요. 이런 이름을 가진 여행지라니, 정말 좋지 않습니까?



철학의 길이 끝나고, 골목이 나옵니다. 지금 사진에는 사람들이 좀 보이지만, 조금만 걸어도 어느 틈에 주변이 한적해지는 곳입니다.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면 유명한 헤이안진구(平安神宮)가 나옵니다.


이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가 재미난 집을 보았습니다.



뭐가 재미있었냐고요? 저 시계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 초점이 안 맞았는데, 옆에 쓰인 글을 읽어보니... '시계집'이라네요. 지금도 시계를 파는지, 수리를 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옛스럽고 한적한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게임에는 틀림없지요.


*


지난 주말에 다녀온 곳은 교토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곳입니다.



여기는 나가노현 미나미알프스의 카미코치(上高地)라는 곳입니다.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가미코치'... 한자를 보면 아시겠지만, 고지 중에서도 위에 있는 곳이랍니다. 해발고도 1500m 이상이지만 경사가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는 정도인 고지대여서 걷기에 딱 좋습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곳은 환상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을 지닌 묘진이케(明神池)라는 곳입니다. 일본 초대 천황이라는 진무 텐노...가 아니고 진무의 삼촌인 호타카미노카미(穂高見神)를 위한 신사...의 지부 격인 '호타카묘진오쿠미야(穂高神社奥宮)'... 헥헥;; 경내에 있는 연못이랍니다. 


카미코치에 가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도쿄의 신주쿠 역에서 저녁에 기차를 타고 2시간 40분을 달려서 나가노 현의 마츠모토라는 도시에 내렸습니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마츠모토 역에서 엄청 느린 전차를 타고 30분 걸려 신시마시마라는 작은 역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알피코라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산길을 올라 카미코치에 내립니다. 


우리 가족은 그 전 정거장인 다이쇼이케에 내려서 거기서부터 걸었습니다.



다이쇼이케에서 조금 걷다 보니, 연못과 늪의 중간 정도인 이런 곳이 나오더군요. 타시로이케(田代池)입니다.


5월 말이지만 워낙 고지대라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엔 여전히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었고, 날씨는 제법 쌀쌀했어요.



카미코치의 이정표 격인 캇파바시 부근에서 바라본 미나미 알프스... 사계절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곳이랍니다.

저 사진은 넘 안 나왔고... ㅠ.ㅠ 정말 장관이었는데, 네모난 프레임 안에는 도저히 담을 수가 없네요.


타시로이케를 지나 쭉~ 걸어올라가, 캇파바시를 지나 트레킹을 하다가, 묘진이케에 들렀다가 산장 스타일의 여관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 마침 투숙 중이던 천문동호회 아저씨(할아버지?)들이 천체망원경 넉 대를 들고와 설치해주셔서, 달의 분화구도 보고 토성도 보고 화성도 보고... ㅎㅎㅎ


요니는 카미코치가 지금껏 돌아다녀봤던 곳들 중에 가장 좋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껏 일본에서 가본 곳 중에는 철학의 길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다음이 카미코치... 굳이 누가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하는 것도 아니고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지만... 뭐, 재미니까요. ^^


카미코치가 2순위로 밀린 이유는, 사람들의 개입이 최소화된 아름다운 자연이어서입니다. 철학의 길은 사람살이 냄새가 나면서도 감동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카미코치는 '여행하고 싶은 곳', 철학의 길은 '살아보고 싶은 곳.


지금껏 제가 여행해본 전세계 모든 곳(얼마 안 되지만 -_-)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재미있었던 곳을 꼽으라면... 

음... 고민이 많이 됩니다만... 에흐... (누가 고르란다고 혼자 고민하고 있을까 -.-a) 


요르단의 페트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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