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1991-1995년 유고슬라비아의 잇단 전쟁
조 사코라는 미국 작가는 만화를 통해 세계의 이슈를 그려보입니다. '코믹 저널리즘'이라 부르기도 하더군요. 그 작가의 역작인 ‘팔레스타인’을 오래전 아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같지만, 그 책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안전지대 고라즈데’도 그 작가의 작품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다 읽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고라즈데’를 끝까지 넘기는 데에는 꼬박 두 달이 걸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외국(서양) 사람들이 자기네들 사정을 너무 몰라준다고 하고, 서방 언론이 이스라엘 입장에서 편견을 갖고 아랍을 들여다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들 얘기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너무 정치화돼 있고 서방은 2차 대전 피해자였던 자기들을 너무 몰라준다고. 어쨌거나 팔레스타인 얘기는 세간에 그나마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코가 그린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신랄하고 적나라했습니다.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이야기로 흘러갔군요. 사코의 '고라즈데'를 간단히 소개하면, 옛 유고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보스니아 땅의 고라즈데 Goražde 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고 내전 당시 벌어진 일들을 스케치한 만화입니다. 저자는 1995년과 1996년 고라즈데를 여러 차례 방문해 그곳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같이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그렸습니다. 주로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계(무슬림)를 상대로 저지른 잔혹한 인종청소의 실상이 한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소도시, 고라즈데. _ 위키피디아
이런 표현은 우스꽝스럽지만, 저자의 전작인 ‘팔레스타인’은 ‘고라즈데’에 비하면 장난에 불과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형편이 참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라즈데’가 ‘팔레스타인’의 수백배, 아니 수천배 더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보스니아에는 ‘살인관광’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내전 때 서양 관광객이건 누구건 보스니아에 들어가 사람사냥을 해도 됐었다고, 돈만 내면 살인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그것이 루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역겨워서, 괴로워서, 이 책을 읽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진과는 또 다른 시각적 묘사. 더없이 성실한, 잘리고 파헤쳐진 인체를 꼼꼼히 묘사한 그림들. 책장을 넘기다 덮었다를 반복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한 비디오들이 있다. 고라즈데판 ‘엽기 홈 비디오 특급’이다. 날아오는 포탄, 산산조각난 동물들, 토막난 채 타버린 아이들의 시체, 마취하지 않고 잘라내는 다리 등을 아마추어들이 담은 것이다. (중략) 그런 증거물을 시청한 일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결국 봐도 덤덤해지게 된 이후에도...”
저런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인간은 과연 ‘덤덤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저자는 아주 치명적인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인간성’의 신화에 돌을 던집니다. 세계의 분쟁지역 실태에 대해 제가 읽은 얘기 중 가장 끔찍한 것을 고르라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사태이고, 두 번째가 이 ‘고라즈데’입니다.
그 배경을 들여다보려면 티토의 유고연방을 먼저 살펴야겠지요.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에 의해 건국된 연방국가였습니다. 이 나라가 전전(戰前)의 민족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티토가 권력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티토의 중앙집권적 통치와 결단력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켜내고 국가를 결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티토는 스탈린과 갈라선 뒤 ‘민족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유고슬라비아라는 민족공동체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적 다양성은 묻혀버렸습니다.
티토의 연방주의는 2차 대전 이전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인구를 구성하던 다양한 민족들의 서로 다른 야망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단일한 공산국가로 묶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6개 민족에게 각각의 나라를 허용하고 이를 연방으로 묶었습니다. 그 중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공화국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해왔었지만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그 안에서 민족적, 종교적으로 갈리어 있었지만 하나의 공화국으로 묶였습니다. 연방주의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는 공산국가 시절부터 민족 문제라는 취약성이 늘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옛 유고연방의 6개 주. _ 위키피디아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연방주의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유고 공산주의의 탈(脫) 중앙집권화로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한 제한이 느슨해지면서 전쟁 전의 편협한 민족주의로 돌아가려는 수구적인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가 되자 ‘유고슬라브주의’라는 것의 실체를 놓고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극렬한 논쟁이 벌어지더니 케케묵은 민족감정과 상호불신이 되살아났습니다.
세르비아 공화국 안에는 비 세르비아계 거주민이 대부분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라는 두 자치주가 있었습니다. 자치주들은 1966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에서 세르비아 공화국과 대등한 표결권을 가졌으며, 자치주 정부 내에도 비 세르비아계의 진출이 두드러졌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경우 무슬림 인구가 대부분이었는데, 연방 정부는 무슬림들을 ‘민족적 실체’로 인정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보스니아, 하면 사라예보. 1901년의 사라예보를 그린 그림입니다. _ 위키피디아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은 하나의 민족이라기보다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의 밀레트와 비슷한 정치 구조를 갖고 있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에서 독특한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티토가 사망한 뒤 공화국들은 순번제로 대통령직을 맡았지만 이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놓고서 긴장이 고조됐습니다.
1980년대가 되자 세르비아 내 코소보 자치주에서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민족주의 진영 간 긴장이 더욱 높아져 물리적 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조치 여파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하자, 세르비아 공산당의 실권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Slobodan Milošević 는 전제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 카드’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www.slobodan-milosevic.org
1988년 초 밀로셰비치는 ‘대 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코소보, 보이보디나 자치주를 짓밟았으며, 이듬해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 세르비아 우월주의라는 망령을 불러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치러야할 중요한 전쟁은 경제적·정치적·문화적·사회적인 번영을 이루고 더 빠르고 성공적으로 21세기의 문명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해서 우리는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와 종류는 조금 다르겠지만, 진지하고 위대한 용기 없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용기가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600년 전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전장에서 스스로를 지켜냈고 유럽 또한 지켜냈습니다. 세르비아는 당시 유럽의 문화와 종교, 사회 전반을 지키는 보루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르비아가 유럽의 부속품인 듯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뿐더러,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정말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세르비아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유럽의 일부로 존재해왔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 아무도 그 위엄을 빼앗지 못할 방식으로 말입니다."
인용해 놓은 두 구절은 밀로셰비치가 집권한 뒤, 1989년 6월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망령을 소환해낸 이른바 '가지메스탄 연설 Gazimestan Speech'입니다. 가지메스탄은 세르비아 땅 안에 있는 코소보의 중심지입니다. 1389년과 1448년 두 차례에 걸쳐 세르비아인들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 간 전쟁이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랍니다. 이 두 차례 전투에서 약세였던 코소보 군은 오스만 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은 패배했습니다. 오랫동안 오스만의 통치를 받았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 전투는 엄청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투를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겨왔습니다. 1989년은 코소보 전투가 벌어진지 600년이 된 해였습니다. 이를 기념해 연설하면서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부추긴 겁니다.
1989년 코소보에서 '가지메스탄 연설'을 하는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우월주의는 사실 밀로셰비치 이전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계는 이런 분위기에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밀로셰비치가 집권하자 세르비아 우월주의의 횡포를 더 이상 참아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보고 세르비아 통제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자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했습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6월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나갔습니다. 유고연방은 이들 두 독립국과 잇달아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유고 군의 주축은 세르비아계였습니다. 이어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유고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유고연방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1989년 연방 내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연방 붕괴 과정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대 세르비아주의’를 주창하며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와 내전을 했고 특히 무슬림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지탄 속에서도 1997년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후신인 유고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2000년 민중 봉기로 실각했고, 이후 체포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그러나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재판 도중 옥사했습니다.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을 보내 독립을 무산시키려 했지만 치욕적인 실패만 맛보았지요. 부코바르에서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세르비아계의 ‘인종 청소’ 전략의 첫 번째 증거가 발견된 곳도 여기였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프라뇨 투지만 Franjo Tuđman (1991-99년 재임)은 서유럽으로부터는 크로아티아의 건국을 즉각 승인 받았으나, 세르비아계와의 전쟁에서 패해 영토의 4분의1을 잃었습니다.
전쟁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퍼졌습니다. 훗날 보스니아 대통령을 지낸 무슬림 지도자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Alija Izetbegović (1991-2000년 재임)는 어떻게든 통일국가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 Radovan Karadžić로 인해 좌절해야 했습니다. 카라지치는 1992년 3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지역을 분리시켜,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공화국과 합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해 4월 사라예보에서 양측 간 충돌이 일어나더니 전쟁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으로 확대됐습니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밀로셰비치의 연방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사라예보를 봉쇄했습니다. 연말이 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거의 전역이 세르비아계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세르비아계는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우위를 굳히기 위해 비 세르비아계에 대한 잔혹한 ‘인종 청소’를 저질렀습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도 무슬림 주민들에 대한 공격에 가세했습니다. 1992년 7월 헤르체고비나에 헤르첵-보스나 공화국을 세운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계의 뒤를 따라 ‘인종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사이에 3중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이들이 죽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학살입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95년 7월 11일, 유엔 중재 하에 ‘안전지역’으로 설정돼 보스니아계 피난민들이 머물던 스레브레니차를 세르비아계 군이 공격했습니다.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2-)가 이끄는 4만명 규모의 세르비아계 군대는 카라지치의 지시에 따라 보스니아계 무슬림 80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후에 유엔은 이 학살을 인종말살(genocide)로 규정했습니다. 세르비아계 군인들은 사건을 숨기려고 희생자들을 여러 곳에 집단 매장했다고 합니다.
모스타르의 유명한 유적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의 다리를 비롯해 숱한 역사유적도 파괴됐습니다. 유럽연합(EU·2003년 이전에는 유럽공동체 EC)의 평화정착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엔이 나섰지만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비효율적이었고, 민족들 간 잔혹행위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슬림들과 크로아티아계는 1994년 세르비아계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1992년, 봉쇄된 사라예보. _ 위키피디아
미국의 지원 속에 무장을 강화한 크로아티아는 1995년 5월 자국 영토 내 세르비아계 진영을 공격, 진압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군사력이 와해되고 있던 차에 나토의 공습까지 더해지고 러시아까지 외교적 압박을 가해오자 밀로셰비치는 평화협정에 응했습니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대리인이 1995년 11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미 정부의 중재로 만들어진 평화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무슬림,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공화국 안에 일단 계속 동거를 하게 됐지만 잔혹했던 내전으로 10만 명 이상이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난민이 200만 명에 이르렀고, 유고 지역의 경제는 붕괴됐습니다.
★프라뇨 투지만(1922-99년)
크로아티아의 정치인. 2차 대전 때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에서 활동했고, 전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에 들어가 장군까지 지냈습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장, 공산당에서 추방됐으며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1989년 다당제 자유선거가 도입되자 크로아티아 민주동맹(HDZ)을 창당, 총선에 승리했으며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지명됐습니다. 1991년 5월 국민투표에서 분리독립안이 압도적 찬성을 얻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계와 내전을 벌였습니다. 독립영웅이라는 평가와 전쟁범죄자, 권위주의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민족 간의 동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2003년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연합(the State Union of Serbia and Montenegro)’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때 ‘세르비아라는 행성의 적도(the equator of the Serb planet)’라고 불렸던 코소보는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미국 등 서방국들이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고 즉시 승인해준 반면 러시아는 변방의 자치공화국들이 덩달아 독립하려 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세르비아와 가깝기도 하고요) 반대했습니다. 지금 코소보는 어찌어찌 독립한 나라 취급(?)은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앞날은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2014년 9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옛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종신형을 구형받는 카라지치. _ AFP
옛 유고연방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극은 국제사회의 노력 덕에 법의 심판대에 간신히 오르긴 했습니다만 학살자들을 처벌하지도 못했고(적어도 현재까지는) 진상을 투명히 밝히지도 못했습니다. 세르비아라는 나라는 자기네 학살자들을 숨겨주기 급급해하는 인상마저 풍겼습니다.
유고 내전은 여러 고민거리를 세계에 던졌습니다. 유럽은 냉전 이후 자기네 대륙에서 벌어진 참상이라는 첫 도전을 만났으나 그 시험대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무슬림)를 말살하려 했던 옛 유고연방의 또다른 내전을 다룬 ‘전쟁이 끝난 후’라는 책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 레지스 드브레, 타리크 알리, 미셸 초스도프스키 등 서방의 ‘좌파 지식인’들은 “NATO의 코소보 공습은 인도주의를 내세운 제국주의의 공격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인종청소를 비롯해 세르비아계의 잔혹행위가 시작된 것은 오히려 NATO의 공습 이후였다는 것이죠. 그들은 또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국제구호기구 요원들은 언제나 분쟁지역에 서방이 ‘개입’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는 인도주의라는 간판 아래 강대국들이 해당 국가의 주권을 무시할 명분을 주는 것에 다름없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조 사코의 지적대로, 강대국들이 허울 뿐인 ‘중립’ 운운할 적에 지구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시체마저 갈갈이 찢기고 있었습니다. 강대국의 ‘월권’과 ‘개입’ 간의 그 모호한 간격을 세계시민들은 어떻게 올바로 포착하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유고 내전과 국제사회의 개입이 던져준 고민입니다.
발칸 전문가인 영국 학자 마크 마조워의 평가를 옮겨봅니다.
"전쟁으로 연방이 붕괴된 사례는 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유일했다. 전반적으로 동유럽, 그리고 유럽 전체는 20세기 초반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안정적인 질서를 구가하게 되었다. 1989년 이후에는 국경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이 받아들였다. 독일은 마침내 폴란드의 서부국경을 인정했으며, 과거 동쪽 영토에 대한 주장을 모두 포기했다.
발트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전후에 획정된 국경 안에서 독립을 추구했으며, 1939년 이전 영토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안정이란 위태롭게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이어서, 구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일견 비도덕적이고 모순적인 정책은 많은 부분 바로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노력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조워, <암흑의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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