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48. 냉전 시기의 동유럽

딸기21 2016. 7. 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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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948-1991년의 동유럽 


흑... 이제는 '가물에 콩 나듯'도 아니고... 근 반년 만에 정리하네요. 대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시리즈, 그러나 어느새 20세기의 뒤쪽 절반으로 후딱 넘어왔습니다!

1943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 그리고 독일에 점령된 동유럽은 동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막대한 전력을 앞세운 소련군에 패하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이 되자 나치 제국의 붕괴는 가속화됐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 군을 소련 땅에서 폴란드로 몰아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역시 독일 군이 밀리고 있었습니다(201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이 떠오르네요.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옛 동맹국이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빠진 바람에 썰렁하기 짝이 없는 기념식이 됐지요 ㅎㅎ).


1950년대의 프라하. Sázavská 거리의 시나고그 앞이라고 합니다. www.radio.cz


서방측의 공습으로 먼저 독일 군의 통신과 병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소련군은 1944년 8월 발칸으로 진군해 루마니아를 굴복시켰으며 이어 불가리아가 무너졌습니다. 10월에는 티토가 이끄는 공산당 파르티잔(게릴라)들이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했습니다.

사면초가가 된 독일은 남아 있는 다른 땅들을 포기하고 헝가리만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다페스트는 독일에는 동유럽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폴란드로 깊숙이 밀고 들어가다가 8월에 잠시 진격을 멈췄습니다. 이 때를 틈타 독일은 소련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1945년 2월 스탈린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in D. Roosevelt,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처리'의 기본 틀을 만들기 위해 얄타 회담을 열었습니다. 동유럽에 이미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서방도 강력한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태생 저술가 겸 저널리스트인 이안 부루마의 <0년-YEAR ZERO>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출발점인 2차 대전 종전의 해, 1945년 세계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책은 붉은 군대 주둔 하에서 독일과 동유럽에서 벌어진 처참한 복수극들이 생생히 그리고 있습니다. 점령지에서 소련군의 횡포와 약탈, 집단 성폭행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전시에 벌인 것들이나 다를 바가 없더군요. 하지만 '승자'에게 누가 책임을 묻겠습니까. '패자'에게조차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는데...


아무튼 스탈린의 주장에 따라 종전 뒤 동유럽에 ‘자유롭고 아무 간섭 없는 선거’를 보장해주기로 열강들은 결정했습니다. 전쟁 이전 동유럽 국가들의 결정을 존중하되 폴란드는 예외로 해, 베르사유에서 정한 커즌 라인 동쪽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땅은 소련이 갖도록 했습니다(두 나라 모두 소련이 해체된 뒤 독립공화국이 됐지요). 

1945년 2월, 얄타의 '빅3'...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그리고 스탈린입니다. _미국 국립문서보관소


그해 7-8월 포츠담 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소련이 가져가는데 대한 보상으로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독일 쪽으로 재조정, 폴란드의 서부 영토를 늘려주기로 했고 스탈린도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습니다.

얄타에서 스탈린이 주장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선거는 대부분 약속대로 치러졌습니다. 그 선거가 얼마나 자유롭고 민주적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겠지만 최소한 그 국가들이 파시스트에게 다시 넘어가거나(1945년의 상황으로 보면 그런 일을 우려할 근거가 충분했습니다) 선거 없이 노골적인 군부독재자가 집권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소련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소련은 기차를 동원해 독일에서 해방된 동유럽 국가들로 소비에트식 훈련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이들은 인민전선 정부 형태로 각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실현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겉보기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전통적인 지역 정당들과의 연합 형태였지만 인민전선은 대개 공산당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중간단계였습니다. 인민전선 정부 안에서 공산당이 차지한 각료직은 수적으로는 미미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직은 조직적 기반이 없었고, 관료층을 탄탄하게 배출할 만큼 세력이 크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소련을 등에 업고 차지한 자리는 내무, 외무, 재무장관 같은 핵심 요직들이었습니다. 


냉전 시기 폴란드, 배급품을 받기 위해 길게 줄 지어선 시민들. _위키피디아


인민전선, 이어 공산당 정부로 가는 과정에서 혼란도 적지 않았습니다. 체코 초대 대통령 토마슈 마사리크의 아들인 얀 마사리크 Jan Masaryk 외교장관이 프라하에서 숨진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얀 마사리크는 1941~1945년 영국 런던에 세워진 체코망명정부의 외무장관이었고, 1945년 프라하에 돌아온 뒤에도 장관직을 계속 맡았습니다. 하지만 1948년 2월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외무부 청사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비밀경찰이 그를 살해한 후 투신자살로 위장했다는 소문이 계속 떠돌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에 점령된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실세로 등장했습니다. 다만 영국군이 1944년까지 주둔하고 공산당과 우익 진영 간 내전(1946-49년)이 벌어진 그리스는 예외였습니다. 그리스 내전은 유럽의 '가려진 상처'입니다. 유럽인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국인들에게는, 스페인 내전과 함께 철저하게 가려진 역사적 사건이지요. 유럽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극심한 내전.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좌파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의 대담 <역사는 현재다>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리스 내전은 사실상 그리스 내 모든 가족이 연루된, 잔인하고 지독한 전쟁이었어요. 가족들마저 나뉘고, 분열되었지요.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그 전쟁을 ‘처칠의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처칠은 그리스 우익 세력, 왕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 나라가 전쟁 이후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이에요.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모임 -이들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스탈린보다는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더욱 동조하고 있었죠-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했어요. 전설적인 지도자 아리스 벨루키오티스가 이끄는 모임이었습니다. 처칠은 개입하고야 말았죠. 공산주의자들을 무너뜨릴 때까지 정말로 포악스러운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어요."

그리스 좌파 인민해방군(ELAS) 게릴라들. _ 그리스 외교부 플리커(www.flickr.com/photos/greecemfa/5119847763)


조금 길지만 더 인용해봅니다. 

"이런 사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 있죠. 사람들이 기억하니까요.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건은 반복해서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역사는 곧 현재라고 말해주곤 해요.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은 과거의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에서 2차 대전 후 처음에는 주로 좌파들인 레지스탕스 출신들이 인민재판 형식으로 '부역자'들을 처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어 파시스트 잔당, 우익들이 준동합니다. 좌파는 무장해제 약속대로 총을 내렸지만, 우익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그리스 전역에서 좌파 학살을 빙자한 민간인 학살을 벌였습니다. 이어 좌파들의 게릴라 항전이 벌어지자 영국이 개입했고, 결국 미국이 개입해 '소탕'했지요...


다시 동유럽 상황으로 돌아가면, 소련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맞춰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라는 기구를 만들어,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코메콘(COMECON·러시아어 약칭은 SEV)

미국의 마셜플랜에 맞서 1949년 1월에 결성된 공산국가들의 경제협력기구.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 쿠바, 베트남 등이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유고슬라비아와 북한, 라오스, 앙골라, 모잠비크,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아프리카 몇몇 공산국가들이 준회원국이었습니다. 서방의 유럽경제기구에 맞서 1959년에 별도의 규약을 채택, 경제통합을 추진했으나 큰 기능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자 1991년 6월 공식 해체됐습니다.



빨간 색은 코메콘 회원국, 노란 색은 참관국입니다.


서방은 소련의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1947년 미국은 1차 마셜 플랜을 실시했고 1949년에는 서유럽과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출범시켰습니다. 나토에는 그리스와 터키도 가입했습니다. 소련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을 통해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군사협력기구를 만들어 나토에 대응했습니다. 이 기구에는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동유럽 모든 공산국가들이 포괄됐다가 1960년 알바니아가 탈퇴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가 바르샤바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반파시스트 투쟁 영웅으로 국가지도자가 된 티토는 2차 대전 뒤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1948년 스탈린과의 협정을 깨고 민족주의와 결합시킨 공산주의 노선으로 돌아섰습니다. 티토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철권통치를 했지만 경제에서는 사회주의-자본주의 혼합 경제체제를 실험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서로 경쟁해온 유고슬라비아 내 여러 민족들 간의 압력을 무마하고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티토 외에는 없었습니다.


1955년 4월 반둥회의에 참석한 자와할랄 네루(인도), 크와메 은크루마(가나), 가말 압둘 나세르(이집트),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요시프 티토(유고슬라비아).


1980년 그가 사망하자 10년 동안 유고슬라비아는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쇠퇴로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1991년 폭력사태를 겪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무너졌습니다. 이웃한 알바니아는 원래 티토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지만 1948년 스탈린을 지지하면서 독립국가 지위를 굳혔습니다. 1960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Nikita Khrushchev 서기장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자 알바니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깨고 바르샤바조약에서 탈퇴했습니다. 이후 알바니아는 중국의 마오주의에 잠시 고개를 돌렸으나 마오주의가 극단으로 향하자 이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습니다.


★알바니아


알바니아인의 조상은 기원은 2000년 무렵 발칸에 정착한 일리리아인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7세기 경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일리리아인들은 로마제국과 게르만족, 훈족, 슬라브족의 잇단 침략을 겪었고 중세 이후에는 비잔틴 제국과 2차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알바니아는 동유럽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미개발된 지역으로 남게 됐습니다. 


1912년 마침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지만 1차 대전 때 다시 동맹국에 점령을 당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 때문인지 알바니아는 공산화된 뒤에도 1946~91년 동유럽에서 가장 고립주의적인 나라로 남았습니다. 공산통치에서 벗어난 뒤 2009년 4월 유럽연합(EU) 가입을 신청했습니다.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 몇몇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예를 따라 민족적 공산주의를 실험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습니다.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개혁운동들은 모두 소련에 진압됐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을 하나의 블록으로 묶어 종속적인 위치에 두려고 한다는 것, 소련이 통제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에서 벗어나려는 일탈 움직임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사건들이었습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세 나라는 모두 소련군의 침공을 받고 모스크바 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체코를 침공한 소련군 탱크. _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마르크스주의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에 더해 1970~80년대 서구 자본주의와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Mihail Gorbachev 소련 대통령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토로이카 perestroika (‘재건’) 라는 경제개혁 조치들과 글라스노스트 glasnost 즉 ‘개방’을 통한 공산당 체제의 개혁을 시작했으나 두 시도 모두 1차적인 목표조차 이루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두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려면 소련이 동유럽 공산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현실화되자 그 힘은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폭발적인 거부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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